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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溫達]

고토 회복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전장에 떨어진 별

미상 ~ 590년(평원왕 32)

온달 대표 이미지

삼국사기 온달 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온달(溫達, ?~?)은 평원왕대(平原王代, 재위 559~590)와 영양왕대(嬰陽王代, 재위 590~618)에 활동한 고구려의 장군이다.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모자라다는 평가를 받아오다가, 평원왕의 딸 평강공주(平岡公主)와 결혼하여 그녀의 내조를 받고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큰 공적을 세우고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이후 영양왕대에 고구려의 오랜 숙원 중 하나였던 신라에 빼앗긴 한강 유역 수복을 위해 전장에 나섰지만, 결국 이루지 못하고 전장에서 사망한다.

2 바보 온달, 평강공주(平岡公主)와 결혼하여 능력을 펼치다

온달(溫達)은 고구려 평원왕대 사람으로 눈이 먼 늙은 어머니와 둘이 살았는데, 집이 매우 가난했고 외모가 아주 못생겼으며, 세상 물정을 잘 모르고 어리석어서 당시 사람들이 그를 ‘바보 온달[愚溫達]’이라 불렀다. 하지만 밝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효심이 깊어서 음식을 구걸해서라도 어머니를 봉양했다.

당시 평원왕에게는 어린 딸 평강공주가 있었는데, 그녀는 자주 울었다. 왕이 항상 그녀를 놀리며, 그렇게 계속 울기만 하면 아무도 결혼하려 하지 않아 바보 온달과 결혼할 것이라 하였다. 평강공주가 16살이 되자 왕은 그녀를 유력한 귀족 집안의 자제와 결혼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 결혼을 받아들이지 않고, 평소 왕이 그녀를 놀리며 했던 말대로 바보 온달과 결혼하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이에 왕이 화가 나 그녀를 왕궁에서 나가라고 하였다.

공주가 비싼 장신구 수십 개를 챙겨 가지고 홀로 궁을 나와 온달의 집을 찾아 갔다. 하지만 온달과 그 노모도 공주와 결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망설였다. 이에 공주가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함께 하게 되었고, 그녀가 챙겨 온 귀중품들을 팔아 농지와 집, 노비, 소, 말 및 여러 살림살이를 장만하였다. 그리고 남편을 잘 내조해, 온달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능력을 키워나가게 하였다. 특히 공주는 온달이 말을 사러 갈 때, 일반 시중의 것을 사지 말고, 전쟁 등에서 사용하기 위해 나라가 키우던 말 중 병 들어 약해져 팔려는 말을 사오라고 조언하였고, 온달이 그런 말을 사오자 정성껏 보살펴 뛰어난 말로 키워냈다. 그리고 온달이 그 말을 타고 무기를 잘 사용할 수 있도록 그를 이끌어, 드디어 온달이 능숙해졌다.

고구려에서는 매년 3월 3일 왕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낙랑(樂浪)의 들판에 모여 사냥하고 그 잡은 동물들로 하늘과 산천(山川)에 제사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그동안 실력을 키워온 온달이 이 행사에 참여하여, 그 누구보다 빨리 달리고 많은 동물을 사냥하여 단연 눈에 띄었다. 이에 왕이 온달을 불러 이름을 묻고는 매우 놀랐다. 하지만 아직 왕의 사위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때 북주(北周)의 무제(武帝, 재위 561~578)가 군대를 보내 고구려를 침략해 왔다. 평원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산(肄山)의 들에서 맞서 싸웠는데, 이때 온달이 참전하여 맨 앞으로 나아가 전력을 다해 싸워 적 수십을 베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온달의 분전에 사기가 오른 고구려군이 크게 분발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전투가 끝난 후 모든 사람이 온달의 공이 제일 크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이에 왕이 매우 기뻐하며, 온달을 자신의 사위라고 널리 말하며, 대형(大兄, 고구려 제 7관등)의 지위를 주고 그를 받아들여 총애하였다. 부귀영화가 날로 더해갔고, 위엄과 권세가 높아졌다. 온달도 힘을 다하여 왕을 섬기고 일하여 공적을 쌓아갔고,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다.

