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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지마립간[炤智麻立干]

국가체제를 정비해 왕권과 민생의 안정을 이룩하다

미상 ~ 500년(지증왕 1)

소지마립간 대표 이미지

경주 서출지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소지마립간은 신라 제21대 왕이다. 국내적으로는 국가의 각종 제도를 정비해, 김씨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왕권의 강화를 이루었다. 자연재해가 빈번해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었지만, 직접 민생을 살피고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성인(聖人)이라 칭송받기도 했다.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의 잦은 공격을 받았으나, 나제동맹을 기반으로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였다.

2 소지마립간의 가계와 왕위계승

소지마립간은 비처마립간(毗處麻立干)이라고도 한다.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소지(炤知, 照知) 혹은 비처(毗處)이다. 아버지는 제20대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셋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따라 첫째 아들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머니는 서불한(舒弗邯) 미사흔(未斯欣)의 딸 김씨이다. 왕비는 선혜부인(善兮夫人)으로, 이벌찬(伊伐湌) 내숙(乃宿)의 딸이다. 『삼국유사』에는 기보갈문왕(期寶葛文王)의 딸이라 기록되어 있다.

소지마립간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6촌 동생인 지증왕(智證王)이 왕위를 이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에게 아들이 있었음을 『삼국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500년(소지마립간 22) 9월, 왕이 날이군(捺已郡)에 행차했을 때, 파로(波路)라는 사람이 왕에게 딸 벽화(碧花)를 바쳤다. 왕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환궁한 뒤 벽화가 보고 싶어 몇 차례 찾아가 관계를 하였다. 날이군으로 가던 중 한 노파의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노파가 왕의 신중하지 못한 행동을 비판하였다. 왕은 이를 부끄럽게 여겨 벽화를 궁의 별실로 데려왔고, 아들을 하나 낳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해 11월 소지마립간이 사망하면서, 이 아들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부자연스러움 때문에 소지마립간의 죽음을 비정상적이라고 보기도 한다.

479년 자비마립간이 즉위 22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소지마립간은 전 왕의 장자로서 왕위에 올랐다. 이렇게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자비마립간-소지마립간에 걸쳐 장자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이들은 모두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의 직계 혈통을 강조하며 왕권의 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내물마립간의 방계 자손인 지증왕이 왕위를 이으면서 내물마립간의 직계 혈통은 단절되고 말았다. 소지마립간은 479년 왕위에 오른 후 500년까지 22년간 신라를 다스렸다.

3 국가 체제의 정비

소지마립간 때 국가 체제 정비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주목되는 점은 신궁(神宮)의 설치이다. 원래 신라에는 시조묘(始祖廟)가 있어서, 새로 왕이 즉위하면 시조묘에 배알하는 것이 일종의 즉위의례였다. 시조묘에는 물론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가 모셔져 있었다. 그런데 487년(소지마립간 9)에 시조의 탄강지인 나을(奈乙)에 신궁을 설치했다. 신궁에 모신 ‘시조’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지만, 김씨의 시조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다수이다. 이것은 신라가 마립간 시기에 김씨에 의한 왕위의 독점적 세습을 이룬 것과 관련이 있다. 즉, 김씨 왕족을 신격화함으로써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높이고자 한 것이다. 이로써 신라에서는 시조묘제사와 신궁제사라는 이원적인 제사체계가 성립하게 된다.

소지마립간은 신궁 설치에 이어 같은 해 3월,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담당 관청에 명하여 관도(官道)를 수리하였다. 우역이란 공문서 전달이나 관물의 운송, 관리에게 숙박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설치한 일종의 교통·통신시설이다. 이러한 우역을 설치하고, 더불어 관도를 수리했다는 것은 중앙과 지방의 원활한 연결이 가능해졌다는 의미이다. 즉, 중앙의 명령이 지방까지 신속하게 전달되고, 역으로 지방의 일은 중앙으로 신속히 보고될 수 있도록 전달체계를 정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조치들은 신라의 지방통치와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관도의 정비는 신라가 지방관을 파견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문헌상 도사(道使)가 파견된 첫 시점으로 보기도 한다. 이후 활발히 이루어지는 축성사업에 지방민이 동원되는 것을 보면, 중앙의 지배력이 지방까지 직접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지마립간은 지방에 대한 통치 방식을 직접지배로 전환해 감으로써, 왕권의 강화와 함께 중앙집권화를 추진한 것이다.

