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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善德女王]

우리 역사의 첫 여왕

미상 ~ 647년(선덕여왕 16)

선덕여왕 대표 이미지

경주 선덕여왕릉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선덕여왕은 신라 제27대 왕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다. 여왕이라는 이유로 국내 정치세력의 저항과 주변국의 압박을 받았다. 그러나 김유신金庾信)과 김춘추(金春秋) 등의 지지세력을 활용해 위기를 극복하고, 사상적으로는 불교의 힘을 이용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세웠다.

2 선덕여왕의 가계와 즉위 과정

선덕여왕은 역사서에 선덕왕(善德王)이라 기록되어 있다.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덕만(德曼) 혹은 만(萬)이다. 선덕(善德)은 죽은 후에 추증한 시호(諡號)이다. 제26대 진평왕(眞平王)의 맏딸로, 어머니는 복승갈문왕(福勝葛文王)의 딸인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金氏)이다. 그리고 동생으로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을 낳은 천명공주(天明公主)가 있었다. 서동설화(薯童說話)에서는 선화공주(善花公主)가 진평왕의 셋째 딸이라 하여, 선덕여왕의 동생으로 나온다. 선덕여왕의 남편에 대해서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음갈문왕(飮葛文王)이 배필이라고 하였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혼인을 하지 않은 것으로 나와 차이를 보인다. 자식은 없었다고 한다.

632년 정월, 진평왕이 죽자, 선덕여왕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신라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이 왕위에 올랐던 이유는 무엇일까? 『삼국사기』에는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국인(國人)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칭호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 중고기의 왕위가 반드시 왕의 아들로 계승된 것은 아니어서, 여왕 탄생의 이유로는 불충분하다. 같은 사안에 대해서 『삼국유사』는 ‘성골(聖骨) 남자가 다하여 여왕을 세웠다’고 다른 이유를 전하고 있다. 당시 진평왕의 가계를 살펴보면, 진평왕의 동생인 백반(伯飯)과 국반(國飯)은 이미 사망한 뒤였고, 이들에게도 자식은 국반의 딸인 승만(勝曼, 진덕여왕) 밖에 없었다. 진평왕의 가계에 성골 신분을 가진 남자가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차선책으로 성골 신분으로서 여성인 덕만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성골이라는 신분은 선덕여왕 즉위의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여성이라는 점은 왕위계승의 반대 이유가 되기도 했다. 진평왕이 죽기 직전인 631년(진평왕 53), 이찬 칠숙(伊湌 柒宿)과 아찬 석품(阿飡 石品)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다. 이 난은 여성인 선덕여왕이 후계자로 내정된 것에 대한 반발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선덕여왕은 성골 신분을 강조하고, ‘성고황조’라는 존호를 통해 자신의 신성성을 내보이며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확보했던 것이다.

선덕여왕은 632년 즉위하여 647년까지 16년간 신라를 다스렸다. 선덕여왕은 생전에 자신이 죽을 날짜를 정확히 이야기하며, 낭산(狼山) 남쪽의 도리천(忉利天) 가운데에 장사지내라고 하였다. 선덕여왕이 자신이 예언한 그 날짜에 죽자, 신하들은 낭산 아래 양지바른 곳에 장사를 지냈다. 그런데 후에 문무왕(文武王)이 선덕여왕릉의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창건했다. 불교에서 도리천은 사천왕천의 위에 있다고 하므로, 선덕여왕의 예언이 그대로 맞았던 것이다. 현재 선덕여왕릉은 경주시 배반동에 위치하고 있다. 선덕여왕이 죽자, 사촌동생인 승만이 왕위에 올라 진덕여왕이 되었다.

3 선덕여왕대의 국내 정치

선덕여왕이 여성으로서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김유신과 김춘추로 대표되는 신흥 귀족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칠숙의 난에서 볼 수 있듯이 구귀족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이에 즉위 초에는 귀족들과 어느 정도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일환으로 선덕여왕이 취한 첫 번째 조치가 바로 대신 을제(乙祭)에게 국정을 총괄하도록 한 것이었다.

