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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측[圓測]

동아시아 유식학의 뛰어난 고승

613년(진평왕 35) ~ 696년(효소왕 5)

1 개요

원측(圓測)의 휘(諱)는 문아(文雅)이다. 15세에 당(唐)으로 유학가서 70여 년 머무르며 구유식과 신유식을 공부하였고, 여러 차례 번역 사업에 참여하며, 유식학(唯識學)의 대가로 명성을 떨쳤던 신라의 승려이다.

2 15세에 당으로 유학을 떠나다

원측의 휘는 문아이며 자는 원측이다. 신라 왕손이라고도 하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원측의 출신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모량부(牟梁部)의 익선(益宣) 아간(阿干)이 죽지랑(竹旨郞)의 낭도를 사사로이 부역시킨 사건으로 모량부가 탄압받게 되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모량부 사람은 관직에서 쫓겨나고 승복을 입지 못하게 하고 승려가 된 자라도 큰 절에 머무르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때 원측도 모량리 사람이었기 때문에 승직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따라서 원측은 신라 6부 중 하나인 모량부 출신으로 추측된다.

원측은 천성이 총명하고 지혜로워서 수천만 가지의 말을 들어도 마음 속으로 잊지 않을 만큼 뛰어났다. 그는 3세에 출가하였고, 627년에 15세 나이로 당으로 유학을 떠났다. 당에서 법상(法常)과 승변(僧辨) 밑에서 배우게 되는데, 법상과 승변은 모두 섭론종의 학승이었으므로 원측은 입당하자마자 구(舊)유식을 배웠던 것을 알 수 있다. 구유식이란 645년 인도 구법 여행 후 돌아온 현장에 의해 전개된 새로운 유식학에 대비한 표현으로, 진제(眞諦, 499~569)가 546년에 무착(無著)의 『섭대승론(攝大乘論)』을 번역함으로써 전해진 유식학(唯識學)을 말한다. 그리고 원측은 정관(貞觀) 연간에는 당 태종으로부터 도첩(度牒)을 받았다. 이후 수도 장안(長安)의 원법사(元法寺)에 머무르면서 비담‧성실‧구사‧비사와 관련된 여러 가지 불교 논서를 열람하며 교학 연구에 힘썼으며, 이러한 원측의 학업에 대한 명성이 알려지게 되었다.

3 현장을 만나, 신유식의 학풍을 익히다

원측의 사상적 전환은 현장(玄奬, 600~664)과의 만남이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현장은 원측이 당으로 유학 온 지 2년 뒤 인도로 구법을 떠났다가 645년, 17년 만에 인도로부터 돌아왔다. 이때 현장은 520권, 657부에 이르는 새로운 불교 경전을 많이 가지고 왔고, 국가적 차원에서 번역 사업이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불교 교학이 소개되었다. 특히 유식학과 관련하여 『성유식론(成唯識論)』과 함께 새로운 사상이 전해지게 되었다. 원측도 현장을 통해 『성유식론』과 여러 대승경론을 부촉받아 새로운 교학을 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원측이 현장의 강의를 들었던 것과 관련하여 『송고승전』에 흥미로운 기록이 남아 있다.

현장이 자은 규기에게 새로 번역된 신유식을 강의하자 원측이 수문장에게 뇌물을 주고 몰래 들었다. … 원측은 서명사에 종을 쳐 대중을 모아 유식을 강의했다. … 현장이 유가를 강의하려고 할 때 다시 몰래 듣고 받아들었으며 규기에 뒤지지 않았다.

원측과 중국 승려 규기(窺基, 632~682)와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던 것 같은 정황이 수록된 것이다. 그리고 원측이 현장의 강의를 몰래 들었다고 하여 원측의 행동에 정당성이 부족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이 이야기는 원측 생존 시 진짜 있었던 사실이라기보다는 이후 원측을 이은 사람들과 규기를 이은 사람들 사이에 유식학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뚜렷해지고, 경쟁과 갈등이 발생하면서 그러한 모습이 반영되어 가공된 이야기라고 파악하고 있다.

신유식이 전해짐에 따라 기존의 구유식과의 다른 점들을 둘러싸고 논쟁이 형성되었다. 원측도 『성유식론』에 대한 자기의 해석을 담은 『유식론소(唯識論疏)』를 지었고, 규기도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를 저술하였다. 후대에 이 논쟁적 상황을 구유식과 신유식, 진제와 현장, 일체개성과 오성각별과 같은 이분법적 구도에서 이해해 왔다. 그런 가운데 『송고승전』과 같은 일화로 투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만 위의 일화를 통해 원측이 현장으로부터 전해진 새로운 사상을 탐구하고자 하는 열의가 컸고, 더 나아가 자신의 견해를 사람들에게 알릴 만큼 영향력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

