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신문왕

신문왕[神文王]

통일신라를 완성하다

미상 ~ 692년(신문왕 12)

신문왕 대표 이미지

경주 신문왕릉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신문왕(神文王, ?~692)은 신라 제31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681년~692년이다. 그는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의 뒤를 이어 즉위해, 진골귀족 세력을 제압하여 왕권 강화를 이룩하는 한편, 여러 제도를 완비하여 신라 중대(中代) 강력한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한 왕으로 평가받는다.

2 가계와 생애

신문왕은 문무왕의 장남으로 이름은 김정명(金政明 혹은 金明之)이고 자(字)는 일초(日怊)이며, 어머니는 자의왕후(慈儀王后 혹은 慈義王后)이다. 그는 665년(문무왕 5)에 태자로 책봉되어, 일찍부터 왕위계승권자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했으며, 681년 부왕이 사망하자 뒤를 이어 즉위했다.

원래 태자로 있을 때 소판(蘇判) 김흠돌(金欽突)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신문왕이 즉위한 직후 일어난 김흠돌의 반란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그녀를 쫓아내고, 683년(신문왕 3) 일길찬(一吉湌) 김흠운(金欽運)의 딸 신목왕후(神穆王后)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687년(신문왕 7) 2월 장남이 태어났는데, 신문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효소왕(孝昭王, 재위 692~712)이다. 그 외에 성덕왕(聖德王, 재위 712~737), 김근질(金釿質), 김사종(金嗣宗) 등의 아들이 있었다. 또 『삼국유사(三國遺事)』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 등에 보이는 보천(寶川) 일명 보질도(寶叱徒)도 신문왕의 아들로 보기도 한다. 보통 이 아들들은 모두 신목왕후에게서 태어난 것으로 보지만, 그들 중 일부는 쫓겨난 김흠돌의 딸이 어머니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는 재위 12년간 신라를 잘 다스리다가 692년 7월에 사망하였다. 시호(諡號)를 신문으로 하고, 낭산(狼山) 동쪽에 왕릉을 만들어 모셨다고 하는데, 현재 사적 제181호인 경주 신문왕릉(慶州 神文王陵)으로 지정하고 있다.

3 김흠돌의 반란을 진압하고 통일신라 중대 왕권을 완성하다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654~661)부터 혜공왕(惠恭王, 재위 765~780)까지 태종무열왕 직계가 왕위를 계승한 시기를 중대(中代)라 불렀는데, 이 시기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추진, 달성하면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를 완성한 최전성기로 평가받고 있다. 신라가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중고기(中古期, 법흥왕~진덕여왕)였다. 특히 법흥왕대 율령 반포와 불교 공인이 중요한 계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중고기에는 여전히 진골귀족들의 세력이 강하여 왕권이 그들을 완전히 제어하기 힘든 점이 있었다.

하지만 중대에 들어서 삼국통일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왕이 군사권을 장악하며 실권을 잡았고, 전쟁이라는 비상시국을 이용해 왕권에 저항적인 진골귀족들을 다수 숙청하면서 강력한 왕권을 구축해 나갔다. 또 문무왕은 665년에 이미 신문왕을 태자로 책봉하면서 그에게 권위를 부여했으며, 679년(문무왕 19)에는 태자의 거처이자 공적 활동 공간인 동궁(東宮)을 새로이 지어 그의 위상을 공고히 했다.

신문왕은 문무왕이 잘 마련해 놓은 높은 왕권을 그대로 계승하여 즉위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중대 왕실의 왕권 강화는 진골귀족들의 반발과 결집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이 신문왕 즉위 직후 일어난 김흠돌의 반란으로 표출되었다. 신문왕의 장인으로 왕과 매우 가까운 관계라 할 수 있는 김흠돌은 대당장군(大幢將軍), 대당총관(大幢總管) 등을 역임하면서 삼국통일전쟁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그와 함께 당시 유력한 진골귀족이었던 파진찬(波珍湌) 흥원(興元), 대아찬(大阿湌) 진공(眞功) 등이 반란에 동참하였다.

