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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왕[元聖王]

신라 하대의 실질적인 개창자

미상 ~ 798년(원성왕 14)

원성왕 대표 이미지

경주 원성왕릉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원성왕은 신라 제38대 왕이다. 무열왕(武烈王)계 김주원(金周元)과의 왕위계승 경쟁에서 이기고 왕위에 올랐다. 이후 120여 년 간 신라의 왕위계승이 원성왕의 가계집단 내에서 이루어지면서, ‘원성왕계’를 형성했다. 뿐만 아니라 왕실가족에 의한 정치권력의 장악이라는 신라 하대 권력구조의 특징들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때문에 원성왕은 신라 하대의 실질적인 개창자로 평가받고 있다.

2 원성왕의 가계

원성왕의 성은 김(金), 이름은 경신(敬信, 敬愼), 시호는 원성(元聖)이다. 785년부터 798년까지 14년간 신라를 통치했다. 원성왕은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의 12세손으로, 아버지는 일길찬(一吉湌) 김효양(金孝讓)인데, 원성왕 즉위 후에 명덕대왕(明德大王)으로 추존되었다. 그리고 조부 김위문(金魏文)은 흥평대왕(興平大王)으로, 증조부 김의관(金義寬)은 신영대왕(神英大王)으로, 고조부 김법선(金法宣)은 현성대왕(玄聖大王)으로 각각 추존되었다. 어머니는 계오부인(繼烏夫人) 박씨(朴氏)로, 역시 원성왕 즉위 후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추존되었다. 왕비는 각간(角干) 김신술(金神述)의 딸이다. 원성왕은 왕비 김씨와의 사이에 김인겸(金仁謙), 김의영(金義英), 김예영(金禮英) 등을 두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이 외에 대룡부인(大龍夫人)과 소룡부인(小龍夫人)까지 총 5명의 자손이 있었다고 한다.

장남인 김인겸은 원성왕이 즉위 직후 왕태자로 삼았으나 791년(원성왕 7)에 사망하면서 혜충(惠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원성왕은 792년(원성왕 8)에 둘째 김의영을 태자에 봉했는데, 역시 2년 만에 사망하여 헌평(憲平)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다음해인 795년(원성왕 11) 정월, 원성왕은 셋째 김예영이 아닌 혜충태자의 아들 김준옹(金俊邕)을 태자로 삼았다. 김준옹은 원성왕 사후 왕위를 계승하여 제39대 소성왕(昭聖王)이 된다. 그리고 소성왕부터 제52대 효공왕(孝恭王)까지 신라의 왕위는 원성왕의 가계집단 내에서 계승하게 된다.

3 원성왕의 왕위계승 과정

원성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배경은 780년(혜공왕 16) 김지정(金志貞)의 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김지정은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포위하였다. 당시 상대등(上大等)이었던 김양상(金良相)이 이찬(伊湌) 김경신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진압했으나, 혜공왕(惠恭王)은 이미 반란군에게 살해된 후였다. 이에 김양상이 왕위에 올라 제37대 선덕왕(宣德王)이 되었고, 김경신은 반란 진압의 공을 인정받아 선덕왕 즉위 직후인 780년에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되었다.

그 후 선덕왕이 재위 6년 만에 긴 병을 앓다가 사망했으나,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의논한 끝에 선덕왕의 조카(族子)뻘 되는 김주원을 왕으로 세우기로 하였다. 당시 김경신은 상대등에 있었으나, 왕위계승 서열로는 김주원이 상재(上宰)이고 김경신이 이재(二宰)였다고 한다. 선덕왕이 사망했을 때 김주원은 서울의 북쪽 20리 되는 곳에 살고 있었는데, 때마침 내린 큰 비로 알천(북천)의 물이 불어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것을 하늘의 뜻이라 여겨, 새로이 김경신을 옹립하여 왕으로 세웠다. 『삼국유사』에는 이 북천의 홍수를 틈타 김경신이 먼저 궁에 들어가 왕위에 올랐다고 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선덕왕의 사후 김주원과 김경신 사이에 일종의 왕위계승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주원은 무열왕의 후손으로, 아버지부터 증조, 고조까지고위직을 역임한 집안이다. 특히 고조인 문왕(文王)은 무열왕의 셋째 아들로 삼국통일에 기여한 인물이다. 증조와 아버지도 시중(侍中)과 상대등을 역임했고, 김주원 역시 혜공왕 때 시중에 임명되는 등 강력한 정치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김경신의 집안은 조부인 김위문(金魏文)이 시중 관직을 역임하기는 했으나, 바로 다음 해에 물러났다. 그 외에는 낮은 관등을 갖고 있거나 관력이 확인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대신 무장사(鍪藏寺)라는 원찰을 경영한 것으로 보아 상당한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경제력은 김경신이 혜공왕 때 김양상과 관계를 맺으며 정치적으로 성장해가는 바탕이 되었다.

