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예군-예식진 형제

예군-예식진 형제[禰軍-禰寔進]

백제의 역신(逆臣)인가, 당의 공신(功臣)인가?

613년(무왕 14) ~ 678년(문무왕 18)

1 개요

예군과 예식진 형제는 백제 멸망기에 활동했던 백제의 지방관리이자, 백제 멸망 후 당(唐)에서 활동한 백제 유민들이다. 의자왕(義慈王)이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피해 웅진성(熊津城)으로 피난했을 때, 두 형제는 의자왕을 붙잡아 사비성(泗沘城)에 있던 소정방(蘇定方)에게 바쳤다. 이 공으로 당으로부터 관직을 받았고, 당의 백제 고지 지배정책에 관여했다. 특히 예군은 신라·왜와의 외교 문제 해결에도 나서는 등 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2 예군-예식진 형제의 가계와 출자

예군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이름이 확인되고, 예식진은 『삼국사기』와 『구당서(舊唐書)』에 예식(禰植)이라 표기된 인물이다. 그러나 단편적인 기록이어서 구체적인 활약상을 알기는 어려웠다. 그러다가 예군과 예식진을 비롯한 예씨 가족의 묘지명(墓誌銘) 4점이 발견되면서 문헌기록에는 없는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예식진 묘지명은 2006년 중국 하남성(河南城) 낙양(洛陽)의 골동품 가게에서 발견되었다. 그 후 2007년 중국학자 동연수(董延壽)와 조진화(趙振華)가 학계에 소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예군 묘지명은 2010년 섬서성(陝西省) 서안시(西安市) 남쪽의 예씨(禰氏) 가족 무덤군에서 발견되었다. 이 역시 이듬해 중국학자인 왕연룡(王連龍)에 의해 처음으로 학계에 소개되었다. 이로써 백제멸망기의 역사와 백제유민들의 활약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예군과 예식진은 2살 터울의 형제이다. 먼저 예군 묘지명에 의하면, 예군은 이름이 군(軍)이고, 자(字)는 온(溫)이다. 613년(무왕 14)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에 소속된 우이현(嵎夷縣) 즉, 현재의 부여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예식진은 이름이 식진(寔進)이다. 615년(무왕 14) 웅천(熊川) 즉, 웅진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어, 예군과는 출생지가 다르다.

예씨 형제의 조상은 이름에 차이가 있으나, 동일 인물에 대한 다른 표기로 보인다. 아버지는 예선(禰善) 혹은 사선(思善)이고, 조부는 예예(禰譽) 혹은 예다(譽多), 증조부는 예복(禰福)이다. 묘지명에는 증조부부터 부친까지 3대가 모두 좌평(佐平)의 품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이는 예씨 가문이 좌평을 세습할 정도로 유력한 가문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군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이름을 기록하지 않아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반면 예식진에게는 아들 예소사(禰素士)가 있었고, 손자로는 예인수(禰仁秀) 등 5명이 있었다. 예군은 678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예식진은 이보다 앞선 672년 5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한편, 예씨 집안의 출자와 관련해서 예군을 비롯한 예씨 집안의 묘지명에서는 예씨의 선조가 본래 중국 사람이었는데, 중간에 백제로 건너왔다고 밝히고 있다. 이들의 묘지명을 보면, 예씨 가문의 백제 이주에 관한 기록은 후대로 올수록 이주 시기가 늦어지고, 선조에 대한 기록이 구체화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예군과 예식진은 백제를 배신하고 당에 협조하면서, 당으로부터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 조상에 대한 혼란스러운 기록은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즉, 중국과의 친연성을 강조하기 위해 중국 출신임을 표방하고, 백제로의 이주시기도 점차 늦추어 기록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씨 가문의 조상이 실제로 중국에서 건너온 것인지도 단정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3 백제 멸망기 예군-예식진의 활동

예군의 집안이 대대로 좌평을 지낼 정도로 유력가문이었다고는 하지만, 문헌에는 이들의 활동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무왕(武王)이 630년대에 왕권을 강화하고 정계를 개편하면서 신진세력들을 많이 기용하는데,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예군과 예식진도 정치 활동을 시작한 것이 아닌가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예군과 예식진 형제의 활약이 최초로 기록된 것은 백제멸망 과정에서이다. 660년(의자왕 20), 신라와 당의 연합군은 백제 공격에 나섰다.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은 산동반도의 성산(成山)을 출발해 덕물도(德物島)에 도착했다. 소정방은 이곳에서 신라의 김법민(金法敏)을 만나 양군의 사비성 공격 방법을 협의하고, 7월 10일에 사비성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였다. 당군은 기벌포 부근에서 상륙한 후, 사비성 남쪽에 이르러 신라군을 기다렸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대를 맞아 고전 끝에 승리를 거두고, 7월 11일 사비성 남쪽에서 당군과 만났다. 그리고 7월 12일, 나당 연합군은 군사를 넷으로 나누어 일제히 사비성을 공격했다. 백제군은 힘을 다해 싸웠으나 패배의 연속이었다.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에 육박해오자 의자왕은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태자와 함께 웅진성으로 피신했다.