신문왕은 반란을 진압한 이후 시위군(侍衛軍) 제도를 개편하였는데, 반란을 겪으면서 왕의 측근 군사력을 늘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신문왕이 반란 진압 이후 취한 조치는 일견 가혹할 정도였다. 반란에 가담한 자들을 모두 처형하고, 자신의 왕비마저도 책임을 물어 쫓아내버린 것은 물론, 반란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지만 그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들의 반란을 고발하지 않았다하여, 병부령(兵部令)으로 군사 업무를 총괄하고 있던 이찬(伊湌) 김군관(金軍官)도 처형하였다. 더하여 김군관의 아들도 자진시키는 등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진골귀족 세력을 철저하게 숙청하였다.

김흠돌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왕은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그 위상을 확고히 하였으며, 진골귀족 세력들을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진골귀족 세력을 통제하고 제어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고자 했던 것 같다. 689년(신문왕 9) 1월 녹읍(祿邑)을 폐지하고 대신 1년 마다 일정한 조(租, 세금으로 거둔 곡물)를 지급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녹읍은 관리들에게 급여로 한 고을을 지급한 것으로, 그곳에서 경제적 이익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을 노역에 동원시킬 수 있는 권리도 아울러 부여하였다. 따라서 녹읍을 가진 사람은 많은 경제력을 확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사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세력도 가질 수 있었다. 당시 신라는 진골귀족이 주요 관직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녹읍은 곧 진골귀족이 강한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기반이었다. 이제 녹읍이 폐지되면서 진골귀족 세력의 힘이 어느 정도 약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진골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통제를 강화하는 것과 함께 신문왕은 중대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작업도 아울러 병행하였다. 687년(신문왕 7)에 왕실의 사당에 시조 태조대왕(太祖大王), 고조 진지대왕(眞智大王), 증조 문흥대왕(文興大王), 조부 태종대왕(太宗大王), 부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유교 이념을 통해 중대 왕실이 다른 진골귀족들과 구분되는 존재임을 강조하는 효과가 있었다.

또 682년에(신문왕 2) 부왕인 문무왕을 기리는 감은사(感恩寺)를, 685년에는 봉성사(奉聖寺)와 망덕사(望德寺) 등 사찰을 지어 왕의 덕을 널리 보여주려 하였다. 이러한 왕실 주도의 사찰 건립은 왕의 위상을 높이고 그 권위를 보여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신문왕은 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진골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제어할 수 있게 되면서 강력한 왕권 구축을 완성하였다.

4 통일신라의 제도를 완성하다

신문왕은 강력한 왕권을 확보하는 것과 동시에 신라의 각종 제도를 정비하였다. 이 제도 정비 역시 태종무열왕과 문무왕대에서 이어지는 것으로, 삼국통일의 완성과 왕권 강화와도 연관되어 있었다. 즉 제도 정비는 크게 두 가지 경향을 보여준다. 하나는 고구려, 백제를 성공적으로 통합할 수 있는 제도의 마련이고, 다른 하나는 강력한 왕권 중심의 권력 구조에 맞는 통치 제도의 개편, 곧 왕이 임명하는 관리가 진골귀족을 대신하여 국정 운영을 주도하는 관료제의 확충이었다.

우선 삼국통일 이후 커진 나라로 인해 늘어난 업무를 잘 처리할 수 있도록 중앙 관제를 정비하였다. 682년(신문왕 2) 4월 위화부령(位和府令) 2인을 두어 관리들의 인사에 관한 업무를 총괄하게 하는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 공장부감(工匠府監)과 채전감(彩典監) 각각 1인을 두었고, 686년에는 예작부경(例作府卿) 2인을 두었으며, 687년 음성서(音聲署) 장관인 장(長)을 경(卿)으로 올리는 한편 688년 선부경(船府卿) 1인을 증치하는 개편을 시행하였다.

이러한 관부와 관직에 대한 조정 및 개편과 함께, 682년 6월에는 유교교육기관 국학(國學)을 설치하여 체계적으로 관인을 양성할 수 있도록 했다. 국학은 유교 경전에 대한 교육을 통해 왕권 강화의 이념적 토대를 제공하기도 하였지만, 늘어난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중하급 실무직 관인 양성 또한 주요한 설치 목적이었다. 그 결과 685년에 각 관부에서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사지(舍知)직이 새로 설치되기도 하였다. 이로써 신라 중앙 관부들의 관직은 장관 영(令), 차관 경(卿), 대사(大舍), 사지(舍知), 사(史)의 5등 관제로 완성되었다.

