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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인[王仁]

한일 문화 교류의 선구자

미상

왕인 대표 이미지

왕인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개요

왕인(王仁)은 백제시대의 학자이다. 왜(倭)에 『논어(論語)』와 『천자문(千字文)』을 전해 일본 유학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일본에 가서 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문필을 전문으로 하는 씨족집단인 서수(書首)의 시조가 되었다. 그 외에도 백제의 기술과 공예 등 선진문물을 전파하여 아스카문화의 형성에 기여했다.

2 왕인 관련 기록의 검토

왕인과 관련된 기록은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고, 『고사기(古史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속일본기(續日本記)』 등 일본 측 사료에서만 확인된다. 『고사기』에는 왕인을 화이길사(和邇吉師)라고도 기록하였는데, ‘왕인’과 ‘화이’가 일본어로 모두 ‘와니’라고 발음되므로 동일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왕인이 한 고조(漢 高祖)의 후손 중 하나인 왕구(王狗)의 손자라고 하여, 성이 왕(王)이고 이름이 인(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의 가계나 출생·사망 시기 등은 알 수 없다.

왕인 관련 기록에는 왕인이 왜국으로 오게 된 과정과 왜국에서의 활동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 내용을 종합해서 왕인의 활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왕이 아직기(阿直岐)를 왜에 보내면서 말 2마리도 함께 보냈다. 천황은 아직기에게 말 사육을 담당하도록 했다. 아직기는 경전에도 뛰어나서 태자인 토도치랑자(菟道稚郞子)의 스승이 되었다. 천황이 아직기에게 본인을 능가하는 박사가 있냐고 묻자, 아직기는 왕인을 추천했다. 천황은 백제에 사신을 보내 왕인을 왜로 초빙했다. 왕인은 그 다음 해에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왜에 들어갔고, 아직기에 이어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왕인은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을 정도여서, 태자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왕인에게 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왕인의 활동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윤색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것이 『천자문』인데, 이것은 중국 남조의 양(梁) 무제(武帝, 재위 502~549) 시기에 편찬된 책이다. 왕인의 활동시기로 추정되는 4세기보다 이후에 편찬된 책이다. 그러므로 왕인이 『천자문』을 가지고 왜에 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왕인이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는 것도 실제로는 선진적인 학문을 익힌 도래인(渡來人)이 태자를 개인적으로 가르치거나 정치적 자문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에서 동궁학사(東宮學士)와 같이 태자 교육이 제도화되는 것은 율령관제(律令官制)가 성립한 이후에나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는 기록 역시 후대의 인식이 투영된 것으로 보고 있다.

왕인이 일본에 유학을 전한 인물로 기록된 것은 그의 후손들이 번성했기 때문이다. 왕인의 후손들은 대대로 카와치(河內) 지방에 거주하면서 기록과 문서를 담당했다. 그러면서 왕인은 문필씨족인 서수(書首)의 시조로 추앙되었다. 그러므로 왕인의 도왜 기록은 문필을 담당한 씨족집단이 왜국에 정착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왕인의 역할을 폄하할 필요는 없다. 왕인이 일본의 유학과 문학·문자의 발전에 기여한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이 기록과 문서행정 분야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것 역시 사실이다.

3 왕인의 왜국 이주 시기

왕인이 왜국으로 건너간 것은 일시적인 체류가 아니었다. 왜국의 초빙이 있었고, 백제 왕실의 허락 하에 이루어진 정치적 이주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왕인의 왜국 이주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상 차이가 있어 혼란을 준다.

『고사기』에서는 왕인이 근초고왕(近肖古王, 346~375) 때 왜국에 갔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서기』에서는 응신천황(應神天皇) 15년과 16년에 걸쳐 아직기와 왕인이 왜에 건너간 것으로 되어 있다. 『일본서기』의 응신천황기는 일반적으로 후대의 기록이 소급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어, 연대를 수정하면 각각 405년(아신왕 14년, 전지왕 원년)과 406년(전지왕 2)이 된다. 이 같은 시간상의 차이에 대해서 두 기록 중 하나를 선택하여 왕인의 도왜 시점을 근초고왕대 혹은 아신왕 말·전지왕 초로 특정하는 주장이 있다. 그런가하면 두 기록을 절충해서 근초고왕 대부터 아신왕 대에 걸쳐서 활약한 인물이라 이해하기도 하고, 반대로 두 기록 모두를 부정하며 오경박사가 파견된 6세기경의 인물로 추정하기도 한다. 여러 견해가 있지만, 다음의 정황을 보면 왕인의 활동시기를 근초고왕대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근초고왕대 백제는 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369년(근초고왕 24)에 왜는 가야 지역을 공격해 비자벌(比自伐, 창녕)과 남가라(南加羅) 등 가야의 7국을 평정했다. 그리고 서쪽의 침미다례(忱彌多禮)를 정벌해 백제에게 주니, 근초고왕과 왕자 근구수가 군대를 이끌고 왔다. 그러자 비리(比利)·벽중(辟中) 등 4읍이 스스로 항복해 왔다. 이 기록은 정벌의 주체를 백제로 바꾸면 근초고왕의 전남지역 정복 과정을 알려주는 기사로 인정되고 있다. 이 때 왜가 근초고왕의 정복전쟁에 협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근초고왕대 왜와의 관계는 군사적 협력에서 그치지 않았다. 칠지도(七支刀)가 상징하듯이 양국 간의 공식적인 우호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왕인이 왜로 간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백제와 왜는 정치적·군사적 우호관계를 바탕으로 폭넓은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분위기는 인적 자원의 교류로 확대되어, 많은 사람들이 왜로 건너가 백제의 선진문물을 전수해 주었다. 그리고 왕인은 당시 양국 간 문화교류의 선구자이자 상징적 인물인 셈이다.