이후 선덕왕대에 걸쳐 김주원과 김경신은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다. 김주원은 정치적 배경을 앞세워 김경신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덕왕 사망 1년 전인 784년(선덕왕 5), 왕이 돌연 양위 의사를 밝혔다가, 신하들의 거듭된 만류로 철회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무열왕계의 압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양위의 대상 역시 무열왕계인 김주원으로 보인다. 이 일을 계기로 그동안 김주원 등 무열왕계의 득세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귀족들의 불만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김경신은 이러한 불만을 결집하고 지지세력으로 포섭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선덕왕이 사망하자, 왕위계승 서열이 앞섰던 김주원은 궁에 들어가 새 왕으로 즉위하고자 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그 이유가 정말로 알천의 홍수 때문일 수도 있지만, 김경신이 무력으로 김주원의 입궁을 저지했을 가능성도 높다. 이후 김경신은 김주원보다 먼저 궁에 들어가 왕위에 올랐다. 사람들이 모두 만세를 부르는 등 원성왕의 탄생을 인정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것이 비정상적인 왕위계승이었음은 분명하다. 때문에 이 사건은 훗날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金憲昌)이 아버지의 왕위계승 실패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4 집권체제의 강화

원성왕은 무열왕계 김주원과의 왕위계승 경쟁에서 승리하며 왕위에 올랐다. 이후 김주원은 명주(溟州, 강릉)로 물러나 중앙정치에서 은퇴했다. 그러나 무열왕계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거나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에 원성왕은 김주원을 명주군왕(溟州郡王)에 봉하고, 아들인 김종기(金宗基)를 시중으로 임명하는 등 무열왕계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회유책을 썼다.

그러나 동시에 무열왕계 세력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만파식적(萬波息笛) 설화이다. 만파식적은 원래 삼국통일 후 민심 통합과 나라의 안정이라는 신문왕의 염원이 담긴 것으로, 중대 전제왕권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런데 선조 때부터 전해지던 이 만파식적을 아버지인 김효양이 원성왕에게 전해주었다고 한다. 이로써 원성왕은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는 즉위 초부터 만파식적을 신문왕이 아닌 진평왕(眞平王)과 연결시켰다. 진평왕은 진지왕(眞智王)을 축출한 인물로, 진지왕은 신라 중대를 연 무열왕의 할아버지이자 무열왕계의 시조이다. 그러므로 만파식적을 진평왕과 연결시킨 것은 중대 무열왕계 왕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으로 이해할 할 수 있다.

원성왕은 중대적 질서를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세우는 것이 급선무였다. 원성왕은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4대조에 대한 추봉을 하고, 장남을 태자로 삼아 후계구도를 안정시켰다. 원성왕은 즉위 직후 일련의 조치를 통해,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질서의 수립을 선언했던 것이다. 이러한 원성왕의 정치는 제공(悌恭)의 난과 같은 저항에 부딪히기도 한다. 791년(원성왕 7) 1월, 태자 인겸의 사망 직후 제공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언승(金彦昇, 헌덕왕憲德王)에 의해 즉각 진압되었다. 이후 원성왕대에는 또 다시 반란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원성왕은 태자 인겸이 죽자, 동생인 의영을 세우고, 의영이 죽자 다시 인겸의 아들인 준옹을 태자에 책봉하였다. 인겸과 의영 등은 원성왕의 즉위 과정에서도 활약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즉위 후에도 최측근에서 원성왕을 보좌했다. 또한 손자인 김준옹과 김언승은 당에 사신으로 다녀오거나 시중과 병부령(兵部令) 등에 임명됨으로써, 핵심 요직을 장악했다. 이처럼 원성왕은 자신의 직계를 중심으로 정치권력을 재편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해 나갔으며, 이후 이것은 신라 하대 정치권력의 한 특징이 되었다.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은 788년(원성왕 4)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의 제정으로도 나타났다. 독서삼품과는 말 그대로 독서(讀書) 즉, 유교경전을 읽은 정도에 따라 3개의 등급으로 나누고, 이들을 관직에 임명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학(國學)의 졸업시험 성격을 지닌 것으로, 관리 임용 시 참고로 삼는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국학의 기능을 강화하고, 유교적 이념에 입각한 정치를 실시하려는 원성왕의 의지를 확인할 수는 있다.

5 원성왕의 죽음과 역사적 의의

원성왕은 재위 14년만인 798년 12월 29일에 죽었다. 왕의 유언에 따라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을 했다. 왕의 능은 토함산 서쪽의 곡사(鵠寺)에 조성되었다. 뒤에 경문왕(景文王)이 꿈에서 원성왕을 만난 후, 곡사를 증축하고 왕의 명복을 빌도록 하였다. 그 이후 헌강왕(憲康王) 때 이 절의 이름을 대숭복사(大崇福寺)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석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비석은 남아있지 않고 비편만 발견되었다. 원성왕릉은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다.

『삼국사기』는 신라의 역사를 셋으로 구분하고 있다.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부터 진덕여왕(眞德女王)까지가 상대(上代), 무열왕부터 혜공왕까지가 중대(中代), 그리고 선덕왕부터 경순왕(敬順王)까지가 하대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연구자들은 실질적인 하대의 개창자로 원성왕을 주목하고 있다. 선덕왕은 무열왕계였던 중대 왕실과 달리, 내물왕의 후손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재위기간이 짧았고, 이후 선덕왕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어가지 못했다. 그러므로 김부식(金富軾)의 시대구분과는 달리, 오늘날의 역사학자들은 선덕왕대를 중대에서 하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평가하고 있다.

원성왕의 경우는 내물왕의 방계 후손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새롭게 ‘원성왕계’를 형성했다. 원성왕을 시작으로 제39대 소성왕(昭聖王)부터 제52대 효공왕(孝恭王)까지 120년이 넘는 시간동안 원성왕의 가계집단 내에서 왕위계승이 이루어진 것이다.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 때 완성된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에도 원성왕을 ‘열조(烈祖)’ 즉, 큰 공이 있는 선조로 표현하고 있다. 원성왕계에 의한 왕위계승이 이루어지면서, 원성왕은 후손들에 의해서도 실질적인 시조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신라 하대는 왕의 친족들이 주요 관직을 차지하며 정치를 주도하는데, 이러한 권력구조의 특징 역시 원성왕 때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원성왕은 신라 하대의 전범(典範)을 만든, 실질적인 개창자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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