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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파소[乙巴素]

나라를 안정시킨 명재상

미상 ~ 203년(산상왕 7)

을파소 대표 이미지

삼국사기 을파소 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을파소(乙巴素)는 고구려 9대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위 179~197)과 10대 산상왕(山上王, 재위 197~227) 시대에 걸쳐 고구려의 국상(國相)을 지낸 인물이다. 고구려 왕권의 지지 아래 국정과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에 공을 세웠다.

2 고국천왕 시대 고구려의 정치 상황

고국천왕은 고구려 9대 왕으로서 179년 즉위하였다. 고국천왕은 고구려가 이후 역사에서 발전을 구가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하였던 왕이라 평가받는다. 곧 고국천왕 시대는 안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고 밖으로는 중국 세력의 압박을 극복하며, 3세기부터 시작되는 고구려의 비상을 준비하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고국천왕의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는 나라 안팎으로 많은 위기와 내홍을 겪기도 하였다. 일례로 고국천왕 6년(184)에 고구려는 중국 후한(後漢) 요동태수(遼東太守) 군대의 침공을 받았는데, 이 전투에서 고국천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 적을 물리쳤다고 전한다. 이처럼 당시까지 고구려 서방으로는 중국 세력의 위협이 상존하고 있었다.

한편, 당시까지 고구려는 왕을 배출하였던 계루부(桂婁部) 왕실과 함께 4부(部)가 지배 세력으로서 군림하고 있었다. 이를 이른바 고구려 5부(五部)라고 하는데, 당시 고구려의 정치 운영은 이 5부의 역학 관계 속에서 전개되었다. 이런 점에서 고구려의 왕권 강화 과정은 곧 계루부 왕실과 4부의 갈등의 역사이기도 했다. 특히 고국천왕 12년(190)에는 이러한 갈등이 더욱 첨예화되어 반란 사건으로 터져 나오게 되었다.

당시 고구려 정계의 실력자였던 중외대부(中畏大夫) 패자(沛者) 어비류(於畀留)와 평자(評者) 좌가려(左可慮) 등은 모두 왕후의 친척으로서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자제들은 집안의 권세를 믿고 무례하고 거만하게 행동하며, 타인의 자녀를 노략질하고 가옥과 땅을 빼앗는 등의 악행을 일삼았다. 이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그들을 원망하며 크게 분통해 하였고, 결국 일이 고국천왕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고국천왕은 이들의 악행을 듣고 불같이 화를 내며 죽이려 하였는데, 그러자 좌가려 등이 고구려 5부 중 하나였던 연나부(椽那部)와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다. 곧 반란군이 왕도를 공격하자 고국천왕은 기내(畿內)의 병력을 동원하여 반란을 평정하였고, 이로써 고구려 왕권은 간신히 위기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반란을 도모하였던 이들은 왕후의 친척이었고, 또 여기에 당시 고구려의 주요 지배 세력 중 하나였던 연나부(椽那部)가 가담하였던 만큼, 반란이 평정되고 나서도 그 후유증과 상처는 크게 남아 있었다.

3 을파소, 국상(國相)에 오르다

이처럼 고구려의 혼란한 정치 상황을 타개하고자 고국천왕은 4부(部)로 하여금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현명하고 어진 인재를 천거하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4부(部)가 의견을 모아 동부(東部)의 안류(晏留)라는 인물을 천거하였다. 이에 고국천왕이 안류를 불러 국정을 맡기려 하였는데, 안류는 본인이 능력이 부족함을 이유로 사양하고 대신 서압록곡(西鴨淥谷) 좌물촌(左勿村)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을파소(乙巴素)라는 인물을 천거하였다. 안류는 을파소에 대해 고구려 2대 유리명왕(瑠璃明王) 시대에 활약하였던 대신(大臣) 을소(乙素)의 후손이라고 소개하며, 그는 성품이 굳세고 의지가 강하며 지혜와 사려가 깊다고 평하였다. 바로 이때 처음 고구려 정계가 을파소를 주목하게 된다.

곧 고국천왕은 을파소에게 사자를 보내 정중히 예를 갖추어 그를 초빙하였고, 그에게 중외대부의 관직과 우태(于台)의 관등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을파소는 고국천왕의 바람대로 자신이 국사를 맡아 고구려의 혼란한 정치 상황을 타개하기에는 내려준 관직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신은 둔하고 느려서 엄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원하건대 대왕께서는 어질고 착한 사람을 뽑아 높은 관직을 주어서 대업을 이루소서.”라고 말하며 고국천왕이 내려준 관직을 사양하였다. 그러자 고국천왕은 을파소의 심중을 읽고 그를 당시 고구려 최고 관직인 국상(國相)에 임명하고 정사를 맡겼다. 이는 곧 을파소를 국상으로 임명하여 그가 왕을 보좌하며 부(部)를 초월하여 국정을 총괄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왕후의 친척들이 연루된 반란에 왕후의 출신 부인 연나부(椽那部)까지 가세하면서 큰 내홍을 치렀던 고국천왕은 부(部)의 귀족 출신이 아닌 을파소의 등용을 통해 국가의 기반을 정비하고 여러 부 세력에 대한 왕실의 통제력을 크게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국상으로 등용하여 당시 막강하였던 여러 부(部)의 귀족 집단을 견제하며 왕권 강화를 꾀하였다.

