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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安勝]

고구려 부흥운동의 구심점

미상

안승 대표 이미지

익산토성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안승은 고구려의 왕족이자 고구려 유민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부흥운동을 하던 검모잠(劍牟岑)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에 망명해 고구려왕(高句麗王)에 이어 보덕왕(報德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신문왕(神文王)은 안승을 경주로 이주시키고, 신라의 귀족으로 만듦으로써 보덕국(報德國)을 해체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2 안승의 가계

안승은 『신당서(新唐書)』에 안순(安舜)이라고도 나온다. 후에 세운 보덕국의 이름을 따서 보덕왕 혹은 보덕국왕(報德國王)이라고도 한다. 안승의 부계에 대한 기록은 사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서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동생인 연정토(淵淨土)의 아들이라고 하였고, 같은 책의 고구려본기에서는 보장왕(寶藏王)의 서자라고 하였다. 중국 측의 『신당서』에는 보장왕의 외손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정확한 사실관계는 알 수 없으나, 보장왕의 서자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연정토의 아들로서 보장왕의 외손자라는 해석이 합리적이라는 주장도 맞서고 있다. 그렇다면 안승의 성은 고(高) 혹은 연(淵)일 것이며, 후에 신문왕에게 김(金)씨 성을 하사받기도 했다.

안승은 보덕왕에 봉해진 이후, 문무왕(文武王)의 조카를 왕비로 맞았다. 그리고 신문왕(神文王) 때 반란을 일으킨 보덕국 장군 대문(大文)은 안승의 조카로 알려져 있다. 그 외에 모계나 자식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출생과 사망 연대 역시 알 수 없다.

3 고구려 부흥운동과 한성(漢城) 고구려국의 성립

668년(보장왕 27, 문무왕 8) 9월, 평양성(平壤城)이 함락됨으로써 고구려는 멸망했다. 당은 고구려 고지 지배를 위해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고, 설인귀(薛仁貴)를 검교안동도호(檢校安東都護)로 삼아 유인궤(劉仁軌)와 함께 2만의 군사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고구려 전역을 9도독부(都督府) 46주(州) 1백 현(縣)으로 나누고, 당에 협조적인 고구려인들을 뽑아 고구려 고지를 관리하도록 했다. 그러나 고구려인의 수는 일부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당의 관리가 고구려 옛 땅을 다스리는 기미부주체제(羈縻府州體制)를 구축하려 한 것이었다. 이러한 당의 기미지배 시도는 고구려인의 반발을 초래했다. 669년(문무왕 9) 2월, 안승이 4천여 호를 이끌고 신라로 투항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에 당 고종(高宗)은 고구려인의 반발을 차단하기 위해 고구려인 3만8천3백 호를 강회(江淮)의 남쪽과 산남(山南) 여러 주의 황무지로 강제 이주시켰다. 하지만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질 뿐이었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 고지 지배를 놓고 당과 충돌하고 있었다. 이에 고구려 부흥운동을 지원함으로써 오히려 당을 몰아내고자 했다. 670년(문무왕 10) 3월에는 고구려 태대형(太大兄) 고연무(高延武)와 신라의 사찬(沙飡) 설오유(薛烏儒)가 각각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가 옥골(屋骨, 오골성)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먼저 도착해 있던 이근행(李謹行)이 이끄는 말갈군을 크게 깨뜨렸다. 그러나 이근행을 돕기 위해 출병한 당나라 군대에게 패하여 후퇴하고 말았다. 하지만 말갈과 당군에 대한 저항을 이어나감으로써 이후 고구려 부흥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검모잠의 거병은 바로 이 일에 힘입은 것이었다. 670년 4월경, 검모잠은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해 궁모성(窮牟城)을 근거로 군사를 일으켰고, 6월에는 패강(浿江, 대동강) 남쪽에서 당의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을 죽였다. 이후 사야도(史冶島, 인천 덕적도 부근의 소야도)에 피신해 있던 안승을 왕으로 추대하여, 한성(황해도 재령)을 근거지로 고구려 부흥운동을 시작했다. 한성에 고구려국이 성립된 것이다. 보장왕의 서자 혹은 외손자라고 알려진 안승은 부흥운동의 구심점이 되기에 충분한 존재였다. 그리고 전에 신라에 항복했던 안승이 검모잠과 함께 봉기함으로써, 고구려 부흥운동은 신라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진행될 수 있었다. 신라 역시 당군을 축출하고자 고구려 부흥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4 한성 고구려국의 멸망과 안승의 신라 투항

