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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신[福信]

내분으로 제거된 백제부흥운동의 핵심 인물

미상 ~ 663년(풍왕 4)

복신 대표 이미지

부여 당 유인원 기공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복신(福信)은 백제 말기의 왕족이자, 백제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무장이다. 도침(道琛)과 함께 임존성(任存城)·주류성(周留城)을 거점으로 삼았고, 왜에 있던 부여풍(扶餘豐)을 왕으로 옹립하는 등 부흥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도침과 반목하여 도침을 살해하고, 이어 부여풍까지 죽이고 부흥운동의 주도권을 잡으려다가 오히려 부여풍에게 죽음을 맞았다.

2 가계와 백제 멸망 이전까지의 활동

복신은 무왕(武王)의 조카이자 의자왕(義慈王)의 사촌이다. 왕족이므로 성은 부여씨(扶餘氏)이고, 이름은 복신이다. 『일본서기』와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에는 귀실복신(鬼室福信)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태어난 연대는 알 수 없다. 백제부흥운동을 전개하던 중 663년 부여풍(扶餘豐)에게 죽임을 당했다.

복신이 문헌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627년(무왕 28년) 8월이다. 이때 무왕은 조카인 복신을 당에 조공사로 보냈다. 그리고 복신은 백제와 신라의 화해를 종용하는 당 태종(唐 太宗)의 새서(璽書)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660년(의자왕 20)에 백제가 멸망하고 부흥운동을 일으키며 다시 등장할 때까지 33년간 복신에 관한 기록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백제의 상황을 통해 복신의 활동이 기록되지 않은 이유를 추론한 주장이 있다. 복신은 왕의 조카로서 당에 사신으로 다녀올 정도로 정치적 입지가 탄탄했던 인물이었다. 당시 무왕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대외 확장 정책을 펴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관산성전투에서 당한, 신라에 대한 깊은 원한이 있었다. 그리고 백제왕으로서 대내외적 인정을 받기 위해 대당 외교에도 신경을 썼다. 그런데 복신이 받아온 태종의 답신에는 신라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군사적 행동을 하지 말고 양국이 화목하게 지낼 것을 종용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백제의 입장에서는 대당 외교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복신의 활동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외교적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정치 일선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3 백제부흥운동의 시작과 사비성 포위

660년(의자왕 20) 7월 13일 사비성이 함락되었다. 태자와 함께 웅진성으로 도망갔던 의자왕은 웅진방령 예식진(熊津方領 禰寔進)에게 잡혀 사비성으로 끌려왔다. 7월 18일, 의자왕의 항복으로 백제는 멸망했다. 그러자 곳곳에서 백제 부흥을 위한 봉기가 일어났다. 그중에서 복신은 도침과 함께 손을 잡고 부흥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한 인물이다.

복신은 여러 세력과 힘을 합쳐 백제 부흥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가 멸망하자 나당군에 항복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탈출한 인물이다. 복신과 흑치상지는 백제 멸망 직후부터 임존성에서 함께 부흥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그러나 부흥운동이 종식되는 임존성전투 이전까지 흑치상지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부흥운동은 사실상 복신과 도침의 주도로 전개된 것으로 보인다.

9월 23일, 복신과 도침을 필두로 한 부흥군이 사비도성을 포위하자, 도성 내의 유인원(劉人願)과 김인태(金仁泰)의 나당군이 고립되기에 이른다. 이에 당군과 신라병사들이 백제 부흥군과 싸워 포위를 풀 수 있었다. 사비성 함락에 실패하고 사비 공격이 장기화됨에 따라, 부흥군은 금강 서쪽의 임존성에서 점차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장기 항전에 대비해 주류성(周留城)으로 중심지를 옮겼다.

661년 2월, 부흥군은 사비 공격을 재개해 성을 포위했다. 이에 당은 유인궤를 보냈고, 신라도 11명의 장군을 비롯한 3만의 군대를 추가로 투입했다. 부흥군은 두량윤성(豆良尹城. 충남 청양 계봉산성)에서 신라군을 맞아 36일간 싸운 끝에 이겼다. 유인궤의 군대는 신라군과 함께 웅진 쪽에서 사비로 진군해 들어왔다. 이들이 사비성의 유인원 군대와 합세하는 것을 막기 위해 먼저 도침이 금강 어귀에서 나당군을 맞았다. 그러나 1만 명이라는 큰 희생자를 내고 임존성으로 퇴각했다. 그러자 복신 역시 사비성 포위를 풀고 임존성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두량윤성에서의 승리로 남쪽 여러 성들이 일시에 동조해 오는 등 부흥군의 위세는 날로 높아만 갔다. 당시 당은 고구려 공격에 나선 상황이었고, 신라 역시 662년 초까지는 당에 군량을 보급하느라 부흥군과의 전쟁에 힘을 다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도침은 스스로를 영군장군(領軍將軍)이라 일컫고, 복신은 스스로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 일컬으며 백성들을 모았다. 복신과 도침은 유인궤에게 사자를 보내 백제유민에 대한 당의 잔인함을 들어 거병의 이유를 설명했다. 유인궤가 사자를 보내 설득하려 했지만, 복신과 도침은 사자의 관직이 낮다며 돌려보냈다. 이렇게 자신감이 넘치던 시기가 바로 부흥운동군의 전성기였다.

