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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융[扶餘隆]

백제의 태자,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하다

615년(무왕 16) ~ 682년(신문왕 2)

부여융 대표 이미지

백제 부여융묘지 탁본

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부여융(扶餘隆)은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들이다. 태자로 책봉되었지만, 의자왕 후반에 부여효(扶餘孝)로 교체되었다. 백제 멸망 후 당의 유인궤(劉仁軌)와 함께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했고, 이로 인해 웅진도독(熊津都督)에 임명되었다. 백제의 대표로 신라와 1차 웅령회맹(熊嶺會盟)과 2차 취리산회맹(就利山會盟)에 참여했다.

2 백제 멸망 이전까지 부여융의 활동

부여융은 의자왕(義慈王)의 장자이다. 615년(무왕 16)에 태어났는데, 이때는 의자가 태자로 책봉되기 전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사씨(沙氏)일 것으로 추정된다. 682년(당 고종 원년)에 6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형제로는 동복형제인 태(泰)와 이복형제인 효(孝)·연(演)·풍(豐)·궁(躬)·충승(忠勝)·충지(忠志) 등이 있다. 후손으로는 부여융의 대방군왕(帶方郡王) 직위를 계승한 손자 부여경(扶餘敬)이 있다. 그리고 당 사괵왕 이옹(唐 嗣虢王 李邕)의 부인이 부여융의 손녀로 확인되었다.

부여융이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644년(의자왕 4) 태자에 책봉되면서부터이다. 부여융은 의자왕의 장자이며, 당시 나이 30세였다. 이후 백제 멸망시기까지 부여융과 직접 관련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의자왕 즉위 초 태자로 책봉된 만큼, 의자왕을 보좌하면서 정국에 관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백제 멸망기의 기록에서 당시 태자가 부여융이 아닌 부여효(扶餘孝)라고 되어 있어서 혼란을 준다. 이에 대해서 여러 학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부여융에서 부여효로 태자가 교체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태자가 교체된 시기는 655년(의자왕 15) 무렵으로 추정된다. 이때는 의자왕이 왕비 은고(恩古)를 총애하면서 사치와 향락에 빠지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그리고 충신을 멀리하는 등 정치세력의 교체가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하다. 부여융 역시 이 시기에 부여효에게 태자의 지위를 넘겨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은고의 등장과 관련하여 부여효를 은고의 아들로 보기도 한다.

태자의 지위에서 물러나면서 부여융의 정치적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황은 사비성 함락 상황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공격하자, 의자왕은 태자 부여효와 함께 웅진성(熊津城)으로 피난을 갔다. 사비성에 남은 왕자들 중 부여태(扶餘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저항을 주도했다. 그러자 부여효의 아들 문사(文思)는 당군이 포위를 풀고 물러나면 부여태에 의해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로 부여융을 설득해, 측근들을 이끌고 나당연합군에 항복했다. 국가의 위기상황에서 왕과 태자가 수도를 비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직 태자였던 부여융은 어떤 활동도 주도적으로 하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당시 부여융은 정치적 기반이 매우 취약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660년(의자왕 20) 7월 18일, 웅진 방어 책임자였던 예식진(禰寔進)의 배신으로 사비성의 소정방 앞으로 나가 항복함으로써, 백제는 멸망을 고했다. 8월 2일, 나당연합군은 사비성에서 축하연을 열었는데, 여기에서 부여융은 의자왕과 함께 당 아래에 앉아 무열왕(武烈王)과 소정방(蘇定方), 김유신(金庾信) 등에게 술을 따르는 굴욕을 당했다. 그리고 9월 3일 소정방이 귀국할 때 의자왕과 대신들, 백성 12,800여 명과 함께 당으로 압송되었다.

3 백제부흥운동의 진압

부여융은 11월 당의 낙양(洛陽)에 도착했다. 당 고종은 헌부례(獻俘禮)를 치른 후 의자왕 등을 사면해 주었지만, 의자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하고 낙양 북망산(北邙山)에 묻혔다. 그리고 부여융에게는 국가의 창고를 담당하는 사가경(司稼卿)의 벼슬을 내렸다. 이후 3년 간 부여융의 행적이 확인되지 않는데, 아마도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른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백제에서는 멸망 직후부터 부흥군이 봉기하여 나당연합군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백제의 부흥군들은 남잠성(南岑城)과 정현성(貞峴城)을 차지하고 버텼다. 두시원악(豆尸原嶽)에서는 좌평 정무(正武)가, 임존성에서 복신(福信)과 도침(道琛), 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세력을 모아 나당연합군에 대항했다. 소정방이 귀국한 후 사비성에는 유인원(劉仁願)이 거느리는 당군 1만과 김인태(金仁泰)가 이끄는 신라군 7천이 주둔하고 있었지만, 부흥운동군을 제압할 수 없었다. 오히려 복신과 도침 등이 임존성을 거점으로 점차 사비성을 향해 세력을 확대하고, 주변의 성들이 이에 호응하는 형국이었다. 이에 당 고종은 유인궤(劉仁軌)를 대방주자사(帶方州刺史)로 임명해 군대를 이끌고 백제로 가도록 했고, 다음해인 661년에는 왕문도(王文度)를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임명해 백제지역에 파견했다. 그리고 663년에는 손인사(孫仁師)가 이끄는 증원군을 다시 파견했는데, 이때 부여융도 함께 백제로 돌아왔다.