또한 687년 관리들에게 급여로 전지(田地, 농지를 지급한 것인데 보통 그 농지에 부과된 세금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지급한 것으로 본다)를 지급하는 제도를 새로이 만들어 시행하였다. 이로써 관리들이 중심이 되어 국정을 운영하는 관료제가 갖추어졌다고 할 수 있다.지방제도 역시 대대적으로 정비되었다. 삼국통일을 통해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옛 고구려와 백제 지역을 포함한 신라 전역의 행정 단위를 조정하고 정리하였다. 685년(신문왕 5)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북 전주시)와 청주(菁州, 지금의 경남 진주시)를 설치하면서, 통일된 영토에 삼국별로 3개씩 주를 두는 9주 체제를 완성하였다. 이후 지방행정 단위 중 최하위인 현(縣)이나 중간 단위인 군(郡)을 새로 설치하거나, 일부 군(郡)을 주(州)로 승격하거나 반대로 일부 주(州)를 군(郡)으로 강등시키는 등의 조정을 하였다. 이로써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주 아래 군과 현을 두는 3단계 지방행정단위를 완성하였다.

또 685년 3월 서원소경(西原小京, 지금의 충북 청주시)과 남원소경(南原小京, 지금의 전북 남원시)을 새로 설치하여, 진흥왕대 설치되었던 국원소경(國原小京, 지금의 충북 충주시로 경덕왕대 중원경으로 개칭)과 문무왕대 설치된 북원소경(北原小京, 지금의 강원도 원주시), 금관소경(金官小京, 지금의 경남 김해시)을 포함한 5소경을 완성하였다. 5소경 역시 고구려와 백제 지역에 각각 2개씩 설치되어 삼국통일로 늘어난 영토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써 신라 지방 통치제도이자 행정단위인 9주 5소경이 완성되었다.

군사제도 역시 신문왕대에 거의 완성되었다. 통일신라의 중앙군사조직은 9서당(誓幢)과 10정(停)이 중심이었다. 10정은 지방에 주둔한 10개의 군단으로, 9주에 하나씩 한주에 2개가 두어졌다. 따라서 이 부대는 9주가 완비된 신문왕대에 완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9서당은 효소왕대에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지만 신문왕대에 거의 갖추어졌다. 9서당은 신라 및 가야인으로 구성된 것이 3개, 고구려 유민으로 구성된 것이 3개, 백제 유민으로 조직한 것이 2개, 말갈 및 기타로 하나를 만들었다. 즉 9서당은 고구려와 백제 사람까지 포괄한 군부대여서 삼국을 통합한 것임을 알려주며, 신라왕이 삼국 전체의 왕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5 달구벌 천도 계획의 무산과 통일신라의 한계

이상과 같이 신문왕은 태종무열왕, 문무왕이 완수한 삼국통일의 성과를 성공적으로 이어 받고, 그에 더하여 왕권 강화와 함께 각종 제도를 정비해 나가면서 삼국통일을 달성한 신라, 곧 통일신라를 완성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신문왕이 신라를 완전히 바꾸지는 못한 것 같다. 689년(신문왕 9) 신문왕은 수도를 달구벌(達句伐, 지금의 대구광역시)로 옮기려고 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현재로서 달구벌 천도의 목적이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신문왕대의 제도 정비가 왕권을 강화하고 진골귀족 세력을 약화시키며, 관료제를 확충하려 한 것임을 고려한다면, 신라 왕경 즉 지금의 경주를 근거지로 하는 진골귀족 세력의 약화가 그 목적 중 하나일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천도 계획 무산 이유는 진골귀족 세력의 반대였을 것이다. 여전히 진골귀족 세력이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는 신문왕의 통일신라 완성에 한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문왕이 추구한 통일신라 중대 체제는 왕권 강화가 중심이며, 그 이면에는 진골귀족 세력의 약화가 있었다. 그런데 신라는 철저하게 혈연에 의해 그 사람의 신분이 결정되는 골품제(骨品制)라는 신분제가 존재했고, 신라 사회가 이 골품제의 원리를 바탕으로 돌아갔다.

신라에서는 진골귀족만이 각 관부의 장관과 같은 주요 관직을 맡을 수 있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진골귀족 세력은 근본적으로 정치권력에서 배제될 수가 없었고, 오히려 정치권력을 독점하는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신문왕이 완성한 통일신라 중대 체제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한계는 후대 중대 체제가 붕괴하고 하대, 곧 귀족들의 세력이 강성한 시대로 바뀌는 원인이 된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