4 부여풍의 귀국과 도침의 죽음

부흥운동의 기세는 초기부터 매우 거셌다. 그러나 부흥군의 입장에서는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운동의 구심점이 필요했다. 백제가 멸망한 후 의자왕을 비롯한 왕족들은 모두 당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복신이 주목한 사람은 왜에 질자(質子)로 가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이었다. 그는 의자왕 즉위 초에 왜국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20여 년간 왜에 체류하면서 천황의 자문 역할을 하는 등 왜 조정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흥군의 입장에서 부여풍은 백제 왕실의 정통성과 함께 왜의 지원까지도 이끌어낼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러한 그의 배경은 복신과 도침이 양분하고 있는 부흥군 세력을 중재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복신이 왜에 부여풍의 귀국을 요청한 것은 660년 10월이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귀실복신이 좌평 귀지(貴智) 등을 보내 당의 포로 100여 명을 바치면서, 왜군의 출병과 왕자 풍의 옹립 및 귀국을 요청했다고 한다. 왜는 즉각 원조를 결정했으나, 제명천황(齊明天皇)의 사망으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부여풍의 귀국에 대해서 661년 9월 혹은 662년 5월 두 가지 기록이 전하는데, 이 때 왜군이 풍을 백제까지 호송해 주었다. 복신은 머리를 조아리며 부여풍을 맞았고, 나라와 조정을 모두 맡겼다고 한다. 이로써 부흥군은 정통성까지 확보한 채, 조직적인 운동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도침의 군사를 합병하는 일이 벌어졌다. 부여풍은 이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고 제사만 주관할 뿐이었다. 복신이 도침을 죽인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부여풍을 대하는 복신과 도침의 태도에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복신은 부여풍을 상징적인 존재로만 여기고 있었던 반면, 도침은 부여풍에게 실제 군주와 마찬가지로 군신의 예를 갖추었던 것이다. 이에 복신은 부흥군 내에서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을 우려했고, 결국 도침을 살해하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부여풍은 백제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의 세력기반이 취약했다. 때문에 복신의 독주를 제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부흥운동의 한 축이었던 도침이 내분으로 사망하면서 부흥군의 사기는 크게 꺾였다. 나당군은 이 틈을 타서 진현성(眞峴城)과 지라성(支羅城)을 비롯한 금강 동쪽의 성책들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신라에서 웅진성으로 이어지는 군량 수송로가 다시 열렸고, 비로소 웅진성은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부흥군과 나당군의 전세가 역전되는 상황 속에서, 662년 12월에는 부흥군의 천도 문제가 제기되었다. 복신은 주류성이 전쟁에는 적합하지만, 오래 머물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라며 피성(避城, 전라북도 김제)으로의 천도를 강행했다. 하지만 천도 이후 신라군이 부흥군을 집중 공격하여 남방의 성들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부흥군은 이에 위협을 느끼고, 663년 2월 금강을 넘어 다시 주류성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5 내분의 격화와 복신의 죽음

전세는 점점 부흥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부흥군 내부에서는 다시 분란이 일어났다. 도침을 살해한 후 정권을 장악한 것은 복신이었다. 그러나 부여풍 역시 왜에 원군 요청을 추진하는 등 자신의 세력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두 사람이 주도권 쟁탈전을 벌이며 충돌한 것이다.

663년 6월, 복신은 병을 핑계로 누워 있다가 부여풍이 문병을 오면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미리 계획을 알아차린 부여풍에게 오히려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후 부여풍은 고구려와 왜국에 구원병을 요청해 자신에게 대항하는 복신의 군대를 막았다. 이처럼 지도층의 내분이 격화되면서 군사적 충돌로까지 이어졌다. 부흥군 세력은 더욱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부흥군의 내분을 알아차린 나당군은 주류성을 함락시키고자 했다. 부여풍이 왜에 군사를 요청하자 왜는 즉시 군대를 파견했다. 당시 백제에는 당의 손인사(孫仁師)가 부여융(扶餘隆)을 포함한 증원군을 이끌고 들어와 있었다. 손인사 부대는 잔류하고 있던 나당군과 합세하여 백강(白江) 어귀에서 왜군을 맞았다. 8월 27일과 28일에 걸친 전투에서 나당군은 백강으로 진입하려는 왜군을 맞아 모두 승리했다. 4백 척의 배가 불타면서 바닷물이 붉어질 정도였다. 전투에서패한 부여풍은 이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열흘 후 나당군은 주류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최후의 보루였던 임존성마저 함락되면서 백제 부흥운동은 끝이 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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