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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張保皐]

세계의 바다를 누비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미상 ~ 846년(문성왕 8)

장보고 대표 이미지

장보고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개요

장보고(張保皐, ?~846)는 9세기 전반에 활동한 신라의 군인이자 상인이며 지방 세력가이다. 골품제(骨品制)라는 신라 신분제의 벽에 막혀 뜻을 펼칠 수 없었던 그는 당(唐)으로 건너가 군인이 되었다가, 신라에 귀국한 후 지금의 전남 완도(莞島)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한다. 그리고 동아시아 해상 교통로를 장악하여 국제 교역을 주도하면서 많은 부와 힘을 축적하여 큰 해상 세력을 형성한다. 신라 후기 왕위계승분쟁에도 참여하여 신무왕(神武王, 재위 839~839)을 즉위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나, 당시 특권층인 진골귀족 중심의 신라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결국 암살을 당해 최후를 맞이한다.

2 큰 세상으로 나가 바다를 알게 되다

장보고는 신라 후기 인물로,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궁복(弓福)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궁파(弓巴)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여러 기록을 볼 때 바닷가에 사는 가난한 평민 출신으로 생각된다. 당시 신라는 골품제(骨品制)라는 혈연에 바탕을 둔 신분제가 있었기에, 귀족 특히 소수의 진골귀족이 아니면 중요한 요직에 나갈 수가 없는 사회였다. 장보고는 무예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지만, 이 골품제의 벽에 막혀 신라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이에 그는 함께 자란 정연(鄭年)과 함께 당 서주(徐州, 지금의 중국 장쑤성 쉬저우시)로 건너가 서주절도사(徐州節度使) 휘하 무령군(武寧軍)에 속한 군인이 된다. 정연은 나이는 장보고 보다 어렸지만 그 기예(技藝)가 장보고 보다 뛰어나 둘은 동료이며 경쟁자로 함께 했다. 둘은 말을 타거나 창을 사용한 무술과 같은 군인으로서의 능력이 매우 탁월하여 단연 두각을 나타내었고, 소장(小將)이라는 하급 장교의 지위까지 오른다. 넓은 세상에 나가 자신들의 역량을 발휘해 나간 것이다.

당시 당은 절도사(節度使)들이 여러 지방에서 독자 세력으로 분리 독립해 나가던 분열기였다. 장보고는 당에 있으면서 지방 세력들이 군사를 양성하고 각 지역을 장악, 관리하는 모습을 보고 익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때 바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 당은 세계 교역의 중심지였다. 중동과 인도, 동남아시아, 그리고 신라와 일본에 이르기까지 당을 중심으로 국제 교역이 이루어졌는데, 그 교통로로 중요했던 것이 바로 바닷길이었다.

중국의 산둥반도(山東半島) 등 동쪽 해안 지역에는 많은 신라인들이 신라방(新羅坊), 신라소(新羅所)와 같은 집단 자치 거주지를 구성하여 살고 있었고, 연안 운송업이나 국제 무역과 같은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바닷가 출신이었던 장보고는 군인 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신라인들과 교류하고 그들의 사정을 잘 알게 되었다.

당시 당이나 신라 모두 정치적 혼란으로 중앙의 집권력이 약화되고 있던 시기여서, 각지에서 도적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바닷길에도 해적들이 출몰하여 무역선을 강탈하거나 해안에서 주민들을 잡아 노예로 파는 등 많은 피해를 주었다. 해안에 거주하던 신라인들도 이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장보고는 이러한 해적들의 만행에 분노하면서 동시에 해상 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음에 주목하였다. 그가 해적들을 소탕하고 해상 교역로를 장악하여 국제 무역을 주도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게 된 것이다.

