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아신왕

아신왕[阿莘王]

끝없는 패전, 광개토왕 정복전쟁의 최대 피해자

미상 ~ 405년(아신왕 14)

아신왕 대표 이미지

삼국사기 아신왕 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아신왕(阿莘王)은 백제의 제17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392년~405년이다. 광개토왕의 남정(南征)에 맞서 싸웠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많은 영역을 상실했다. 한성이 포위되고 광개토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는 맹세를 하는 등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태자를 왜에 보내 화친하고 함께 고구려에 대한 설욕을 시도했으나, 이 역시도 실패하고 말았다.

2 가계와 즉위 과정

아신왕은 아방왕(阿芳王) 또는 아화왕(阿花王)이라고도 한다. 성은 부여(扶餘)이다. 제15대 침류왕(枕流王, 재위 384~385)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진씨(眞氏)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제16대 진사왕(辰斯王, 재위 385~392)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침류왕의 아들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왕비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자식으로는 왕위를 계승하는 맏아들 전지왕(腆支王, 재위 405~420)이 있다. 그밖에 아신왕의 둘째 동생 훈해(訓解)와 막내 동생 설례(碟禮)가 있는데, 이들은 아신왕 사후 태자인 전지와 왕위계승전을 벌인 인물들이다. 392년부터 405년까지 13년간 백제를 통치했다.

아신왕은 백제의 수도인 한성(漢城)의 별궁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근구수왕(近仇首王, 재위 375~384) 말년으로 추정된다. 아버지 침류왕의 재위 시절에 일찌감치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침류왕이 즉위 2년 만에 사망하자 나이가 너무 어려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대신 침류왕의 동생인 진사왕이 먼저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진사왕이 8년 만에 죽자 아신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그런데 침류왕-진사왕-아신왕으로 이어지는 왕위계승에 대해 『일본서기』에서는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침류왕이 죽자 아신왕이 나이가 어려 숙부인 진사가 왕위를 찬탈했다는 것이다. 진사왕의 즉위는 근초고왕-근구수왕-침류왕으로 이어지던 왕위의 부자상속이 갑자기 형제상속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그리고 진사왕이 죽을 때의 기사를 보면 구원(狗原)으로 사냥을 갔다가 열흘 이상을 머물렀는데, 그곳의 행궁(行宮)에서 죽음을 맞았다고 되어 있다. 『일본서기』도 백제가 왜국에 예를 잃어버려 기각숙녜(紀角宿禰) 등을 보내 꾸짖자 백제국이 진사왕을 죽여 사죄했고, 이에 아신을 왕으로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이렇게 전후 사정과 관련 기록을 볼 때, 진사왕의 죽음과 아신왕의 즉위 과정에는 모종의 정변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정변을 주도한 세력은 진사왕의 즉위에 불만을 품었던 세력들일 것이다. 즉, 침류왕 사후 아신을 지지하던 세력들이 진사왕을 살해하고, 이어 아신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3 고구려와의 관계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375)의 평양성 공격과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 재위 331~371) 전사로 백제는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371~3384)이 체제를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해 백제에 공세적으로 나서기 시작하면서 양국은 아슬아슬한 세력 균형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광개토왕(廣開土王, 재위 391~412)의 등장으로 이 균형은 깨지고 말았다.

진사왕 말기, 백제는 광개토왕에게 북쪽의 석현성(石峴城)과 주변의 10성, 그리고 관미성(關彌城)을 빼앗겼다. 이로써 북쪽으로는 한강 이북까지 고구려 세력이 미치게 되었고, 서쪽으로는 서해에서 한강을 통해 한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빼앗겼다. 고구려가 북쪽과 서쪽에서 왕도 한성(漢城)을 위협하는 형국이 된 것이다.

뒤이어 즉위한 아신왕은 고구려의 위협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외삼촌 진무(眞武)를 병사를 관장하는 좌장(左將)으로 삼고 석현성과 관미성을 공격하도록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에도 군사를 보내 수곡성(水谷城)과 패수(浿水)에서 싸웠으나 패했다. 패수전투의 패배를 갚기 위해 아신왕이 직접 나섰지만, 폭설과 유성이라는 변수가 생겨 청목령(靑木嶺, 현재의 개성 인근)에서 회군하였다. 계속되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공격을 위해 계속해서 군사와 말을 징발하니 백성들이 신라로 도망갈 정도였다.

그런데 광개토왕릉비문에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되지 않은 당시의 상황이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396년(아신왕 5, 고구려 영락 6)에 광개토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백잔(百殘, 백제) 토벌에 나선 것이다. 광개토왕은 직접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했고, 덕분에 한강을 바로 건너 한성을 포위할 수 있었다. 그러자 아신왕은 고구려에 항복하며, 앞으로 영원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광개토왕은 아신왕의 잘못을 용서하고 항복을 받아들였다. 광개토왕은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왕의 동생과 대신 10여 명을 데리고 돌아갔다.

