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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元曉]

모든 것에 구애받지 않은 위대한 승려

617년(진평왕 39) ~ 686년(신문왕 6)

원효 대표 이미지

원효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개요

원효(元曉, 617~686)는 7세기에 활동한 신라 승려이다. 그는 여러 불교 경전을 두루 섭렵하여 큰 깨달음을 얻은 후, 불교 사상과 종파들의 치열한 대립을 일심(一心)으로 통합하는 화쟁(和諍)을 주장하였으며, 당시 지배층 중심의 불교를 대중화하는데 크게 기여하기도 한 위대한 종교가이자 사상가, 학자였다.

2 출생과 구도

원효(元曉)의 원래 성은 설씨(薛氏)이고 어릴 때 이름은 서당(誓幢)이었는데, 출가하여 원효라는 법명(法名)을 가지게 된다.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 아버지는 나마(奈麻)를 지낸 담날(談捺)이다. 그는 617년(진평왕 39) 지금의 경북 경산시 자인면 혹은 압량면 지역에 해당하는 압량군(押梁郡) 남쪽 불지촌(佛地村) 북쪽 밤골 사라수(娑羅樹)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설씨가 보통 6두품에 해당하는 귀족이었고, 그의 부친이 중앙귀족에게만 수여하는 경위 11등 관등인 나마를 소지했던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집안은 신라 왕경 경주와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효는 15세를 전후한 시기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는데, 특정한 스승 밑에서 경전을 배우지는 않았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불법을 공부하였다. 혜숙(惠宿), 혜공(惠空), 대안(大安), 낭지(朗智) 등 당시 유명한 신라 승려들과 교류하면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중생의 구제를 목표로 하던 대승불교적 성향을 보여준다. 또 고구려에서 망명해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북 전주시)에 와 있던 보덕(普德)을 스승으로 삼았다는 전승도 있으며, 시기적으로 봐서 자장(慈藏)에게 가르침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는 타고난 총명함을 바탕으로 스스로 불경을 공부하고 수행다가, 650년(진덕여왕 4) 보다 높은 수준에 도달하고자, 함께 불법에 정진하던 8살 연하의 동료 의상(義湘, 625~702)과 함께 당 유학길에 오른다. 그러나 요동에서 고구려군에 잡혀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후 661년(문무왕 1)에 두 사람은 다시 유학을 시도하는데, 도중에 밤이 되어 무덤 사이에서 잠을 청하게 되었다. 심한 갈증을 느껴 어둠 속에서 샘물을 손으로 떠 마셨는데, 물맛이 좋고 시원하였다. 하지만 날이 밝고 보니 그것은 해골에 고인 물이었고, 이를 알게 된 원효는 역해서 모두 토할 것 같았다. 이때 그는 홀연히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깨달음을 얻게 되고, 굳이 유학을 갈 필요가 없어져 의상과 헤어져 돌아온다.

그리고 스스로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중국 고승들이나 유학승들에 전혀 뒤지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능가하는 사상과 학문적 성취를 이루게 된다.

3 파계를 저지르고 얽매이지 않는 위대한 승려가 되다

하루 밤에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형식이나 계율에 얽매이지 않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 것으로 유명하다. 당 유학을 중단하고 돌아온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태종무열왕의 둘째 딸로 남편을 잃고 혼자 요석궁(瑤石宮)에 있던 공주와 함께 살고 아이를 낳은 파계를 저지르게 된다. 이때 낳은 아들이 이두(吏讀)를 정리하고 발전시킨 것으로 유명한 설총(薛聰)이다. 그 후 그는 승복을 벗고 자신을 소성거사(小性居士)라 부르며,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행동들은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불교의 깊은 이치를 깨닫고 그것을 널리 퍼트리고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연히 광대들이 굴리는 커다란 박[瓠]을 보고는, 그 모양을 본 딴 도구를 만들어 가지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춤추고 노래 불렀다. 그 노래는 『화엄경(華嚴經)』의 “일체 얽매이지 않는 사람은 한 번에 생사를 벗어난다.”는 구절에서 따온 무애가(無碍歌)로, 불교 교리를 쉽게 풀어 누구나 부를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사람들에게 그 노래를 가르쳐 부르게 하여, 누구나 부처님을 알고 쉽게 그 가르침을 따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파계 이후 그의 기행은 대중 속에 스며들어 그들과 함께 살면서 불법을 전하려 한 교화의 방편이었던 것이다. 원효는 고고한 고승의 모습을 포기하고 불교 대중화를 통해, 지배층 중심 불교에서 대중 불교로의 확산을 이룩한 위대한 종교가였던 것이다.