선덕여왕은 즉위 초반 백성들에 대한 위문과 진휼정책을 많이 실시했다. 관리를 보내 어려운 사람들을 구휼하고, 조세를 감면해주거나 지방을 순회 위문하는 형태였다. 그리고 분황사(芬皇寺)와 영묘사(靈妙寺)를 창건하고, 백좌강회(百座講會)를 열어 인왕경(仁王經)을 강론하는 등 불교행사도 빈번했다. 인왕경은 왕권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하는 불교의 경전이다. 결국 이같은 조치들은 민생안정과 종교적 신성성을 강조함으로써, 왕위계승의 불안감을 불식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들이라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634년(선덕여왕 3) 봄에는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바꾸고, 이듬해에는 당으로부터 신라왕으로 책봉을 받았다. 이로써 선덕여왕의 치세는 대외적으로도 공인받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선덕여왕은 점차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해 나간다. 636년(선덕여왕 5)에는 선덕여왕이 궁궐 서남쪽 옥문곡(玉門谷)에 백제 군사가 숨어있는 것을 미리 알아채고, 알천(閼川) 등을 보내 물리친 일이 있었다. 여기에서도 알천의 군사적 능력이 아니라, 적군의 매복을 눈치 챈 선덕여왕의 비상한 능력이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하슬라주(何瑟羅州)에 북소경(北小京)을 설치하여 지방행정을 정비하고자 했으며, 당에 자제(子弟)를 파견해 국자감(國子監)에 입학시켜줄 것을 청하기도 했다. 국자감은 유학을 가르치는 국가기관이므로, 결국은 유교의 충효사상을 통해 왕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선덕여왕의 정치는 642년(선덕여왕 11) 대야성(大耶城) 전투의 패배를 계기로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신라는 백제 의자왕(義慈王)에게 대야성을 비롯한 서쪽의 40여 성을 빼앗김으로써 위기감이 조성되었다. 이에 선덕여왕은 고구려와 당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오히려 당 태종(太宗)에게 “신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고 있어 이웃나라의 업신여김을 받는다”는 비판을 받음으로써 선덕여왕의 권위는 더욱 흔들리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647년(선덕여왕 16) 정월, 상대등 비담(上大等 毗曇)과 염종(廉宗)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의 명분은 “여왕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반란군과 왕군은 각각 명활성(明活城)과 월성(月城)에 주둔한 채 10여 일을 대치했다. 그때 큰 별이 월성에 떨어져 군사의 사기가 꺾였으나, 김유신이 허수아비에 불을 붙이고 연에 실어 올려보내는 계책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로써 비담의 난은 진압되었지만, 이 와중에 선덕여왕이 죽고 만다. 비담의 난으로 선덕여왕의 통치에 반대하던 귀족세력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선덕여왕을 측근에서 보좌하던 김춘추나 비담의 난을 진압한 김유신의 세력은 더욱 강성해지게 되었다.

4 선덕여왕대의 대외관계

신라는 진흥왕(眞興王)의 영토 확장 이후, 이를 되찾으려는 백제와 고구려의 지속적인 공격에 시달려 왔다. 이것은 선덕여왕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중에서도 백제는 7차례에 걸쳐 단독 혹은 고구려와 연합해 신라를 공격했다. 백제의 공격은 633년(선덕여왕 2) 서쪽 변경을 침입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 이후 백제에서 의자왕이 즉위하자, 신라에 대한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특히 642년 7~8월에 걸친 전쟁은 신라의 정치와 외교에 결정적인 변곡점이 된 사건이었다. 이 전쟁에서 신라는 대야성을 비롯한 서쪽 40여 성을 빼앗겼다. 그리고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古陁炤)와 사위인 대야성주 김품석(金品釋), 죽죽(竹竹) 등이 전사했다. 또한 이 시기에 백제와 고구려가 당항성(黨項城)을 빼앗아 신라와 당의 교통로를 끊고자 하는 일도 일어났다.