우역과 관도의 정비는 지방통치 뿐만 아니라 물자의 유통과도 관련이 있다. 앞서 눌지마립간은 사람들에게 우차(牛車)의 사용법을 알려주어 물자 수송을 편리하게 하였다. 운송 수단으로 소를 사용할 정도로 물자의 유통량이 증가한 것이다. 그리고 469년(자비마립간 12)에는 수도의 행정구역인 방리(坊里)의 이름을 새로 정하였다. 그만큼 수도의 인구가 증가하고, 규모가 확장되었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소비시장이 확대되고 물자의 유통량이 증가하자, 490년(소지마립간 12) 3월, 처음으로 수도에 시장을 개설해 사방의 재화를 유통시키기에 이른다. 때마침 정비된 우역과 관도의 정비는 중앙과 지방의 물자 유통 증가에도 기여했을 것이다. 이처럼 소지마립간 시기에는 상업과 운송의 발전도 두드러졌다.

경제적 발전과 더불어, 소지마립간은 민생의 안정에도 힘을 썼다. 수도에 가뭄이 들자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눠주고, 홍수가 나자 지방을 돌며 백성들을 위문했다. 소지마립간 대에는 가뭄과 홍수, 우박과 전염병 등 각종 재해가 빈번했다. 그러자 자신이 먹는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고, 죄수의 정상을 살펴 잘못된 정치가 없는지 스스로 돌아보았다. 또한 놀고먹는 백성들이 농사일로 돌아가도록 하여 유랑민으로 인한 사회의 혼란을 예방하고, 직접 교외로 나가 농사를 시찰하기도 했다. 특히 왕이 직접 농사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농업생산력의 증대에도 기여했다. 이처럼 소지마립간은 직접 현장을 돌며 민생을 돌보았고, 백성들에게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당시 사람들은 소지마립간을 성인(聖人)이라 칭송하였다.

4 소지마립간대의 대외관계

신라는 내물마립간-실성마립간(實聖麻立干)-눌지마립간 대에 걸쳐, 고구려의 많은 간섭을 받았다. 그러나 눌지마립간이 백제와 나제동맹을 체결하는 등 반(反) 고구려 입장으로 전환하자, 이제는 고구려의 침입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에 자비마립간은 대대적으로 성을 쌓아 고구려에 대한 방어망을 구축했다. 그러나 이 시기는 고구려가 백제 공격에 집중하던 시기여서, 오히려 신라에 대한 공격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475년(자비마립간 18) 고구려가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蓋鹵王)을 죽임으로써 정세가 급변하였다. 수도를 함락당한 백제는 웅진(熊津)으로 급히 천도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백제에 대한 공격을 일단락지은 고구려는 이제 공격의 방향을 신라로 돌렸고, 이런 상황에서 소지마립간이 즉위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구려의 공격은 소지마립간이 즉위한 다음해인 480년(소지마립간 2)부터 곧바로 시작되었다. 말갈을 동원하여 북쪽 변경을 침입한 것이다. 다음해에는 고구려가 말갈과 연합하여 북쪽 변경의 7성을 빼앗고, 미질부(彌秩夫, 현재의 경북 포항시 흥해읍)까지 쳐들어왔다. 고구려의 군사가 턱 밑까지 이르자, 백제와 가야가 구원군을 보냈다. 이로써 신라는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고구려의 신라 공격은 계속 이어졌는데, 신라는 백제의 도움으로 고구려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493년(소지마립간 15) 백제 동성왕(東城王)은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했다. 그러자 소지마립간은 이벌찬 비지(伊伐飡 比智)의 딸을 보내 동성왕과 혼인시켰다. 혼인동맹은 나제동맹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바로 다음해인 494년(소지마립간 16), 신라의 장군 실죽(實竹)이 고구려와 살수(薩水) 부근에서 싸우다가 후퇴하여 견아성(犬牙城)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 군사가 성을 포위하여 위기에 처했다. 이때 백제 동성왕(東城王)이 군사 3천을 보내자 고구려가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이듬해인 495년(소지마립간 17)에는 고구려가 백제 치양성(雉壤城)을 공격해 포위했다. 동성왕의 요청으로 이번에는 신라가 군사를 보내니, 고구려군이 도망을 갔다. 이처럼 신라와 백제는 서로 구원군을 보내며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할 수 있었다.