당시 나당연합군은 부흥운동군의 왕성인 주류성(周留城)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손인사와 유인원, 문무왕(文武王)은 육군을 이끌었고, 유인궤와 부여융은 수군과 보급선을 이끌고 각각 백강(白江)으로 향했다. 8월 27일과 28일에 걸친 전투에서 나당군은 백강 어귀로 진입하려는 왜군들을 맞아 네 번 싸워 모두 이기고 군선 4백 척을 불태웠다. 불타는 적선에 바닷물이 붉어질 정도로 대승이었다. 백강구전투에서 왜군이 패하자 부흥군의 왕인 부여풍(扶餘豐)은 어디론가 도망하였다. 그리고 백강에서 수군과 합류한 육군은 먼저 주류성으로 가서 9월 7일에 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나당군은 임존성 공격에 나섰다. 임존성은 원래 흑치상지가 부흥운동의 거점으로 삼았던 곳인데, 주류성이 함락되자 흑치상지는 별부장 사타상여(別部將 沙咤相如)와 항복했다. 흑치상지의 항복은 당 고종이 사신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부흥운동이 끝난 후 흑치상지가 부여융과 함께 활동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부여융의 적극적인 회유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지수신(遲受信)의 거센 저항으로 한 달 넘게 어려움을 겪었으나, 흑치상지와 사타상여의 활약으로 마침내 임존성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백제 부흥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다. 기록상 이 전투에서 부여융의 활약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당의 군대가 모두 동원된 전쟁이었던 만큼, 부여융 역시 임존성전투에 참여했을 것으로 본다.

4 웅진도독 역임 시기의 부여융

백제부흥운동이 끝나자, 손인사의 군대는 물론이고 백제고지에 주둔하던 유인원도 당으로 돌아갔다. 이때 부여융과 흑치상지도 함께 돌아갔다. 백제고지에는 유인궤가 남아 전후 처리를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신라는 남쪽에서 부흥운동군과 싸워가며 승리해 이 지역들을 차지하고 있었다. 신라의 영역이 사비성을 함락할 때보다 확장된 상태였기 때문에, 당과 신라는 새롭게 영역을 획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664년(문무왕 4) 2월, 유인원의 중재 하에 신라의 김인문과 백제의 부여융이 웅령(웅진)에서 1차 맹약을 맺었다. 당으로 갔던 부여융은 이 맹약을 맺기 위해 다시 백제로 돌아온 듯하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유인궤의 추천으로 웅진도독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665년(문무왕 5) 8월 13일, 유인원의 중재 하에 신라 문무왕과 웅진도독 부여융이 웅진 취리산에서 다시 맹약을 맺었다. 취리산회맹의 결과 백제의 서부지역은 웅진도독부가 다스리고, 동부는 계림도독부가 다스리게 되었다. 당시 부여융의 나이는 51세였다.

맹약을 맺은 직후인 8월 하순, 유인궤는 부여융을 포함한 백제·신라·왜의 사자를 데리고 당으로 귀국한다. 이듬해 정월 태산(泰山)에서 있을 당 고종의 봉선의식(封禪儀式)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부여융은 봉선 참여에 이어 곡부(曲阜)에서 공자의 제사를 섭행했다. 그리고 백제로 돌아와 웅진도독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러나 귀국 이후 부여융의 역할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웅진도독으로서 실제 백제고지를 다스렸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웅진도독 임명 자체가 백제 유민을 회유하기 위한 것이었던 만큼, 실질적인 역할 수행은 어려웠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더 우세하다. 670년경 신라는 백제고지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리고 671년(무무왕 11) 사비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면서 웅진도독부는 사실상 역할을 상실하였다. 이후 부여융은 유인원·유인궤와 함께 당으로 들어갔다.

5 당에서의 활동과 죽음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지배하려던 당의 계획은 신라의 거센 저항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신라와 당의 이른바 나당전쟁이 신라의 승리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당은 676년 2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요동성(遼東城)으로 옮겼고, 명목상으로만 있던 웅진도독부 역시 요동의 건안성(建安城)으로 이치되었다. 이때 당은 부여융을 웅진도독 대방군주(熊津都督 帶方郡主)로 임명하면서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그러나 백제는 이미 신라에게 점령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었다. 부여융은 안동도호부에 의탁해 백제 유민을 다스리다가 죽었다.

부여융이 사망한 것은 682년 12월 24일, 그의 나이 68세 때였다. 부여융의 시신은 낙양 북망산(北邙山)에 매장되었다. 부여융이 사망한 후 손자인 부여경이 대방군왕의 지위를 계승했다. 그리고 손녀는 사괵왕 이옹의 후처가 되었다.

부여융은 웅진도독에 임명되었지만 실질적인 역할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당의 입장에서는 백제고지와 당으로 사민된 백제유민을 다스리는데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은 부여융을 일국의 대표로 대우했고, 사후에는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을 추증했으며 손자에게는 대방군주의 책봉호를 계승하도록 했다. 이로 볼 때 당에서 부여융을 비롯한 부여씨 후손들의 지위가 낮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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