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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聖王]

미완으로 끝난 백제의 르네상스

미상 ~ 554년(성왕 32)

성왕 대표 이미지

성왕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개요

성왕(聖王)은 백제의 제26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23년~554년이다.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면서 백제의 중흥을 알렸다. 천도 후에는 대대적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하였고, 양·왜와도 활발히 교류하였다. 신라 진흥왕(眞興王)과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수복했으나 진흥왕의 배신으로 다시 상실했다. 이에 대한 응징으로 신라 공격에 나섰는데, 관산성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성왕도 죽음을 맞았다.

2 사비 천도와 사비도성의 구조

성왕의 이름은 명농(明穠) 혹은 명(明)으로, 이름을 따서 명왕(明王) 또는 성명왕(聖明王)이라고도 한다. 시호는 성(聖)이다. 아버지는 25대 무령왕(武寧王, 재위 501~523)이고,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무령왕릉 출토 무령왕비묘지에 등장하는 왕대비(王大妃)로 추정된다. 523년(무령왕 23)에 무령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고, 554년까지 32년간 백제를 통치했다.

성왕의 왕위계승은 혈통적 정통성에 기반한 것이었기에, 앞선 시기의 정치적 안정을 유산으로 물려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안정을 바탕으로 538년(성왕 16)에 사비 천도를 단행하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바꾸었다.

성왕이 사비로 천도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이전 수도인 웅진이 방어상의 장점은 있으나 너무 협소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영역의 확장과 지배층의 증가로 인해 백제는 보다 넓은 도읍이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사비는 백마강과 산맥이 넓게 둘러싸고 있어 방어에 적합했고, 남쪽으로는 평야가 펼쳐져 있어 수도로서 기능하기에도 유리했다. 또한 백마강을 통한 서해로의 진출도 용이한 곳이었다.

사비 천도의 또 다른 목적은 왕 중심의 지배질서를 강화였다. 천도 자체가 정치적 중심의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지배질서의 변화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천도에 반대하는 귀족들을 누르고 천도를 실현하기 위해 성왕은 사비를 근거지로 하는 사씨(沙氏) 세력을 이용했다. 천도 후 사씨는 목씨와 함께 상좌평(上佐平)·대좌평(大佐平) 등 요직에 임명되면서 실세로 부각되었다. 반면에 왕족과 진씨(眞氏)·해씨(解氏)·백씨(苩氏) 등 웅진시기의 실세 귀족들은 정치적으로 힘을 잃었고, 대신 다양한 성씨들이 등장해 권력을 분산 점유했다. 이처럼 성왕은 사비천도를 통해 귀족세력을 재편하고 귀족들의 힘을 분산시킴으로써 왕권을 강화하였다.

사비도성은 이러한 왕권의 신장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사비도성은 왕궁과 배후의 부소산성, 그리고 이를 둘러싼 나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 핵심이 되는 왕성은 현재 부소산성의 남쪽 기슭에 위치한 관북리 유적으로 보고 있다. 관북리 유적에서는 동서 35m, 남북 18.5m의 대형 건물지가 발견되었는데, 왕성 내 핵심 건물로 추정된다. 사비도성은 왕성을 기준으로 남북을 축으로 중심도로를 만들고, 내부를 바둑판처럼 구획했다. 도로는 중요도에 따라 폭이 달랐으며, 도로 양쪽으로는 배수시설을 만들었다. 왕성의 중심도로 좌우에는 관청 등 각종 건물들이 위치하였다. 왕성 밖은 지배세력과 백성들의 거주지로, 위계에 따라 구역이 구분되었다.

한편 관북리 유적에서는 대형 목곽수조가 확인되었는데, 여기에 물을 저장했다가 상수도관을 통해 물이 흘러가는 구조이다. 수도관은 수키와 2매를 맞붙여 원통형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 외에도 많은 건물지와 저장시설, 공방시설 등이 확인되었고, 특히 연못에서는 각종 기와와 토기, 목간, 짚신 등이 출토되어 당시 생활상을 알려주고 있다.

3 국가체제의 정비

성왕은 사비 천도를 통해 지배세력을 재편하고, 사비도성을 조영함으로써 왕권의 상징성을 높였다.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성왕은 본격적으로 국가체제의 정비에 나선다.

먼저 16관등제와 22부사제(部司制) 등 중앙 관제를 정비했다. 백제의 관등제는 고이왕 때부터 점진적으로 모습을 갖춰가다가 성왕 때에 이르러 좌평 이하 16관등의 체계를 갖추었다. 그리고 여기에 문무백관을 편입시킴으로써 관료들의 위계질서를 확립했다. 더불어 성왕은 행정조직체계도 정비하였다. 내관(內官) 12부와 외관(外官) 10부로 구성된 22부사제도가 바로 그것이다. 22부사는 왕의 명령으로 담당 업무를 처리하는 행정실무 기관이었다. 이들은 국정 운영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면서 왕권을 뒷받침했고, 왕은 관리 임명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더욱 높일 수 있었다.