4 탁월한 학자이자 저술가

그렇다고 원효가 대중적인 불교만을 추구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일생동안 90부 200여 권에 달하는, 그야말로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 저술의 내용도 심오한 불교 사상을, 간결하지만 유려한 문체로 조리에 맞게 서술한 뛰어난 것이었다. 그래서 중국 승려들도 자주 인용하였고, 북송(北宋)의 찬녕(贊寧, 919~1001)은 『송고승전(宋高僧傳)』에서 “문단을 휘어잡았다[雄橫文陣]”고 평하기도 했다.

그의 저술 중에는 특히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등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 책들은 그의 불교 사상·철학을 잘 보여준다. 그의 사상 중 대표적인 것은 일심사상(一心思想)과 화쟁사상(和諍思想)이다. ‘일심’은 모든 것의 근원이자 실체인 참 마음으로, 원효는 인간의 심식(心識)을 깊이 통찰하여 본각(本覺)으로 돌아가는 것, 즉 일심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歸一心源]을 궁극의 목표로 설정하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일심이야말로 만물의 주추(主樞)이며, 일심의 세계를 불국토(佛國土) 극락으로 보았던 것이다.

‘화쟁’은 특정 종파나 경전에 집착하지 말고, 이들을 잘 모아 정리하고 조화롭게 통합하여, 하나의 참된 진리로서의 불교 사상 체계로 모을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불교 사상들은 그의 저술들을 통해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되었으며, 후대 한국 불교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원효는 불교 사상의 연구와 이해에 큰 두각을 나타낸 뛰어난 학승이면서, 동시에 지나치게 그에 얽매이지 않고 대중들이 그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실천한 행동가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것이 그가 위대한 승려로 칭송받는 이유일 것이다.

5 입적(入寂)과 그 이후

원효는 혈사(穴寺)에서 686년(신문왕 6) 7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이때 그의 아들 설총이 아버지의 유골을 빻아 소상을 조성하고 원효가 머물던 분황사(芬皇寺)에 모셨다고 한다. 설총이 예를 올리자 소상이 갑자기 돌아보았고, 그 이후로도 계속 돌아본 채로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사후에도 많은 존경을 받아, 고려 숙종대에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의 시호를 받기도 했다.

원효는 해외에도 널리 알려지고 존경을 받았다. 일본에도 그가 널리 알려졌고 추숭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그의 손자, 곧 설총의 아들 설중업(薛仲業)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일본의 황족이었던 오우미노 미후네[淡海眞人三船]가 그에게 시를 한 수 지어준 것이 남아 전하는데, 그 시의 서문에 “일찍이 원효거사가 지은 『금강삼매론(金剛三昧論)』을 읽고 그 사람을 만나보지 못한 것을 깊이 한탄하였는데, 신라국의 사신 설판관이 곧 거사의 손자라는 것을 듣고, 비록 그 할아버지를 만나보지 못하였어도 그 손자를 만난 것을 기뻐하여서 이에 시를 지어 드린다.”고 적혀 있다.

한편 설중업은 일본에서 돌아온 뒤, 원효를 추모하기 위해 애장왕대(哀莊王代, 800~808)에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김언승(金彦昇, 헌덕왕)의 후원을 받아 고선사(高仙寺)에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 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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