웅진성은 한성을 함락당한 백제가 다급하게 수도로 정할 정도로 방어 상의 이점을 가진 곳이었다. 그렇기에 사비 천도 후에도 북방(北方)의 치소로서, 군사적 거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웅진성은 예씨 가문의 터전이기도 했다. 『삼국사기』에는 당시의 웅진방령(熊津方領)이 예식(禰植)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예식진과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방령은 군사적 지방통치조직이었던 방(方)의 책임자이다. 예식진은 웅진에서의 세력을 기반으로 방령에 오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피난을 간 것은, 예씨 가문의 세력을 동원해 나당연합군을 막아보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의자왕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웅진성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나 웅진성의 실력자였던 예군은 백제가 멸망할 것을 예감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의자왕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예군의 동생 예식진은 의자왕을 사로잡아 사비성으로 끌고 가 나당연합군에게 항복하도록 했다. 이때가 7월 18일이었다. 이렇게 예군과 예식진 형제는 백제 멸망의 순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4 웅진도독부 시기의 활동

예군과 예식진은 660년 9월, 의자왕이 압송될 때 함께 당으로 들어갔다. 백제 멸망에 기여한 공으로 예군은 절충도위(折衝都尉)가 되었다. 이후 웅진도독부로 돌아온 예군은 백제 고지 정책과 관련하여 왜(倭)나 신라와의 외교 분야에서 활약을 했다. 당시 왜는 백강구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당에 대한 견제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당은 이러한 관계를 풀고, 국교를 재개하기 위해 백제 유민을 활용했다. 664년 5월, 백제 진장(百濟 鎭將) 유인원(劉仁願)이 보낸 곽무종(郭務悰) 등의 사절단이 일본에 도착했다. 이 때 사절단 중에 예군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왜는 곽무종 일행이 당 천자의 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입경시키지 않고 그대로 돌려보냈다. 이듬해, 당은 왜의 요구를 수용하여 유덕고(劉德高)를 사자로 파견했는데, 이때 곽무종과 예군이 유덕고를 수행하였다. 두 차례의 일본 사행 이후, 예군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좌융위낭장(左戎衛郎將)이 되었고, 이어서 우령군중랑장(右領軍中郞將) 겸(兼) 검교(檢校)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사마(司馬)에 올랐다.

예군은 신라와의 교섭에서도 역할을 했다. 670년(문무왕 10) 7월, 예군은 역시 웅진도독부 사마의 자격으로 신라에 갔다. 당시 당은 백제 고지에 대한 지배를 둘러싸고 신라와의 대립이 극심한 상황이었다. 문무왕(文武王)은 백제 지역의 남은 무리들이 배반할까 의심하여 웅진도독부에 화친을 청했다. 그러나 웅진도독부 측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예군을 보내 신라를 염탐하였다. 그러자 신라는 예군 등을 억류하고, 웅진도독부를 공격했다. 그러다가 672년 9월, 2년 2개월 만에 함께 억류되었던 당의 관리들과 함께 당으로 송환되었다. 이처럼 예군은 왜와 신라에 사신으로 왕래하면서, 웅진도독부의 운영에 적극 참여하였다.

예식진 역시 백제 멸망에 기여한 공으로 당에 들어가 종3품의 귀덕장군(歸德將軍)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백제로 돌아오면서 동명주자사(東明州刺史)에 임명되었다. 동명주(東明州)는 원래 당이 백제 고지에 설치하려 했던 5도독부 중의 하나인 동명도독부(東明都督府) 소속의 주였다. 그러나 이것이 어려워지자 웅진도독부 산하의 7개 주 가운데 하나로 편입되었다. 당시 동명주는 웅진도독부를 둘러싸고 있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예식진은 이러한 동명주의 자사가 되어, 웅진도독부의 백제 고지 지배를 도왔던 것이다. 그 후 예식진은 좌위위대장군(左威衛大將軍)으로 승진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당으로 돌아갔다.

5 당에서의 활동과 죽음

당으로 돌아온 예식진은 672년 5월 25일, 내주(萊州)의 황현(黃縣)에서 5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예식진 묘지명에는 예식진이 이곳에서 갑자기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을 뿐,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672년 당시가 백제 고지를 둘러싼 신라와 당의 전쟁이 한창이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라는 웅진도독부가 관할하던 백제 고지의 상당부분을 점령했고, 671년에는 사비성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해 신라 영역으로 편입시킨 상황이었다. 이에 당은 신라의 팽창을 막고 웅진도독부를 돕기 위해 계림도행군(雞林道行軍)을 파견하게 되는데, 이 구원군의 출발지가 내주 황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예식진은 계림도행군의 일원으로 참여했다가, 출발에 앞서 사망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당 고종(高宗)의 조서로 예식진의 장례는 성대하게 치러졌다. 예식진의 시신은 같은 해 11월 21일 장안(長安)으로 옮겨졌고, 고관대작들이 묻히는 고양원(高陽原)에 묻혔다.

한편, 예군은 당으로 송환된 후, 같은 해 11월 21일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에 임명된다. 동생인 예식진의 시신이 서안으로 옮겨지는 시기와 일치한다. 이후 예군은 황제를 근시하는 무장으로 활동하다가 678년 2월 19일, 장안 연수리(延壽里)에 있던 자신의 집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66세였다. 당 고종이 비단과 조를 보내주면서,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나라에서 지급하도록 했다. 그리고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 겸(兼) 검교본위(檢校本衛) 장사長史) 왕행본(王行本)에게 장례절차의 감독을 맡겼다. 예군은 같은 해 10월 2일, 예식진과 같은 고양원에 묻혔다. 고양은 예식진과 예소사, 예인수의 무덤이 확인된 곳으로, 예씨 가문에게는 일종의 가족묘지라고 할 수 있다.

예군과 예식진 형제는 백제의 지방관리였다. 그러나 웅진성으로 피난 온 의자왕을 사로잡아 사비성의 소정방에게 바침으로써 백제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공으로 당의 관리가 되어, 웅진도독부의 백제 고지 지배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백제와 당 중에서 당을 선택했고, 이후에는 철저히 당의 관리로 살았다. 예군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아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반면 예식진의 아들 예소사는 아버지의 음덕으로 벼슬에 오를 정도로 당 조정의 예우를 받았다. 그리고 예소사는 예인수 등 5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대대로 관직에 올라 예씨 가문의 번성을 이끌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