여기서 58성 700촌은 396년의 한 번의 전투에서 얻은 성과가 아니라, 광개토왕 재위 기간 동안 백제로부터 공취한 성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구려가 백제 공격에 얼마나 집중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광개토왕이 한성을 포위하고 아신왕의 항복을 받는 모습은 근초고왕이 평양성까지 쳐들어가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던 상황을 연상시킨다. 광개토왕이 백제 공격에 집중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의 죽음에 대한 복수였던 것이다. 백제를 ‘백잔’이라 표현한 것만 보더라도 백제에 대한 깊은 적대감을 엿볼 수 있다. 반면 아신왕의 입장에서는 고구려의 위협을 막고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단 한 차례의 승리도 거두지 못했다.

4 왜와의 관계

396년 광개토왕의 한성 공격은 백제에게 큰 충격이었다. 왕도가 포위되고, 왕이 항복하는 굴욕을 당한 것이다. 계속되는 고구려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와의 군사적 협조가 절실했다. 그러나 신라는 373년(근초고왕 28, 내물마립간 18) 백제의 독산성주(禿山城主)가 신라 투항을 계기로 백제와의 관계를 단절했고, 오히려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신왕이 주목한 것은 왜였다.

한성 공격 이듬해인 397년(아신왕 6) 5월, 아신왕은 태자 전지를 왜에 질자(質子)로 보내 우호를 닦았다. 전지는 405년 아신왕이 죽을 때까지 왜에 머무르는데, 가장 큰 목적은 군사적 지원 요청이었다. 차기 왕위계승자인 전지를 왜에 보냈다는 사실에서 아신왕과 백제의 절박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아신왕과 전지의 외교적 노력은 효과를 거두었다. 왜가 한반도에 군사를 파견한 것이다. 399년(아신왕 8)에 백제와 연결된 왜가 신라를 공격해 국경에서 노략질을 하자 내물마립간은 광개토왕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자 광개토왕은 이듬해 군사 5만을 보내서 신라를 구원하게 하는데, 가야 지역까지 왜인들을 추격해 들어갔다. 그리고 404년(아신왕 13)에는 왜가 고구려의 대방 지역까지 침입하니, 고구려군이 길을 끊고 막아 궤멸시켰다. 이 전투 역시 백제가 왜를 동원해서 고구려를 공격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우호관계는 아신왕이 죽고 전지가 백제로 돌아갈 때까지도 계속된다.

5 아신왕의 죽음과 전지왕의 즉위

아신왕은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선제공격하기도 하고, 왜를 동원해 신라와 고구려의 후방을 공격하기도 했다. 일련의 군사 행동을 주도한 것은 아신왕의 외삼촌인 진무로 대표되는 진씨 세력이었다. 진무는 좌장과 병관좌평을 역임하면서 군사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이은 패배로 아신왕과 진씨 세력은 큰 부담을 안을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잦은 전쟁 동원으로 백성들이 신라로 도망가는 등 민심의 이반도 나타났다. 국내외 정치의 불안으로 왕권이 약화되는 가운데, 앞서 진사왕과 아신왕의 즉위 과정에서 벌어졌던 정변의 가능성이 점차 고조되고 있었다.

405년(아신왕 14) 2월에 왕궁의 서쪽에서 한 필의 비단과 같은 흰 기운(白氣)이 일어났다. 여기서 흰 기운은 왕의 죽음을 암시하는 전조로 이해된다. 침류왕이 죽었을 때 나이가 어렸다던 아신의 당시 나이를 10~15세 정도로 추정하면, 사망할 때는 31~36세 정도의 비교적 젊은 나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아신왕의 죽음이 전조와 함께 기록되어 있어 비정상적인 죽음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낳고 있다.

이러한 의문은 왜국에 머무르던 전지가 백제로 돌아와 즉위하는 과정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아신왕이 죽자 둘째 동생인 훈해가 정사를 대리하면서 태자 전지의 귀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막내 동생 설례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것이다. 왜군 호위병 100명과 함께 돌아오던 전지는 국경에서 한성인 해충(漢城人 解忠)의 조언을 듣고 섬에서 상황을 관망했다. 그러자 국인(國人)들이 설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아 마침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아신왕 사후 전지를 지지하는 훈해와 해충, 국인세력과 설례를 지지하던 진씨 세력과의 왕위계승전이 벌어진다. 진씨는 아신왕을 지지하던 세력이었지만 고구려전 실패의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설례와 힘을 합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지왕이 즉위함으로써 진씨는 세력을 잃고 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전지왕을 중심으로 한 왕족과 해씨 세력으로의 세력 교체가 이루어지게 된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