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위덕왕

위덕왕[威德王]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한 번 중흥을 꿈꾸다

525년(성왕 3) ~ 598년(위덕왕 45)

위덕왕 대표 이미지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위덕왕(威德王)은 백제의 제27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54년~598년이다. 관산성 전투의 패배와 성왕(聖王)의 죽음이라는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즉위해 집권 초기에는 왕권이 매우 약했다. 그러나 부왕의 정책과 권위를 계승하고, 외교적 노력을 통해 국내외의 혼란을 수습하면서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이로써 백제는 다시 한 번 중흥을 꿈꾸게 되었다.

2 태자시절의 활동과 즉위 과정

위덕왕의 이름은 창(昌)이다. 이름을 따서 창왕(昌王)이라고도 하며, 시호는 위덕(威德)이다. 525년(성왕 3) 성왕의 맏아들로 태어났고, 동생은 뒤이어 즉위한 혜왕(惠王)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위덕왕의 자식에 대해 전하는 바가 없으나, 부여 왕흥사지(王興寺址)에서 발견된 청동 사리함의 명문에는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사찰을 세웠다”고 하여 일찍 사망한 아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위덕왕의 아들로 아좌태자(阿佐太子)가 기록되어 있다. 아좌태자는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스승으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화인 ‘쇼토쿠 태자와 두 왕자상’을 그렸다고 한다. 위덕왕은 554년부터 598년 사망까지 45년간 백제를 다스렸다.

위덕왕은 태자 시절부터 성왕을 도와 군사활동에 나섰다. 그 구체적인 활약상을 성왕 말기의 전쟁에서 확인할 수 있다. 553년(성왕 31) 태자 여창은 나라 안의 병사를 모두 징발하여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 당시 29세의 젊은 태자는 백합야(白合野)에서 고구려군을 크게 물리침으로써, 성공적으로 고구려전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신라에 대한 보복 공격도 위덕왕이 주도했다. 당시 백제는 신라와 함께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회복했으나, 진흥왕의 배신으로 신라에게 다시 빼앗긴 상황이었다. 태자 여창은 기로(耆老, 원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라를 공격하여 관산성(管山城)에 보루를 쌓고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때 성왕은 아들의 노고를 위로하러 가다가 도중에 복병을 만나 죽음을 맞고 만다. 이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는 성왕의 전사를 비롯해서 2만 9천 6백 명에 이르는 군사적 피해를 입었다. 위덕왕도 장수 몇 명과 함께 겨우 탈출하여 돌아왔다. 이처럼 위덕왕은 관산성 전투의 참패라는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왕위에 오르게 된다.

3 위덕왕 초기의 왕권 강화 노력

원로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일으킨 관산성 전투가 왕의 죽음까지 초래한 참패로 끝나자, 위덕왕은 패전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일본서기』에는 성왕이 죽은지 3년 만에 위덕왕이 즉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발견된 ‘백제 창왕명 석조사리감(百濟 昌王銘 石造舍利龕)’의 명문을 통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그것은 『일본서기』의 찬자가 위덕왕 즉위 초 백제의 혼란상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 서술로도 볼 수 있다.

위덕왕은 성왕의 위상을 이용해 정국의 혼란을 수습하고자 했다. 먼저 관산성 전투의 패배에 대한 설욕으로 패전 직후인 554년(위덕왕 원년) 9월 신라의 진성(珍城)을 공격했고, 561년(위덕왕 8)에도 신라의 변경을 공격했다. 두 전쟁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부왕에 대한 복수의 의지를 보여주는 효과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위덕왕은 즉위 2년만인 555년에 신하들에게 출가수도의 뜻을 밝힌다. 명목상으로는 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였지만, 실제로는 패전의 책임이 덧씌워진 불리한 정국을 돌파하기 위한 정치적 승부수였다. 신하들의 만류로 위덕왕은 출가 대신 100명의 도승(度僧. 왕의 허가를 받고 출가함)을 허락하고, 공덕재를 베푸는 선에서 일정한 타협을 보았다. 이 타협은 혼란스러웠던 즉위 초의 정국을 수습하기 위한 발판이 되었다.

위덕왕은 이제 본격적으로 성왕에 대한 추복 사업에 나서게 된다. 신라에서 송환된 성왕의 유해를 빈소에 모셔놓고, 부여 능산리 일대에 왕릉 묘역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이 일대에 국가적 규모로 능사(陵寺)를 창건하였다. ‘백제 창왕명 석조사리감(百濟 昌王銘 石造舍利龕)’의 명문에 의하면, 567년(위덕왕 13)에 위덕왕의 여동생인 공주가 만들어 사리와 함께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대규모의 능사가 공주 한명의 발원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위덕왕을 위시해서 동생인 혜왕, 공주까지 성왕계 왕족들이 주도적으로 건립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처럼 위덕왕은 능사 창건을 통해 성왕의 권위와 유업을 계승하고자 했다. 그리고 능사의 완공은 집권 초의 혼란을 극복하고 다시 왕권 강화를 추진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었음을 의미한다.

