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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총[薛聰]

신라의 문장가(文章家), 이두(吏讀)를 집대성하다

665년(문무왕 5) ~ 미상

설총 대표 이미지

삼국사기 설총 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설총(薛聰)은 태종 무열왕(太宗 武烈王代, 재위 654~661) 시대에 출생하여 강수(强首, ?~?), 최치원(崔致遠, 857~?)과 함께 신라 3대 문장가로 꼽힌다. 그는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표현하는 방법인 ‘이두(吏讀)’를 정리하고 체계화시켰다. 설총에 의해 집대성된 이두는 한문으로 쓰인 유교 경전을 풀이할 때 사용되었고 이후 신라 유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2 출생과 가계

설총은 7세기 신라에서 활동한 승려인 원효(元曉, 617~686)와 당시 요석궁(瑤石宮)에 머물던 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기록에 따르면 설총의 증조부(曾祖父)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赤大公)이고 조부(祖父)는 나마(奈麻) 담날(談捺)이다. 그의 아버지인 원효는 신라를 대표하는 고승(高僧)으로, 공주와 결혼한 이후 승복을 벗고 대중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신라의 불교 대중화에 힘썼다. 또한 원효는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긴 대표적인 불교 학자였다. 그의 저술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및 일본에 전해져 동아시아 불교학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원효의 전기(傳記)는 『삼국유사(三國遺事)』 「원효불기(元曉不羈)」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설총의 출생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원효는 무열왕 딸로 남편을 잃고 홀로 지내던 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다. 따라서 설총은 654~661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설총의 활동에 대해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6 열전6 「설총」에서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이 설총에게 높은 관직을 수여하였다는 내용이 있어 주목된다. 또한 설총이 성덕왕 때에 불상(佛像)을 만들면서 불상의 제작자, 제작시기 등에 대하여 기록한 조상기(造像記)의 내용을 직접 찬술(撰述)한 기록이 있어 흥미롭다. 이를 통해 설총이 무열왕 때에 태어나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 신문왕, 효소왕(孝昭王, 재위 692~702)을 거쳐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 때에도 활약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확인되는 설총의 활동은 주로 원효와 관련되어 있다. 우선 원효가 세상을 떠나자 설총이 아버지의 유골을 빻아 소상(塑像)을 만들고 분황사(芬皇寺)에 안치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때 설총이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하여 예를 올리자 원효의 소상이 돌아보았고, 이후 고려시대까지 돌아본 채로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다음으로 779년(혜공왕 15)에 일본에 온 신라 사신에게 일본인 관리가 원효의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으로부터 받은 감동을 전달한 기록이 있다. 이때 신라에서 파견된 사신은 설판관(薛判官)으로, 바로 설총의 아들인 설중업(薛仲業)이다. 이 가계는 『삼국사기』 권46 열전6 「설총」에 설판관이 원효의 손자라고 한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애장왕(哀莊王, 재위 800~809) 때에 원효를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고선사 서당화상비(高仙寺 誓幢和尙碑)」에 대력(大曆) 연간(766~780) 초 원효의 후손인 한림 중업(翰林 仲業)이 사신으로 일본에 갔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3 이두(吏讀)의 정리와 체계화

설총은 이두(吏讀)를 집대성한 인물로서 그의 업적에서 이두와 관련된 활동은 매우 중요하다. 이두란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은 ‘차자표기법(借字表記法)’을 가리킨다. 기록에 의하면 설총은 성품이 총명하여 태어나서부터 도학(道學)을 알았고 방언(方言)으로 아홉 가지의 유교 경전을 읽어 후학들을 지도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설총이 한문 경전을 방언으로 풀이했다고 하는데, 이때 방언은 신라의 말을 의미한다.