4 왕인 전승의 형성 과정

일본에서 왕인에 관한 기록은 『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 『속일본기』와 『고금화가집(古今和歌集)』 등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후대의 전승에서는 왕인이 왜국으로 가게 된 배경과 과정, 왜국에서의 활동, 왕인의 조상과 후예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들이 보완됨으로써 현재와 같은 왕인 전승의 뼈대를 형성했다.

이를 토대로 일본에서 왕인에 대한 평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왕인은 유교문화의 전수자로, 태자의 스승이 됨으로써 천황가의 정치적 자문을 담당했다. 그리고 한자를 전해주면서 이것을 변형해 일본 글자의 원형인 가나(假名)를 창안했다. 또한 일본 고유의 시조인 와카(和歌)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는 이런 업적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해서 지배계층은 물론 민간에서도 왕인을 존숭했다. 나아가 왕인을 신앙의 대상으로까지 받들어, 지금도 왕인신사(王仁神社)가 곳곳에 있고, 더불어 왕인 축제가 거행되기도 한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왕인을 일본에 유학과 문자를 전해준 인물로, 한일 교류의 선구자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왕인과 관련된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조선시대로, 신숙주(申叔舟)가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이후에 쓴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왕인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시기에 백제가 왜에 서적을 전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내용이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과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에도 실려 있다. 이후 남용익(南龍翼)의 『부상록(扶桑錄)』에서 왕인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이래 통신사 사행원들의 사행록에서 왕인에 관한 기록이 점차 구체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왕인에 관한 기록이 체계적으로 정리되는 것은 이덕무(李德懋)와 한치윤(韓致奫)에 의해서였다. 이덕무는 『청비록(淸脾錄)』과 『청령국지(蜻蛉國志)』에서 천자문을 가져가 일본에 문자를 전하고 경전을 가르친 유학의 시조, 인덕천황(仁德天皇)을 칭송하는 시조를 지은 와카(和歌)의 아버지 등으로 평가하였다. 한치윤도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왕인을 일본 유학의 시조로, 아스카문화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위인으로 평가했다. 특히 왕인 관련 유적을 소개함으로써 왕인이 실존인물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이처럼 이덕무와 한치윤이 왕인에 관한 다양한 기록들을 종합 정리하면서 왕인에 대한 인식도 체계를 잡았다. 그리고 이들이 수집한 자료가 한국과 일본을 총망라하고 있었던 만큼, 왕인에 대한 평가는 양국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5 근대 이후의 왕인 현창 사업

일본 오사카(大阪) 히라카타(枚方)에는 왕인의 묘라고 전해지는 무덤이 있다. 여기에는 왕인의 묘임을 알려주는 묘표가 남아 있으나 이것은 에도시대(江戶時代) 말에 건립된 것으로, 진짜 왕인의 무덤인지는 확실치 않다.

일본은 메이지(明治) 시기, 한반도와 대륙 진출에 관심이 고조되면서 왕인 묘에 대한 현창 작업을 시작했다. 청일전쟁으로 잠시 중단되었지만, 이후 묘역 확장 사업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1920년대에는 왕인신사봉찬회(王仁神社奉讚會)의 주도로 이곳에 왕인신사 건립이 추진되기도 했다. 1932년 상해사변으로 전쟁이 심화되고, 왕인신사봉찬회가 도쿄(東京)로 옮겨가면서 건립 추진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왕인과 왕인신사 추진 사업은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상징으로 계속 홍보되었다.

이후 도쿄에서는 조낙규(趙洛奎)의 제안으로 왕인의 비석 건립이 추진된다. 중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조낙규가 사망하면서 추진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지원 하에 조선에서 건립비를 모금했고, 도쿄의 우에노공원(上野恩賜公園)에 비를 건립했다. 그때가 1939년 4월 28일이었다. 이듬해인 1940년 4월 28일에는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이 행사에서 일제는 백제에서 온 왕인의 활동과 의의를 기리면서, 왕인을 내선일체의 선구자라고 찬양하였다. 이 같은 일제의 왕인 현창 사업은 일제의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며, 전시총동원체제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 측면이 강했다.

한편 일제강점 하의 조선에서도 전라남도 영암이 왕인의 출생지라고 하는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1937년에 간행된 이병연(李秉延)의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영암군편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에서 왕인은 영암 성기동에서 태어나 고이왕 때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으며, 오사카 히라카타에 그의 묘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본에 선진 문물을 전해주어 고대 문화의 형성에 기여한 왕인은 조선인의 민족적 자긍심과 문화적 우월의식을 자극했다. 이에 조선인들 역시 왕인 관련 사실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 왕인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된 것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일본에서는 히라카타의 왕인묘역이 정비되었고, 한국에서는 1985~1987년에 걸쳐 왕인박사유적지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가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왕인을 한일 간의 문화교류와 민족적 자부심의 상징으로 여기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 현재 왕인박사유적지에는 왕인이 태어난 성기동과 왕인이 마신 성천(聖泉), 왕인이 공부한 문산재(文散齋)와 책굴(冊窟), 왕인이 왜국으로 간 후 그를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는 왕인석상(王仁石像) 등이 있다. 그리고 1997년부터 영암왕인문화축제를 개최하며 왕인을 기리고 있다.

왕인 관련 기록은 처음에는 매우 소략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활동상이 구체화되었다. 후대의 인식이 투영되어 왕인의 업적에 덧입혀진 측면이 있는 것이다. 왕인의 상징성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에는 식민지배와 민족주의라는 측면에서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인의 중요성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왕인은 한일 문화 교류의 첫 장을 장식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고대 일본 문화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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