4 위덕왕대의 대외관계

위덕왕 집권 초기의 왕권 강화가 성왕에 대한 추복사업을 통해 이루어졌다면, 그 이후의 과정은 대외관계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 위덕왕조는 567년(위덕왕 14)을 기점으로 그 이후는 거의 중국과의 대외 교섭 기사로 채워져 있다. 당시 중국은 남북조 말기에서 수(隋)에 의한 통일까지 정세의 변동이 극심한 시기였다. 위덕왕은 남조에 편중했던 기존의 대중국 관계에서 벗어나 남조와 북조는 물론, 통일 왕조인 수와도 적극적인 외교관계를 맺어, 백제 역사상 중국과 가장 활발한 외교관계를 맺었던 시기를 이루었다.

위덕왕은 남조의 진(陳)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기존의 남조와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570년(위덕왕 17)부터 572년(위덕왕 19)까지 매년 북제(北齊)와 책봉·조공 관계를 가졌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 가운데 575년(위덕왕 22)에는 왜에도 사신을 보냈는데, 이는 555년(위덕왕 2)에 동생인 혜(惠)를 파견한지 20여 년 만의 일이었다. 이렇게 백제는 중국 남북조와 왜와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다시 국제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577년(위덕왕 24)에 이르면 백제의 외교는 더욱 다변화된다. 남조의 진에 사신을 보낸데 이어, 북제를 평정한 북주(北周)에도 사신을 보냈다. 이와 동시에 왜에 불상과 불경의 전달, 승려와 기술자 파견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왜와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진다. 그러면서 이 시기 신라에 대한 백제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는데, 대외관계의 목적이 관산성 전투 패전에 대한 복수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신라 공격을 위해서는 고구려의 동향 또한 중요했다. 이에 백제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새로운 외교전을 전개하는데, 수에 대한 외교가 바로 그것이다. 남쪽의 진과의 관계를 지속하면서도, 북쪽에서 수가 건국되자 백제는 가장 먼저 축하 사절을 보냈다. 그리고 수가 중원을 통일하자 외교관계를 더욱 강화했다. 수와의 외교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598년(위덕왕 45) 수가 고구려를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군도(軍道), 즉 군사의 길잡이가 되겠다고 자청한 사건이다. 결과적으로는 이 사실을 안 고구려의 공격을 받게 되지만, 백제의 대중국 외교의 목적이 고구려 견제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고구려 견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라에 대한 적극적 공세를 전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처럼 위덕왕은 다변화된 대외관계를 통해 백제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데 주력했다. 그리고 대신라 보복을 위해 국제관계를 이용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이로써 백제는 국내외적으로 다시 한 번 중흥의 기회를 노리게 된다.

5 위덕왕과 능사(부여 능산리사지)

위덕왕은 즉위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왕권을 강화해나가는 과정에서 부왕에 대한 추복사업을 추진했다. 부왕인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부여 능산리 왕릉 묘역에 일종의 원찰(願刹)인 능사를 건설한 것이다. 능사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된 백제의 전형적인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그 외에 회랑과 공방시설, 사찰로 진입하는 도로, 수로·우물·수조 등 다양한 시설도 확인되었다.

이 중 1993년의 발굴조사에서 서회랑 북쪽 공방시설의 중앙칸에서 구덩이가 확인되었다. 이것은 공방의 물을 저장하던 목조수조로 추정되는데, 이 구덩이 속에서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 국보 제287호)를 비롯한 각종 금동제품, 칠기편, 옥제품 등이 출토되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봉황 모양의 뚜껑 장식, 봉래산이 양각된 뚜껑, 연꽃잎으로 장식된 몸통, 용받침의 4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중국 한(漢)대 이후의 박산향로의 전통을 이어받았지만, 봉래산이 매우 사실적이고 입체적으로 표현된 점에서 백제의 고유성을 확인할 수 있다. 백제 창왕명 석조사리감이 발견된 지점과 불과 20m 거리에 있어서, 향로의 제작연대 역시 위덕왕대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당대의 뛰어난 공예와 제작기술 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사상적 복합성까지 보이고 있어 종교와 사상까지도 짐작할 수 있는 자료이다.

1995년의 발굴조사에서는 목탑지 심초석 하부에서 백제 창왕명 석조사리감(국보 제288호)이 발견되었다. 사리감의 명문을 통해 능사가 백제 창왕 13년(567)에 왕실의 주도로 조영되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이 유물은 백제의 사리장엄과 매납, 공양물에 대해 알려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사리 공양은 지배층의 정치력을 확보하기 위해 황실 주도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능사 역시 위덕왕이 초기의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사리공양을 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능사는 위덕왕의 왕권 강화 과정에서 조영된 사찰이었다. 사비시기 내내 왕실의 원찰로서 기능했을 것으로 보이며, 660년 백제의 멸망과 함께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