당시 을파소에게 내려진 ‘국상’이라는 관직과 관련하여서는 학계에 여러 견해가 제출되어 있지만, 대체로 제가회의(諸加會議)의 의장이자 왕 아래 고구려 지배층을 대표하는 최고 관직으로 이해되고 있다. 여기서 제가회의란 당시 고구려 최고위 지배층이었던 각 부의 대가(大加) 집단이 참여하는 정치회의였으며, 여기서 국가의 중대사가 논의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곧 국상은 이러한 고구려 초기 최고 정치 회의의 의장과도 같았는데, 3세기에 편찬된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조에서는 ‘상가(相加)’라는 명칭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서압록곡 좌물촌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을파소는 이렇게 고국천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당시 고구려의 최고위 관직에 오르게 되었고, 한 나라의 재상으로서 국정운영 전반을 관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4 왕권의 지지 속에 펼친 선정

이처럼 을파소가 하루아침에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자 당연히 이를 못마땅해하는 세력도 많았다. 특히 그는 5부를 중심으로 한 당시 고구려 지배 집단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존 정치적 기득권층이라 할 수 있는 5부 출신 귀족들의 시기와 견제를 받아야만 했다.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조정의 기존 신료들과 왕실의 친척들은 “을파소가 신진 관료로서 옛 신하들을 이간한다고 여겨 그를 미워하였다.”고 전한다. 이를 통해 당시 새롭게 국상으로 등용된 을파소가 기존의 5부 출신 귀족 집단을 견제하며 그들의 정치적 기득권을 약화시키는 조치를 취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을파소의 이러한 조치에 기존의 권력 집단은 크게 반발하였고, 이에 따라 을파소의 정치적 명운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자 고국천왕은 다시 교서를 내려 “귀천을 막론하고 국상을 따르지 않는 자는 멸족시키겠다.”는 엄명을 내리게 된다. 을파소는 이러한 고국천왕의 두터운 신임과 지지에 감명을 받아 더 이상 은둔할 생각을 하지 않고 정성으로 국정을 돌보았는데, 그의 정치에 대해 관련 기록에서는 “지극한 정성으로 나라를 받들며 정교(政敎)를 밝게 하고 상과 벌을 신중하게 하니, 인민이 편안하고 나라의 안과 밖이 무사하였다.”고 평하고 있다. 즉 을파소는 신분의 고하에 기준을 두지 않는 공명정대한 상벌 조치를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하였고, 이에 따라 기존 권력 집단을 견제하며 왕권을 보좌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히 고국천왕의 왕권 또한 강화되었다.

이처럼 을파소가 충심으로 국정 운영에 진력을 다하자 이를 본 고국천왕은 크게 만족하였는데, 을파소를 조정에 추천한 안류의 공 또한 높이 치하하며 그에게 대사자(大使者) 관등을 내려줄 정도였다. 그리고 훗날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金富軾)은 이러한 고국천왕과 을파소의 역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논하여 말한다. 옛날 명철한 임금은 어진 이에 대해 그를 등용함에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그를 등용하면 의심하지 않았다. 은(殷)의 고종(高宗)이 부열(傅說), 촉(蜀)의 선주(先主)가 공명(孔明), 진(秦)의 부견(符堅)이 왕맹(王猛)을 대한 것이 그와 같다. 그런 후에야 어진 이가 작위에 앉고 능력이 있는 이가 관직을 맡아 정치와 가르침이 밝게 닦이고 국가를 보위할 수 있다. 지금 왕이 결연히 홀로 결단하여 을파소를 바닷가에서 선발하여 여러 사람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백관의 위에 앉히고, 또한 천거한 자에게도 상을 내렸으니 선왕의 방법을 터득하였다고 할 만하다.

즉 김부식은 고국천왕이 을파소를 등용한 것을 유비가 제갈공명을 얻었던 옛 고사와 비교하며, 어진 이를 등용한 다음 그를 의심하지 않고 끝까지 지지해주었던 점과 을파소를 천거한 안류에게까지 상을 내렸던 일을 높이 사고 있다. 고국천왕와 을파소의 관계는 곧 성군과 명재상의 관계를 그대로 재현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한편, 이렇게 을파소가 국상으로 등용된 이후 고구려의 정치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당시 고구려에는 여러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백성들이 굶주리는 일이 잦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조정은 나라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또 한 번은 고국천왕이 질양(質陽)이란 곳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품팔이를 하며 어머니를 봉양하는 백성을 만나 그의 고충을 듣게 되었다. 즉 그 백성은 한 해 농사가 흉년이 들어 품팔이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고국천왕은 담당 관청에 명하여 홀아비·과부·고아·홀로 사는 노인·병들고 가난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 등 고난에 빠진 백성들을 널리 찾아 구제하여 먹여 살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담당 관청에 명하여 매년 봄 3월부터 가을 7월까지는 관(官)의 곡식을 내어 백성 가구(家口)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등이 있게 식량을 주어 빌려주게 하고 겨울 10월에 이르러 갚게 하는 제도를 마련하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일종의 빈민 구제책으로서 나라에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는 환곡 제도인데, 고구려의 ‘진대법(賑貸法)’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처럼 고국천왕과 을파소의 노력 속에 나라가 점차 안정을 찾아가게 되자, 오히려 중국으로부터 난리를 피해 고구려로 투항해오는 사람이 많아질 정도로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도 높아져 갔다. 이후 197년에 고국천왕이 죽고 산상왕(山上王)이 즉위하였는데, 산상왕 시대에도 을파소는 국상으로 있으면서 왕을 보좌하며 국정운영 전반을 보살폈다. 그리고 산상왕 7년(203) 국상 을파소가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이를 슬퍼하며 통곡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을파소는 국상으로서 고국천왕과 산상왕 두 왕을 섬기며 고구려 사회의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 질서를 세우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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