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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義慈王]

700년 백제 역사의 막이 내리다

미상 ~ 660년(의자왕 20)

의자왕 대표 이미지

삼국사기 의자왕 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의자왕(義慈王)은 백제의 제31대 왕이자 마지막 왕으로 재위 기간은 641년~660년이다. 집권 후 15년까지는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정국을 이끌었다.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당과 거리를 두면서,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집권 15년을 지나면서 여색과 향락에 빠져 충신을 멀리하고, 대외관계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면서 망국의 왕으로 기억되었다.

2 의자왕의 가계와 즉위과정

의자왕의 성은 부여(扶餘), 이름은 의자(義慈)이다. 제30대 무왕(武王)의 장자로 태어났다. 어머니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서동설화와 미륵사 사리봉안기의 기록을 통해 선화공주 혹은 사택적덕의 딸로 추정하는 견해가 많다. 왕비에 대한 기록 역시 전하지 않는다. 다만 657년(의자왕 17)에 왕의 서자 41명에게 좌평을 제수하고 식읍을 내렸다고 하므로, 여러 명의 부인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자식으로는 태자로 책봉되었던 융(隆)과 효(孝), 그리고 태(泰)·연(演)·풍(豐)·궁(躬)·충승(忠勝)·충지(忠志) 등이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641년(무왕 42) 무왕이 죽자 왕위에 올라 660년(의자왕 20)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20년간 백제를 통치했다. 나라가 망했기 때문에 시호는 없다.

선왕인 무왕은 재위 기간 내내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무왕은 집권 후반기인 632년(무왕 33)에 맏아들인 의자를 태자에 책봉했다. 왕위계승에 대한 귀족들의 간섭을 배제하고 후계구도를 명확히 한 것이다. 이로써 의자왕은 정치적으로 좀 더 안정된 기반 위에서 즉위할 수 있게 되었다.

의자왕이 태자에 책봉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무왕의 장자라는 정통성에 있었다. 그러나 그 외에 자신의 능력과 자질도 무시할 수 없다. 즉위 이전 의자왕은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당시 사람들이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일컬을 정도였다. 증자는 공자의 제자들 중에서도 효로 유명한 사람이다. 의자가 효와 우애를 중시했다는 것은 왕위계승 과정에서 발생할지 모르는 반발을 막고 왕족들 간의 유대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와 같은 노력 덕분에 의자는 왕족과 귀족들, 나아가 백성들로부터도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무왕이 사망하자, 의자는 순조롭게 왕위를 계승했고, 즉위 초부터 안정적으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3 의자왕대 전기의 정치 상황

의자왕대의 정치는 크게 둘로 구분한다. 먼저 전기는 즉위부터 655(의자왕 15)년까지로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면서 효과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 의자왕의 왕권은 무왕대보다 더 강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정통성을 갖춘 왕위계승 덕분에 의자왕은 무왕의 정치적 유산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하지만 의자왕으로서는 자신만의 세력기반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642년(의자왕 2) 1월에 대규모 숙청작업을 단행하였다. 숙청의 계기가 된 것은 국주모(國主母) 즉, 의자왕의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그 직후 의자왕은 배다른 동생의 아들인 교기(翹岐)와 교기의 이모 4명, 내좌평(內佐平) 기미(岐味), 명망 있는 사람 40여명을 섬으로 추방했다. 배다른 형제와 그 가족, 그리고 배후세력을 한 번에 제거함으로써 왕권강화의 전기로 삼은 것이다.

이후 의자왕은 본격적으로 왕권강화 작업을 추진한다. 같은 해 2월에 지방의 주(州)·군(郡)을 순행하며 백성들을 위무하고 사면조치를 취했다. 7월에는 신라의 미후성(獼猴城)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8월에는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 신라의 대야성(大耶城, 경상남도 합천)을 함락시켜 김춘추(金春秋)의 딸과 사위였던 성주 김품석(金品釋)을 죽이고 신라의 수도를 턱밑에서 위협하게 되었다. 이처럼 대내외적으로 권력 기반을 강화한 의자왕은 644년(의자왕 4)에 부여융(扶餘隆)을 태자에 책봉함으로써 일찌감치 후계구도를 확립시켰다. 교기로 대표되는 방계 왕족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직계를 정치의 전면에 내세우게 된 것이다.