4 당에서의 활동을 이어가다

원측은 어학에 능통했다. 최치원은 원측이 6국에 통할 정도여서 실로 인도어에 능통하면서도 중국어도 잘 하였으며, 범어의 뜻을 출중하게 연구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또 인도에서 건너온 논사들과의 토론장에도 직접 참가하였으며 논리학인 인명(因明)에도 밝았다. 태종도 원측을 보배처럼 여겼을 뿐만 아니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원측을 마치 부처님 대하듯이 존중했다고 한다. 태종의 명으로 현장이 감독하여 656년에 창건한 서명사(西明寺)의 대덕(大德)에 임명되었던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원측은 671년부터 8년간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에서 머물렀으나, 측천무후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시기인 680년 전후하여, 불교경전 번역 사업에 적극 참여하였다. 불타파리(佛陀波利)는 『불정존승다라니경(佛頂尊勝陀羅尼經)』을 한역할 때 서명사로 찾아가 번경대덕(翻經大德)인 원측과 대교를 하였다고 한다. 또, 679년에 지바하라(地婆訶羅)가 인도의 여러 불경들을 가지고 와서 번역하게 되었을 때 원측은 증의(證義)를 담당하며 박진(薄塵)·영변(靈辨)·가상(嘉尙) 등과 함께 『대승현식경大乘顯識經』을 번역하는데 참여하였다. 『대승밀엄경』을 번역할 때는 우두머리 역할을 하였다. 만년인 693년에는 보리류지(菩提流志)가 가져온 범본 『보우경(寶雨經)』을 번역할 때 증의의 역할을 하였고, 695년 실차난타(實叉難陀)가 우전국(于闐國)으로부터 올 때 가져온 『화엄경』 번역 사업에 참여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입적하였다.

원측이 주로 담당하였던 증의는 범어로 된 원전을 한문으로 번역한 뒤, 번역한 내용이 본래 뜻과 다르지 않은지 최종적으로 검토하고 증명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따라서 어학에 밝으며, 불교 교학에 뛰어났던 원측이 증의의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한편, 서명사 대덕으로 초빙되어 지내며 『성유식론소』를 비롯한 많은 논서를 저술하였다. 한때 종남산 운제사로 물러나와 지내고 이후 더욱 한적한 곳에서 8년 동안 한거하기도 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의 요청으로 다시 서명사에 돌아와 『성유식론』을 강의하였다.

이러한 원측의 명성은 신라에도 전해졌고, 신라 신문왕(神文王)이 여러 차례 원측의 귀국을 요청하였으나 측천무후가 허락하지 않아 끝내 신라에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후 낙양에서 『신화엄경』을 번역하다가 끝마치지 못하고 불수기사에서 입적하였다.

5 원측 사상의 의미

원측의 저술은 『성유식론소』 10권 등 모두 23부 108권 가량이다. 그가 지은 유식 관련 소(疏), 초(鈔)와 자세하게 해설한 경론들이 널리 유행하였다. 그러나 원측의 저서가 거의 없어지고 다만 『반야심경찬(般若心經贊)』 1권,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 10권, 『인왕경소(仁王經疏)』 3권 등만이 전해지고 있다. 원측의 사상에는 유식과 중관 그리고 구유식과 신유식의 두 학파의 대립적인 입장을 폭넓게 포용 이해하여 뜻이 잘 나타나 있다. 원측이 모든 교설들이 결국에는 목적에 이르게 하는 도구인 방편(方便)으로 파악했던 인식과 통하는 점이다.

원측의 사상은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730년대에 서명사에서 수학한 담광(曇曠)이 원측의 『해심밀경소』를 돈황(敦煌)에 전했고, 그것이 뒤에 티벳어로 번역되었다. 또한 일본 나라시대 원측의 저술이 여러 차례 사경되었는데 예를 들면 『성유식론소』의 경우 30여회나 필사 되는 등 원측의 저술 총 9종류가 필사되었다. 이는 일본에서 원측 교학에 대한 관심이 깊었음을 반증한다.

원측의 제자인 신라 출신 승장(勝莊)은 그의 승탑을 건립하였으며,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서 불교경전 번역사업에 참여하였다. 한편 도증(道證)은 692년(효소왕 1)에 신라로 귀국하였는데, 7종의 유식학 관련 저술을 하였으니 원측의 사상이 신라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하겠다. 다만 도증의 저술은 현재까지 전하지는 않으며, 『성유식론요집(成唯識論要集)』의 단편이 규기 문도의 저술에서 비판적으로 인용되고 있다. 도증 이후에 도륜(道倫)과 태현(太賢)이 유식학 분야에서 이름을 떨쳤는데, 태현은 『성유식론학기(成唯識論學記)』에서 원측과 규기의 견해를 대등하게 인용하여 원측의 사상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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