이로써 신라는 가야 지역의 지배권을 빼앗기고, 고립될 위기에 처했다. 그리고 김춘추는 백제에 강한 원한을 품게 되었다. 이 원한을 갚기 위해 김춘추는 직접 고구려로 가 군사를 청했다. 그러나 보장왕(寶藏王)은 죽령(竹嶺) 서북쪽의 땅을 반환해줄 것을 요구하며 청병을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김춘추를 억류한다. 이에 김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로 들어가니 그제서야 김춘추를 풀어주었다. 고구려 청병외교에 실패한 신라는 이듬해인 643년(선덕여왕 12) 9월, 당에도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백제의 계속된 공격을 막기 위해 김춘추가 외교적으로 노력을 했다면, 군사적으로는 김유신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신라는 김유신을 대장군을 삼아 백제의 7성을 빼앗는 등 백제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김김유신은 645년(선덕여왕14)에도 연달아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며 선전하고 있었다. 같은 해 5월, 당 태종(太宗)이 고구려 정벌에 나서자, 신라는 군사 3만을 보내 이를 도왔다. 하지만 그 틈을 타 백제에게 서쪽의 7성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처럼 선덕여왕 대의 신라는 백제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지만, 전체적으로는 열세를 보이고 있었다. 고구려 역시 신라에는 적대적인 상황이어서, 신라는 고립을 피하기 위해 당과의 외교에 주력했다. 즉위 초부터 거의 매년 사신을 보내 여왕임에도 불구하고 ‘신라왕’으로 책봉을 받는데 성공했다. 또한 당에 유학생들을 보내 국학(國學)에 입학시켜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선덕여왕의 청병 외교는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같은 노력은 이후 김춘추가 당에 가서 당의 군사적 지원을 이끌어내는 바탕이 되었다.

5 선덕여왕대의 불교

신라 왕실은 법흥왕(法興王)의 불교 공인 이후, 불교를 정치에 적극 활용했다. 이러한 신라 불교의 특징을 ‘호국불교(護國佛敎)’ 혹은 ‘국가불교(國家佛敎)’라고 부른다. 이러한 경향은 선덕여왕 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선덕여왕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진흥하고, 동시에 왕권 강화를 위해 활용했다.

선덕여왕의 즉위 이후 분황사와 영묘사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왕이 병이 들자 황룡사(皇龍寺)에서 백고좌회를 열어 인왕경을 강론하기도 했다. 황룡사는 신라 제일의 사찰로, 당시 호국불교의 중심 도량이었다. 그리고 『인왕경』은 불교를 통해 나라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철학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경전으로, 우리나라 호국불교의 근본 경전이다. 황룡사에서 『인왕경』을 강론했다는 것만으로도 ‘불교신앙으로 국가를 보호한다’는 호국불교의 특징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선덕여왕의 불교정책은 자장(慈藏)의 활동을 통해서 더욱 잘 드러난다. 자장은 636년(선덕여왕 5)에 불법을 배우기 위해 당에 들어갔다가, 643년(선덕여왕 12) 선덕여왕의 요청으로 귀국했다. 선덕여왕은 자장을 분황사에 머무르게 하면서 대국통(大國統)에 임명했다. 선덕여왕과 왕실의 후원을 배경으로, 자장은 계율을 강조하며 승단조직을 정비했다. 이로써 신라 불교는 체계를 확립하고,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자장의 가장 큰 역할은 황룡사 9층목탑의 건립에서 확인된다. 자장이 당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 한 신인(神人)을 만났다. 그가 사방에서 외침을 당하는 신라의 상황을 걱정하자, 신인은 신라는 여자가 왕으로 있어 주변국의 침략이 잦다면서, 신라에 돌아가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9한(韓)이 와서 조공할 것이라고 하였다. 신라에 돌아와 자장은 선덕여왕에게 이를 아뢰었고, 선덕여왕이 이것을 받아들임으로써 황룡사 9층목탑의 건립이 추진되었다. 탑의 건립에는 아비지(阿非知)라는 백제 장인이 동원되었다. 찰주(刹柱, 탑 꼭대기의 장식물을 지탱하는 쇠로 된 버팀대)를 세우는 날, 아비지는 백제가 멸망하는 꿈을 꾸고, 일손을 멈추었다. 그러자 대지가 진동하며 어둠 속에서 노승과 장사 한 사람이 나와 기둥을 세우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645년(선덕여왕 14) 3월, 드디어 황룡사 9층목탑이 낙성되었다. 그리고 자장은 황룡사의 2대 주지로 취임했다. 신라는 거대한 목탑을 황룡사라는 호국사찰에 건립함으로써, 주변의 여러 나라가 신라에 항복해 오기를 기도했다. 또한 여왕이 가진 통치력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도 담겨 있었다. 그렇다면 황룡사 9층목탑은 선덕여왕의 권위를 높이고, 불교의 힘으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바람이 담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선덕여왕은 자장을 적극 후원함으로써 불교를 정치적으로 활용했고, 자장 역시 정치를 이용해 신라에서 불교의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이러한 자장의 노력에 대해서 그를 ‘호국불교의 구현자’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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