의자왕대는 대외관계에서도 전환점을 맞는다. 642년 겨울, 신라는 대야성 전투의 패배를 갚기 위해 고구려에 군사를 요청한다. 그러나 당시 집권자였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죽령 이북의 땅을 요구하며 신라의 청병을 거부한다. 그러자 의자왕은 643년(의자왕 3) 고구려와 함께 신라의 당항성(黨項城)을 공격하려다 선덕여왕(善德女王)이 당에 구원을 요청한 사실을 알고 그만두기에 이른다. 이로써 한성 함락 이후 이어졌던 고구려와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여제동맹(麗濟同盟)을 형성하게 된다.

의자왕은 즉위 초 매년 당에 사신을 보냈고 당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이에 협조하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그러나 당이 고구려 정벌에 나서자, 오히려 당을 원조하던 신라를 공격해 7개성을 빼앗아버렸다. 이후로는 당에 사신 파견을 중단하고 독자적인 외교를 추진하며 고구려와 더욱 가까워졌다. 이에 위기를 느낀 신라는 648년(진덕여왕 2, 의자왕 8) 김춘추(金春秋)를 당에 보내 백제 공격을 요청했고, 당이 이를 허락하였다. 이로써 당의 공격 목표는 고구려에서 백제로 바뀌었다. 백제는 651년(의자왕 11)과 652년에 일시적으로 대당 외교를 재개하여 당과 신라의 차단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이후로는 당과의 외교를 완전히 단절하였다. 이로써 국제관계는 점차 ‘백제·고구려 대 신라·당’의 대결구도가 명확해져 갔다.

4 의자왕대 후기의 정치 상황

의자왕대 후기는 655년부터 660년(의자왕 20) 백제 멸망까지이다. 이 시기 의자왕은 자신감이 지나쳐 자신의 뜻대로 왕권을 행사했다. 또한 왕비인 군대부인 은고(郡大夫人 恩古)를 지나치게 총애하여 충신의 간언을 듣지 않고 사치와 향락에 빠지기도 했다. 은고는 요부(妖婦) 또는 요녀(妖女)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정치를 좌지우지하여 백제가 “스스로 망했다”라는 평가까지 이끌어낸 인물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국의 불안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전까지 정치를 주도하던 좌평(佐平) 세력들은 대거 축출되었다. 의자왕에게 주색의 금지를 간언하다가 하옥된 성충(成忠)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대신 의자왕은 왕서자(王庶子) 41명을 좌평에 임명하고 이들에게 식읍을 내리는 조치를 취한다(657년, 의자왕 17). 이로써 6명이었던 좌평의 정원제가 철폐되고, 왕족이 정치의 전면에 재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달솔(達率)의 관등을 가진 세력들이 정치적으로 성장해 좌평을 대신하는 등 정치세력의 교체가 이루어졌다. 이와 더불어 태자가 부여융에서 부여효(扶餘孝)로 바뀌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이 또한 정치세력의 교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정치적 파행으로 백제는 급변하는 대외관계에도 기민하게 대처할 수 없었다. 당과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하려는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있었지만, 의자왕은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전쟁을 예견한 성충이 죽음에 이르러 그 대책을 올렸지만 의자왕은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이후 백제에서는 백제의 멸망을 암시하는 징조들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여우가 궁궐로 들어와 상좌평(上佐平)의 책상 위에 앉는다거나, 서울의 우물물이 핏빛으로 변하고, 사찰에 벼락이 떨어졌다. 급기야 귀신이 궁궐 안으로 들어와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고 외치고 땅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생겼다. 이때 땅속에서 글귀가 나왔는데, 의자왕은 이것을 백제 쇠망의 징조로 해석한 무당을 죽이고 반대로 해석한 사람의 말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이처럼 의자왕 말기의 백제는 내부적으로 무너지며 마지막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5 사비성 함락과 백제의 멸망