한성에 고구려국이 세워지고 안승이 왕이 되었다. 그러나 당군의 공격이 가해지자, 안승은 검모잠을 살해하고 신라에 투항했다. 기록상으로는 이 일들이 한두 달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을 그대로 인정하는 쪽과, 당시의 정황을 근거로 재해석하는 쪽이 서로 입장의 차이를 보인다. 기록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최근에는 이를 재해석하는 주장도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먼저 기록상의 연대를 그대로 인정하는 경우는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고구려 부흥운동이 거세지자 당은 670년 4월 좌감문대장군 고간(左監門大將軍 高侃)을 동주도행군총관(東州道行軍摠管)으로 삼고, 우령군위대장군(右領軍衛大將軍) 이근행을 연산도행군총관(燕山道行軍摠管)으로 삼아 부흥운동을 토벌하도록 했다. 당군이 공격해오자, 한성의 고구려국 내부에서는 안승과 검모잠을 중심으로 그 대책을 놓고 갈등이 일어났다. 그리고 치열한 대립 끝에 안승이 검모잠을 살해하고 신라에 투항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문무왕은 그들을 나라 서쪽의 금마저(金馬渚, 익산)로 이주시켰고, 이후 안승은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신라는 당과의 경쟁에 고구려 유민들을 적극 활용했다. 옛 백제지역에 친신라 성향의 고구려유민을 안치시킴으로써 웅진도독부와의 갈등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670년 7월, 신라는 웅진도독부를 비롯한 옛 백제지역의 82성을 빼앗았다. 신라가 단기간에 많은 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안승을 비롯한 고구려 유민들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공을 치하하기 위해 8월 1일, 신라는 사찬(沙飡) 수미산(須彌山)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했다. 이렇게 볼 때, 한성의 고구려국은 존재 기간이 1~2개월에 불과했고, 이후 안승은 금마저를 중심으로 활동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반면, 기록을 재해석하는 입장에서는 671년(문무왕 11) 설인귀의 편지에 주목한다. 설인귀가 문무왕에게 올리는 글에 여전히 안승의 고구려국이 존재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 편지는 당대의 상황 인식이 반영된 것이므로, 『삼국사기』나 『신당서』 등 후대의 기록보다 더 신뢰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성의 고구려국은 673년(문무왕 13)까지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고구려국은 4년여를 이어가면서 국가로서 나름의 체계도 갖추었다. 671년 1월과 5월, 673년 8월, 일본에 신라 사신의 도움 없이 고구려 사신이 도착하는데, 이 세 차례 사신 파견의 주체도 한성의 고구려국이었다. 또한 문무왕이 안승을 고구려왕에 봉한 것 역시 한성의 고구려국에 대한 책봉으로 이해하고 있다.

고구려 유민에 대한 당의 공격 시점도 다르게 해석한다. 당은 671년 9월 이후 부흥운동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지만, 평양과 대방지역 공격에 실패하여 요동으로 물러났다. 황해도지역에 있던 한성의 고구려국 역시 존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672년 8월부터 673년 말까지 다시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는데, 이 기간 중에 한성을 당에게 빼앗긴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므로 안승이 검모잠을 살해하고 신라에 투항한 시기도 673년 초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성의 고구려국은 673년까지 약 4년간 유지되었고, 안승 역시 이 한성의 고구려국을 중심으로 활동한 것이 된다.

5 보덕국의 해체와 의의

674년(문무왕 14) 9월, 문무왕은 안승을 보덕국왕(報德國王)으로 책봉한다. 보덕국이라는 표현은 이 때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보덕국의 성립은 한성 고구려국의 성립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아, 일반적으로는 전체를 보덕국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보덕국’이라는 표현의 등장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보덕’이라는 말 자체가 신라왕의 덕에 보답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안승의 책봉호가 고구려왕에서 보덕국왕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그만큼 안승과 보덕국의 독자성이 약화되었음을 뜻한다. 또한 이것은 신라가 안승을 신라 내부로 통합시키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신라의 입장에서 보덕국이 필요한 이유는 대당 전쟁에서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676년에 당과의 전쟁이 종식되면서 보덕국의 존재 이유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문무왕은 680년(문무왕 20) 3월, 안승에게 자신의 조카를 시집보냄으로써 안승을 신라 왕실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안승은 이러한 신라 왕실의 움직임 속에서, 보덕국을 해체하려는 의도를 알아챈 듯하다. 680년(신문왕 1) 8월, 신문왕 즉위 직후 김흠돌(金欽突)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는데, 안승은 반란의 사후처리가 다 끝나기도 전에 수덕개(首德皆)를 보내 역적의 평정을 축하했다. 중앙정치의 혼란이 보덕국에 미치는 것을 막고,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귀족세력의 반발을 무마하고 왕권강화를 추진하던 신문왕에게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는 보덕국의 존재는 눈엣가시와도 같았다.

683년(신문왕 3) 10월, 보덕왕 안승을 불러 소판(蘇判)의 관등과 김씨 성을 주고, 집과 토지를 하사하여 경주에 머물도록 했다. 이제 안승은 자신의 지지기반에서 격리되어, 완전히 신라의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이것은 곧 보덕국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자 684년(신문왕 4) 11월, 보덕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안승의 조카뻘 되는 장군 대문(大文)이 금마저에서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하자, 이에 분노한 보덕국의 주민들이 관리들을 죽이고 읍을 차지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 때 반란의 근거지는 현재 익산의 왕궁리유적과 보덕성이라 알려진 익산토성 등의 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문왕은 군사를 보내 반란을 진압했고, 보덕국의 사람들을 나라 남쪽의 주와 군으로 이주시켰다. 보덕국은 금마군(金馬郡)으로 바뀌어, 신라의 군현체제 안으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보덕국은 완전히 소멸하게 되었다.

보덕국의 소멸로 신라는 완전한 삼국의 통일을 달성하게 되었다. 반란을 진압한 신문왕은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통치체제 정비에 나섰다. 686년(신문왕 6), 신문왕은 중앙군사조직인 9서당 중 벽금서당(碧衿誓幢)과 적금서당(赤衿誓幢)을 조직했는데, 모두 보덕성의 고구려 유민들로 편성했다. 이것은 고구려 유민에 대한 통제를 목적으로 한 것이지만, 동시에 인적 차원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보여주는 것으로서도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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