당시 경전을 읽고 풀이하기 위해서는 한문 어휘를 훈독(訓讀)하여 뜻을 새겨 읽고 한문 문법을 우리나라 문법으로 변경하는 작업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활용된 것이 바로 이두이다. 이 시기 신라에서는 당(唐)의 국자감(國子監)을 모델로 682년(신문왕 2) 국학(國學)을 설립하여 유교적 소양을 지닌 인재의 양성을 추구하였다. 국학에서는 유교 경전을 가지고 수업을 진행하였으므로 경서를 읽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설총이 집대성한 이두가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유학자였던 설총이 국학의 관원으로 임명되어 후학 양성에 참여하였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두의 체계화를 달성한 설총의 업적은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여러 자료를 통해 후대에 전해졌다. 그런데 유의할 점은 후대의 기록에서 그가 이두의 창시자로 서술되었다는 점이다. 조선 초기에 명(明)의 법령을 이두로 번역한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를 살펴보면, ‘설총이 지은 방언문자(方言文字)를 이도(吏道, 이두)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세종실록(世宗實錄)』 권113 세종 28년 기사에서는 ‘옛날에 신라의 설총이 처음으로 이두를 만들었고 관부(官府)와 민간에서 지금까지 시행한다’고 하였다. 이 기록들은 설총이 이두를 만들었다는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두는 설총이 이두를 집대성하기 이전부터 고구려·백제·신라에서 모두 사용된 차자표기법이었다. 신라의 경우, 6세기 중반 자료에 속하는 「단양 신라 적성비(丹陽 新羅 赤城碑)」와 나무 또는 대나무에 글을 새긴 목간(木簡) 등에서 이미 이두 표기가 사용된 사실이 확인된다. 이를 바탕으로 설총을 이두의 창시자로 간주한 자료의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 하지만 그가 6~7세기에 걸쳐 성립된 이두 표기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신라의 차자표기법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4 문장가로서 남긴 주요 작품

설총의 문장가로서의 면모는 그가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주요 작품에서도 확인된다. 우선 설총이 지은 우화적 단편 산문으로 「화왕계(花王戒)」가 있다. 기록에 의하면 설총은 신문왕에게 풍자를 바탕으로 간언(諫言)을 하기 위해 이 글을 지었다고 한다. 이는 설총이 담당한 유학자의 정치적 역할을 보여주는 일화로, 인재 등용에 대한 유교의 올바른 정치 윤리를 설명하고 있다. 이 글은 조선전기 서거정(徐居正, 1420~1488) 등이 신라부터 전해지는 시문(詩文)을 모아 편집한 『동문선(東文選)』에서 「풍왕서(諷王書)」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다음으로 설총의 뛰어난 문장력은 성덕왕 때에 경주 감산사(甘山寺)에 불상을 만들면서 불상 제작에 관련된 정보를 기록한 조상기에서도 나타난다. 감산사에 만들어진 불상은 석조 미륵보살 입상(石造 彌勒菩薩 立像)과 석조 아미타여래 입상(石造 阿彌陀如來 立像)으로, 중아찬 김지성(重阿湌 金志誠)이 부모님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한 것이다. 이때 아미타여래 입상의 광배(光背) 뒤에 새겨진 기록에 의하면 나마 총(奈麻 聰)이 왕의 명을 받아 719년(성덕왕 18) 2월 15일에 해당 글을 지은 것으로 파악된다. 설총의 활동연대를 고려하여 나마 총을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설총으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다. 이 조상기는 내용적인 측면에서 불교뿐만 아니라 노장과 유학 등의 사상을 망라하고 있으며 대구(對句)를 활용한 유려한 문장으로 구성되어있다고 평가된다.

이후 설총은 학문적인 공로가 인정되어 1022년(현종 13) 홍유후(弘儒侯)로 추증(追贈)되었고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문묘(文廟)에 최치원과 함께 배향(配享)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설총의 위패가 최치원의 것과 함께 경주 서악사원(西岳書院)에 배향되었다. 현재 경북 경주시 보문동 423번지에는 전홍유후설총묘(傳弘儒侯薛聰墓)라 하여 설총의 것으로 전하는 묘가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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