3 잃어버린 영토의 회복을 꿈꿨으나

시간이 지나 평원왕이 죽고 그 아들 영양왕대(嬰陽王代, 재위 590~618)이 즉위하였다. 이때 온달은 상당한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왕을 뵙고 신라 정벌을 건의한다. 고구려는 551년(양원왕 7) 백제와 신라 연합군에 한강 유역을 상실하였는데, 고구려인들은 이를 자신들이 잃어버린 땅이라 생각하여 반드시 되찾고자 하였다. 온달도 이 고토를 다시 회복하는 것을 염원하였던 것 같다. 그렇기에 왕에게 자신이 출정하게 허락해 준다면 반드시 이 땅들을 되찾아 오겠다고 하였던 것이다. 왕이 온달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온달은 계립현(鷄立峴, 문경새재 동북쪽의 고개)과 죽령(竹嶺)의 서쪽 땅을 되찾지 못하면, 곧 고토를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전장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말을 실천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싸웠다. 마침내 아단성(阿旦城)에 이르러 신라군과 전투를 벌였다. 치열한 격전이 펼쳐졌는데, 앞장 서 싸우던 온달은 화살에 맞아 애석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결국 온달은 그토록 염원하던 고토의 회복을 이루지 못하고 전장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온달의 시신을 고구려로 가져와 장사를 치르려 했지만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출정 전에 맹세한 바대로,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지 못했기에 죽어 시신이 되어서도 돌아가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그의 관은 평강공주가 와 관을 어루만지며 돌아갈 것을 청하자 비로소 움직였다고 한다. 그의 죽음 이후의 이야기는 그가 얼마나 고토 회복을 염원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4 온달, 설화인가 역사인가

온달은 일반적으로 ‘바보 온달 이야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일생 자체도 매우 설화적이다. 그래서 그를 실존 인물이 아니라 설화 속 허구의 인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가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에 실려 있기 때문에 허구의 인물로 보기는 힘들다. 분명한 역사 기록이 있어서 『삼국사기』에 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이야기 전체가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그가 밥을 빌어먹고 살던 최하층민이라던가, 평강공주가 아버지가 놀리는 말을 듣고 온달에게 시집가기를 결심했다던가, 원래 온달은 못생긴 바보였는데 평강공주 때문에 능력 있는 사람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던가 하는 등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허구가 가미되었음이 분명하다.

실제 온달에 대한 사실은 어떠했을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당시 사회의 여러 면모들을 통해 추론해 볼 수는 있다. 아마 온달은 고위층에 가까운 귀족은 아니었고 하급 귀족 집안 출신이었으며, 무장으로서의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을 것이다. 여러 차례에 걸친 활약을 통해 왕이 그를 중용하고자 했고 또 사위로 맞이하려 하였으나, 당시 고위 귀족들이 그의 집안이 한미하여 왕실과 혼인할 자격이 안 된다고 보고 많이 반대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왕은 망설였지만, 공주가 애초의 약속대로 결혼을 고집을 부려 결국 혼인이 성사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혼이 당시 고구려 지배층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것이어서 비난과 시기의 대상이 되었고, 급기야 온달을 미천한 집안의 못생긴 바보로 묘사하는 이야기가 만들어졌지 않을까 생각된다.

또 당시 고구려는 귀족세력들이 정국을 주도하는 귀족연립정권이었는데, 왕이 기존의 고위 귀족이 아닌 온달을 사위로 맞아들이고 측근으로 중용하면서, 귀족연립정권을 구성하던 고위 귀족들을 견제하려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설화적 이야기를 통해 그 실상에 대해 접근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온달에 대해서는 설화적 성격으로 덧입혀진 『삼국사기』 「열전」의 온달전 이외에 다른 기록은 전무하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설화적 색채가 덧입혀진 것인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온달이 평원왕의 사위이지 장군이며, 신라 원정에서 전사한 실존 인물일 가능성은 높다. 『삼국사기』는 고구려가 603년(영양왕 14) 신라 북한산성(北漢山城, 지금의 서울특별시 소재)을 공격하였지만 신라의 왕이 대군을 이끌고 한수(漢水)를 건너와 퇴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온달의 설화가 전해지는 단양 온달산성(丹陽 溫達山城)이나 서울의 아차산성(阿且山城)도 온달이 전사했다는 아단성의 조건을 거의 충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온달 이야기를 통해 당시 고구려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고구려는 6세기 중후반 북으로는 중국과 돌궐, 남쪽으로는 백제와 신라의 침략을 받아 위기에 처했고, 한강유역을 상실하는 등 영토를 잃기도 했다. 당시 고구려인들은 과거 강대했던 고구려를 재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고토 회복의 염원으로 이어졌지 않을까 생각된다. 온달의 안타까운 죽음은 당시 고구려인들의 이러한 염원들이 담긴 것이었다.

한편 온달 이야기에서는 못난 남편을 훌륭한 인물로 만들어낸 평강공주 이야기와 힘없는 백성에서 왕의 사위와 이름난 장군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린다던가 하는 이야기 요소가 중요하다. 신분 상승을 희구하는 백성들의 생각이나 전통의 수동적 이미지를 버리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당찬 여성의 모습 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민중의식이나 여성의식들의 발로로 이해할 수 있는데, 후대로 갈수록 이러한 요소들이 더욱 강조되어 온달 이야기가 전해지는 양상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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