자비마립간에 이어 소지마립간도 대규모로 성을 쌓거나 보수했는데, 대부분이 고구려와의 접경지대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당시는 고구려가 신라 방면으로의 남진을 추진하던 때여서, 고구려의 공격을 대비하는 목적이 컸을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 외에 왜(倭)의 침략도 빈번했는데, 493년(소지마립간 15)에는 임해진(臨海鎭)과 장령진(長嶺鎭)을 설치해 왜적을 대비하기도 했다.

5 사금갑(射琴匣) 설화

『삼국유사』에는 소위 ‘사금갑 설화’라고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소지마립간이 488년(소지마립간 10)에 천천정(天泉亭)에 갔을 때, 쥐가 나타나 까마귀의 뒤를 따라가라고 했다. 왕이 까마귀를 따라가던 중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보다가 행방을 놓쳤는데, 그때 연못에서 한 노옹(老翁)이 나타나 글을 올렸다. 봉투의 겉에 ‘떼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떼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쓰인 것을 보고, 일관(日官)은 ‘두 사람은 서민이고, 한 사람은 왕입니다’라고 해석하였다. 이에 왕이 봉투를 열어보니. 그 안에 ‘사금갑(射琴匣, 거문고갑을 활로 쏘아라)’이라고 쓰여 있었다. 왕이 궁에 들어가 거문고갑을 쏘았더니, 내전의 분수승(焚修僧)과 궁주(宮主)가 간통을 하고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은 처형되었다.

신라의 불교는 눌지마립간 때 묵호자(墨胡子)가 들어와 활동하면서 민간은 물론 왕실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만 하더라도 토착신앙과 귀족세력들의 반발로 왕실에 정착하지 못했다. 그런데 사금갑 설화를 보면 소지마립간 때 왕실에 분수승(향을 피우며 불교의식을 주관하는 승려)이 상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또 다른 기록에서는 소지마립간 때 아도화상(我道和尙)이 과거 묵호자가 머물던 일선군 모례(毛禮)의 집에서 여러 해를 머물렀고, 시자(侍子) 3명이 그곳에서 불경을 강독하며 불교신자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상의 기록들을 볼 때, 법흥왕(法興王)의 불교 공인 이전인 소지마립간 대에도 왕실과 민간에 불교가 널리 퍼져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신라의 불교는 기존 토착신앙의 강한 견제를 받는다. 사금갑 설화에서 토착신앙은 노옹과 일관으로 상징되는 세력으로, 기득권층인 귀족세력을 의미한다. 반면 불교는 왕궁에 상주하던 분수승과 궁주로 상징되며, 왕실세력이 불교의 수용을 주도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노옹이 준 글과 일관의 해석으로 인해 분수승과 궁주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금갑 사건은 왕실에서 불교세력이 커지자, 토착신앙을 신봉하던 귀족세력이 이를 견제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내전의 분수승을 단순한 승려가 아니라, 고구려에서 보낸 첩자 내지 자객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앞서 고구려는 한성을 공격하기 위해 승려 도림(道琳)을 먼저 백제 왕실에 잠입시킨 바 있는데, 분수승을 도림과 마찬가지의 예로 보는 의견이다. 즉, 분수승이 실제로 궁주와 소지마립간 암살을 모의하고 있었고, 이것이 사전에 발각되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사금갑 사건은 소지왕 암살미수 사건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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