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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圓光]

신라 불교 교학의 초석을 놓은 승려

미상

1 개요

원광(圓光)의 성은 박씨(朴氏) 또는 설씨(薛氏)로 550년경 신라 왕경 경주에서 출생하였다. 유교와 노장학을 배우다가 중국 진나라와 수나라에서 유학하면서 대승교학을 배워 진평왕 때 귀국하였다. 여래장 사상가였으며, 점찰법회(占察法會)를 도입하여 불교의 토착화·대중화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 화랑도의 중심 이념인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지었다.

2 왕경인으로 태어나다

원광의 성은 박씨(朴氏) 또는 설씨(薛氏)라고 한다. 박씨라면 진골이지만, 설씨라면 진골보다 낮은 신분인 육두품이다. 신라 시대에 진골과 육두품 사이의 구분이 확실했기 때문에 원광이 박씨인가 설씨인가는 원광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소이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가 왕경인 경주에서 태어났고, 중국에서 유학한 후 진평왕의 초청으로 귀국하여 왕경에 와서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하다가 그곳에서 입적한 것은 사실이다.

원광은 말할 때에는 늘 웃음을 머금었고 얼굴에는 화가 난 기색을 보이지 않는 성품을 갖고 있었다. 또 글을 매우 좋아하여 노장학과 유학을 두루 배우고, 역사서를 연구하였으며 글을 쓰는 능력도 뛰어났다. 그는 학문을 좋아하고 유학을 공부하다가 어느 시점에는 당시 새롭게 신라 사회에서 영향력을 미치던 불교 공부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가 불법에 귀의했을 때가 중국 유학 전 신라에 있을 때인지, 중국으로 유학간 이후인지 엇갈린 기록이 전하기 때문에 명확하지는 않으나, 중국에서의 유학을 통해 대승교학을 배워 신라에 전함으로서 신라 불교 교학의 초석을 세우게 된다.

3 중국에서 유학하여 대승교학을 익히다

원광은 중국에 유학하는 사람도 적었고, 설사 있다 해도 그 이름을 크게 떨치지 못하던 시기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고본 『수이전』에서는 중국에서 불법을 배워 이 나라의 중생들을 인도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삼기산(三岐山)의 신령의 조언을 따라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서는 진평왕 11년(589) 3월, 진(陳) 나라에 가서 불법을 탐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때 나이는 25세(또는 36세)였다.

진나라에서 장엄사(莊嚴寺)의 승민(僧旻)의 제자의 강의를 듣게 된 것은 원광에게 중요한 의미였다. 『속고승전』에 의하면 원광이 이 강의를 통해 그동안 해왔던 세속의 공부가 덧없음을 깨닫게 되어 출가를 결심하였고, 진의 황제에게 글을 올려 승려가 되기를 청하였으며, 칙명으로 허락을 받아 구족계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원광이 유학 오기 전에 이미 출가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이 강의가 불교 교학 공부에 뜻을 크게 품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정황을 잘 보여준다.

이후에 원광은 성실학 계열의 교학을 열심히 공부하면서 오(吳)나라의 호구산(虎丘山)에서는 선정을 닦기도 했다. 나중에는 사람들에게 『성실론』과 『반야경』을 강의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명망을 얻었다. 그러다가 수나라가 득세하면서 개황 9년(589)에는 수나라 수도로 옮겨와 지내게 되었다. 이때부터는 섭론종의 학풍에 경도된 한편, 여래장 사상을 익히며 11년간 수나라에 머물면서 대승교학을 연구하고 강의하였다.

4 신라로 돌아와 세속오계를 전하다

진평왕이 즉위한 지 22년째 되던 600년, 원광은 수나라에 파견되었던 제문(諸文), 횡천(橫川) 등 사신들과 함께 신라로 돌아온다. 원광은 불교 교학을 배우며 지내다가 중국에서 생을 마쳐야겠다고 결심했던 듯하지만, 그의 명성이 신라에도 알려지면서 진평왕의 요청으로 귀국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나라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을 뿐만 아니라 진평왕이 직접 그를 만났을 때는 마치 성인을 대하는 것처럼 공경했다고 한다.

원광은 이후 가슬갑(嘉瑟岬)에 머물렀는데, 어느 날 귀산(貴山)과 추항(箒項) 두 젊은이가 그를 찾아와 평생의 교훈으로 새길 수 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이에 원광이 이들에게 전한 것이 바로 세속에서 지켜야 하는 다섯 가지 계율인 세속오계(世俗五戒)이다. 이 다섯 항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충성으로 임금을 섬긴다, 두 번째는 효로 부모를 섬긴다, 세 번째는 친구와 사귐에 믿음이 있게 한다, 네 번째는 전투에 임하여 물러섬이 없다, 다섯 번째는 살생을 함에 가림이 있게 한다.