성왕 대에는 지방통치조직에 대한 정비도 이루어졌다. 사비 천도 후 다양한 지방세력들이 중앙으로 이주하면서 왕도에는 이들의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성왕은 왕도에 거주하는 지배세력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수도를 5개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이것을 왕도 5부제라고 한다. 왕성과 관청, 지배세력의 거주지를 엄격히 구분함으로써 정치적 위계를 공간적으로도 구현한 것이다. 또한 성왕은 이전의 22담로제를 방군성체제(方郡城體制)로 대체했다. 방군성체제란 전국을 동·서·남·북·중의 5방(方)으로 나누고, 그 아래에 군(郡), 그 아래에 다시 성(城)을 두는 체계이다. 총 5방 37군 200~250성이 있었는데, 방·군·성에는 각각 지방관이 파견되어 명령의 전달체계를 형성했다. 이렇게 지방까지 중앙의 통제력이 미침으로써 토착세력이 약화되고, 지방사회 역시 왕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4 성왕대의 문화 교류와 유불통치이념의 구현

성왕대 외국과의 문화 교류는 국가체제 정비를 위한 선진문물 도입의 성격이 컸다. 성왕은 524년(성왕 2)에 양(梁)으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 수동장군백제왕(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 綏東將軍百濟王)으로 책봉받아서 국내외 지위를 인정받았다. 그리고 당시 황제권 강화에 힘쓰던 양의 무제(武帝)를 모델로 삼아, 귀족세력들을 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541년(성왕 19) 성왕은 양 무제에게 예학에 정통한 강례박사 육후(講禮博士 陸詡)와 『열반경(涅槃經)』 등 경전과 기술자·화가 등을 백제에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무제는 이를 수락했다. 육후는 10여 년간 백제에 머무르면서 성왕의 왕권 강화를 유교적 입장에서 뒷받침했다.

526년(성왕 4)에는 겸익(謙益)이 인도에서 『율부(律部)』를 연구한 뒤 경전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성왕은 겸익을 직접 맞이해 흥륜사(興輪寺)에 주석시키고, 경전 번역과 이에 대한 소(疏)의 편찬을 맡겼다. 이로써 백제의 불교는 계율 중심의 특징을 갖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성왕이 양으로부터 들어온 『열반경』은 부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계율을 강조하는데, 겸익의 율종과 상호 보완적 관계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부처의 말씀이란 곧 왕권과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성왕은 왕권의 강화를 위해 불교를 적극 활용했던 것이다.

이처럼 성왕은 유교와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국가체제의 정비와 정치개혁을 뒷받침하는 이념으로 활용하였다.

한편 성왕대에는 왜와도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신 교류나 선진문물의 전달이 활발했다. 오경(五經)·의(醫)·역(易)박사 등 다양한 기술자들을 왜에 보내주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552년(성왕 30)에 노리사치계(怒利斯致契)를 보내 불교를 전해 준 것이다. 이것은 일본에 최초로 불교가 전래된 것으로, 그 의미가 깊다.

5 한강유역 회복과 관산성전투

고구려에게 한성을 함락당한 이후, 대외관계에서 백제왕들의 1차적 관심은 한강 유역 회복이었다. 성왕 역시 영토 회복을 위해 고구려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성왕은 남쪽으로 눈을 돌려 가야 지역을 세력권에 넣으려 했다. 그러나 가야는 이미 신라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처럼 가야 진출을 둘러싼 양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대고구려 공동전선을 위한 백제의 외교적 노력은 큰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545년 고구려 안원왕(安原王)이 정쟁으로 피살당하고 양원왕(陽原王)이 즉위하면서 고구려가 내분에 휩싸이자, 백제와 신라는 이를 기회로 삼아 나제동맹을 다시 강화하게 된다. 성왕은 신라 진흥왕과 연합하여 551년(성왕 29)에 한강 유역을 공격했다. 이 한강전투의 승리로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개 군을 차지하고, 신라는 상류의 10개 군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553년(성왕 31) 신라군이 한강 하류의 백제 지역을 급습해 이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하면서 백제는 한강 유역을 다시 상실하고 말았다.

성왕은 아들과 함께 신라의 배신에 대한 복수를 단행했다. 554년(성왕 32), 태자 여창(餘昌, 위덕왕)을 선발대로 삼아 국경지대인 관산성(충북 옥천)을 공격하고 그곳에서 전쟁을 대비하도록 한 것이다. 신라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신주의 군사까지 관산성으로 집결시켰다. 성왕은 가야의 군대를 포함한 대군을 이끌고 직접 원정에 나섰다. 그는 태자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야간에 보기(步騎) 50명만 거느리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도중에 구천(狗川)에 이르러 신라의 복병을 만나 난투 끝에 죽음을 맞고 말았다. 결국 관산성 전투는 백제의 대패로 끝나고 말았는데, 좌평 4명과 군사 2만 9600명이 목숨을 잃을 정도였다. 신라는 성왕의 시신 중 몸만 백제 측에 돌려주고, 머리는 도당(都堂)이라고 부르는 북청(北廳) 계단 아래에 묻어두었다고 한다. 관산성 전투의 참패로 백제의 르네상스를 꿈꾸던 성왕의 노력은 끝내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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