660년(의자왕 20) 3월, 당 고종(高宗)은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수군과 육군 1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게 하고, 무열왕(武烈王)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신라군을 거느리고 당군과 합세하도록 했다. 6월 21일, 무열왕은 태자 김법민(金法敏, 후의 문무왕)을 보내 서해의 덕물도(德物島)에서 소정방의 군대를 맞이했다. 이때 소정방은 7월 10일에 신라군과 사비성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김법민이 신라 조정에 이를 전하자 무열왕은 김법민과 김유신(金庾信) 등에게 군사 5만을 주어 백제로 출발시켰다.

신라와 당군의 출병 소식을 들은 의자왕은 신하들과 대책을 논의했지만, 어느 쪽과 먼저 싸워야 할지 의견이 엇갈렸다. 이때 유배 중이던 좌평 흥수(興首)에게 조언을 구하니, 흥수는 이전에 성충이 간언한대로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을 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답하였다. 하지만 신하들은 흥수의 충정을 의심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 당과 신라군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

의자왕은 계백(階伯)에게 결사대 5천을 이끌고 신라군에 맞서도록 했다. 7월 9일, 계백은 황산(黃山)의 벌판에서 먼저 진을 치고 김유신의 군대를 맞았다. 여기에서 4차례를 싸워 백제군이 모두 승리했다. 신라는 반굴(盤屈)과 관창(官昌)을 적진에 보내 싸우다가 전사하게 함으로써 군의 사기를 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백제군을 물리치고 사비성으로 향했다. 같은 날 소정방과 김인문(金仁問)의 군대 역시 기벌포(伎伐浦)에서 백제군을 크게 이기고 사비성으로 향했다.

당군은 약속한 7월 10일에 사비성 밖 30리 지점에 도착해 신라군을 기다렸다. 이때 백제는 병력을 총동원해 당군에 맞섰지만 패하여 죽은 사람이 1만 명에 달했다. 신라군은 황산벌에서의 격전으로 시간이 지체되어 하루 늦은 11일에 도착했다. 나당 연합군은 다음날 사비도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준비했다. 의자왕은 당 군영에 최고위 관료와 왕자들을 보내 사죄하고 회군을 빌었지만 실패했다. 13일, 두 나라의 군대가 성으로 육박하자 의자왕은 태자 효와 함께 웅진성(熊津城)으로 달아났다. 그러자 사비성에 남아있던 둘째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전쟁을 주도했다. 하지만 왕자들 사이에서도 내분이 일어나 태자 효의 아들 문사(文思)와 왕자 부여융이 측근들을 거느리고 성 밖으로 나가 당에 항복했다. 이후 백성들의 항복이 뒤따랐고, 당군은 그대로 사비성을 함락시켰다.

의자왕은 웅진성에서 후일을 도모했다. 그러나 웅진 방어 책임자였던 예식진(禰寔進)의 배신으로 사비성의 소정방 앞으로 나가 항복하게 되었다.(7월 18일). 7월 29일 무열왕이 사비성에 도착하고, 8월 2일에 항복식 겸 축하연이 거행되었다. 의자왕은 김유신과 소정방, 김유신 등에게 술을 따라 올리는 굴욕을 당했다. 이로써 백제는 멸망했고, 의자왕을 비롯한 태자 효, 왕자 태·융·연(演) 및 대신과 장사 88명, 백성 12,807명은 당의 수도 낙양(洛陽)으로 압송되었다.

의자왕은 낙양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낙양에 있는 오(吳)와 진(陳)의 마지막 왕인 손호(孫皓)와 진숙보(陳叔寶)의 무덤 곁에 의자왕을 묻고 비석도 세웠다고 하나 현재까지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는다. 2000년 충청남도 부여군은 의자왕과 부여융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능산리고분군 내에 가묘(假墓)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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