원광은 불교의 보살계 사상에 근거하면서도 출가자가 아닌 세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을 위해 대승윤리의 실천적 이념으로서 삶의 지침을 전한 것이다. 귀산과 추항은 전투에 임하여 물러섬이 없다는 임전무퇴와 살생을 함에 가림이 있게 한다는 살생유택의 정신을 백제와의 전쟁에서 직접 실천하였다. 귀산이 원광의 가르침을 되새기면서 백제군 수십 인을 죽이고 추항과 함께 힘껏 싸우자 이 모습을 보고 신라의 군사가 분발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결국 아막성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으나 세속오계는 당시 신라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필요한 사회적 이념으로서 적용되었고, 화랑도의 정신으로 자리 잡았다.

5 점찰법회로 교화하다

원광은 진평왕의 요청으로 귀국하였으나 왕경에 머물기보다는 가슬갑과 같이 당시 신라에서 주요한 요충지였던 곳에 주석하면서 불법을 전하였다. 그가 택한 교화의 방법은 점찰법회의 실시였다. 원광은 가서갑에 점찰보(占察寶)를 두는 것을 항상 지키게 했다.

‘보’란 돈이나 곡식을 시주하여 본전은 남겨두고 그 이자를 취하는 것이므로 점찰보를 둔다는 것은 점찰법회를 행하는데 필요한 비용의 마련을 위한 것을 의미한다. 점찰법회는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의 내용에 따라 선과 악이라고 쓴 두 개의 나무 간자를 던져 그 결과에 따라 과거의 선업과 악업을 점치고, 선이나 악의 결과가 자신이 쌓은 업에 따른 것임을 알려 주고 나아가 죄를 참회하도록 하는 법회이다. 점찰이라는 방법은 일반 백성들에게 불교를 알리는데 유용했다. 한편 원광의 제자 원안이 전하기를, 원광은 왕의 병을 치료할 때 계를 받고 참회하게 하였다고 했는데, 이는 원광이 계율을 지키고 참회 신앙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원광은 점찰법회에서도 계율을 지키고, 죄를 참회하도록 하였다. 또한 원광이 주도한 점찰법회에서는 죽은 이를 추선하는 의식도 행해졌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당시 신라에서 지속되던 전쟁 때문에 상처 받은 백성들의 마음을 점찰법회를 통해 위로할 수 있었다. 이처럼 원광은 점찰법회를 통해 불교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동시에 죽음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달래주는 역할을 하였다.

6 정치적 조언자이자 협력자로서의 역할을 하다

진평왕 30년(608)에 신라는 고구려의 잦은 공격을 받고 있었다. 603년 북한산성 공격을 받았고, 608년 2월에는 북쪽 변방을 침략 당해 8천명의 포로가 발생했으며, 4월에는 우명산성을 빼앗기기도 했다. 진평왕은 이에 수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공격해 달라는 요청을 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요청이 담긴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때였다. 이에 진평왕은 오랜 시간 중국에서 유학 경험이 있으면서도, 유교경전과 역사서 등에 밝은 원광에게 걸사표(乞師表)를 작성해줄 것을 요청한다. 원광은 출가자로서 전쟁에 동조하여도 괜찮을 것인가를 두고 잠시 고민하였으나, “왕의 땅에 살면서 그 물과 풀을 먹고 있으니 어찌 명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면서 신라의 안위를 위해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걸사표 작성 이후에도 원광은 신라의 외교문서를 작성하여 나라의 명으로 주고 받는 여러 문서들이 원광의 가슴으로부터 나왔다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또 진평왕 35년(613)에 수나라 사신 왕세의가 왔을 때 신라에서는 처음으로 황룡사에 백고좌회를 설치하였다. 이때 원광이 가장 윗자리에 앉아서 이 법회를 주도하였다. 백고좌회란 『인왕경』의 내용에 따라 100명의 고승을 초청하는 법회로서 왕법과 불법을 조화시키려는 성격이 짙은 법회이다. 불교식 법회이지만 이때의 백고좌회는 사신 영접과 관련하여 베풀어진 것이기 때문에 원광에게 외교사절로서의 역할도 기대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원광은 종교적 지도자로서 뿐만 아니라 진평왕의 정치적 조언자이자 협력자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원광은 말년에 궁에서 강의를 하면서 지내다가 황룡사에서 입적하였다. 삼기산 금곡사에서 장사지냈는데, 그의 장례를 왕의 장례처럼 하였다고 하니, 당시 신라에서 원광의 위상이 매우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광 이후로는 그의 뒤를 이어 중국으로 공부하러 가는 자가 끊이지 않았다. 원광의 제자로 이름이 남아 있는 인물로는 원안이 있다. 원광은 『열반경』과 관련한 『여래장경사기(如來藏經私記)』 3권과 『여래장경소(如來藏經疏)』 1권과 같은 주석서를 저술했다고 한다. 이 저술은 비록 현재까지 전하지는 않지만 그가 여래장 사상에 대한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그가 신라에 알린 점찰법회는 이후 진표 등의 승려들에 의해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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