3 신라로 돌아와 바닷길을 장악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 하다

장보고는 신라로 돌아가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하였다. 828년(흥덕왕 3) 4월 귀국하여 흥덕왕(興德王)을 만나 신라인들을 잡아 노예로 파는 해적들을 제거하여 신라를 지키고 싶다는 뜻을 전달한다. 왕의 허가를 얻어 10,000명 정도 되는 군사를 모아서 지금의 전남 완도(莞島)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한 후, 그 사령관격인 대사(大使)직을 맡고 본격적인 해상 교역로 확보에 나선다. 청해진은 왕의 허가를 받아 설치된 것이기는 하지만, 설치 단계부터 장보고가 주도하고 변경의 백성들을 자체적으로 조직한 것이어서,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자적인 세력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장보고가 맡은 직책이 기존에 없던 새로운 관직인 대사인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장보고는 해적들을 소탕하고 동아시아 일대의 바닷길을 장악한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당, 신라, 일본 사이의 국제 교역을 주도하였다.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도자기와 비단, 향료 등과 같은 귀중품을 거래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해 나갔고, 그 부를 이용해 더욱 세력을 키워나갔다. 840년(문성왕 2)에는 무역선과 함께 독자 사신을 파견해 일본 조정에 서신과 공물을 보내기도 했는데, 장보고 세력이 독자적으로 일본과 외교 교섭을 시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비록 당시 일본 조정에 의해서 거부되기는 했지만, 당시 장보고가 단순한 무역상이 아니라 큰 독자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장보고의 영향력은 신라에 한정되지 않았다. 그는 신라로 돌아기기 전인 823년(헌덕왕 15)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위해시(威海市)에 속한 영성시(榮成市) 석도(石島) 북부의 적산(赤山)에 법화원(法華院)이라는 사찰을 건립한 바 있는데, 이후 지속적으로 지원하였다. 이 절은 상주하는 승려가 30여 명이나 되며, 연간 500섬을 거둘 수 있는 농지를 가지고 있는 큰 규모였는데, 이 지역 거주 신라인들을 포함한 지역 사회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이 법화원을 통해 장보고 세력이 당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또 일본 승려 엔닌(圓仁)이 당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일본의 지방관과 엔닌이 장보고에게 편지를 보내 귀국을 보살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는데, 당시 장보고 세력이 바닷길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국제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장보고는 여러 인재들을 받아들이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와 함께 자라고 같이 당으로 건너간 정연은 장보고가 귀국할 때 당에 남는다. 하지만 그는 곧 무관의 지위를 잃게 되고 타국에서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는 어려운 상황에 놓이고 만다. 이에 평소 장보고가 정연의 재주를 시기하고 미워하였다고 우려하는 지인의 만류를 뿌리치고, 귀국하여 장보고를 찾아가 몸을 의탁하려 하였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장보고는 그를 극진히 대접하고 중요한 역할을 맡기고자 하였다.

이러한 일화는 장보고가 능력 있는 인재를 우대하고 적극 등용하는 포용력 있는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그 자신이 능력이 있으나 신분제의 벽에 막혀 외국으로 떠나야만 했던 장보고는,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받아들여 그들이 마음껏 능력을 펼칠 수 있게 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아울러 중앙의 정치적 혼란과 빈발하는 자연재해들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유랑하는 어려운 백성들을 규합하기도 하였다. 이는 빈민들을 규합하여 자신의 세력을 불린 측면도 있지만, 신라 조정이 백성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던 상황에서 장보고가 그 역할을 대신한 것이다.

이와 같이 어려운 백성을 모으고 능력 있는 인재를 포용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나간 장보고는 신라 말 골품제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고려라는 새로운 중세 사회를 열어간 지방 호족의 시원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4 꿈을 이루지 못하고 아쉬운 최후를 맞이하다

해상 무역로를 장악하면서 독자적 세력 청해진을 일군 장보고는 신라 중앙 정치 무대에 발을 내딛게 된다. 흥덕왕이 후계 없이 사망하자, 희강왕(僖康王, 재위 836~838)과 김균정(金均貞) 사이에 왕위계승분쟁이 벌어지고, 그 결과 김균정이 패사하고 희강왕이 즉위한다. 하지만 희강왕도 곧 민애왕(閔哀王, 재위 838~839)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이한다. 이러한 극심한 정치적 혼란기에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金祐徵), 곧 신무왕(神武王, 재위 839~839)이 청해진으로 와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하고, 자신을 도와 민애왕을 제거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아 장보고를 지배층에 들어올 수 있게 해주겠다고 제의한 것이다.

장보고는 신무왕의 제의를 받아들여 군대를 일으켜 민애왕을 제거하고 신무왕을 즉위시킨다. 낮은 신분이어서 자신의 능력을 신라에서 제대로 펼칠 수 없었던 장보고가, 왕실의 외척이 되어 핵심 지배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신무왕은 자신의 숙원을 이루어 여한이 없었는지 즉위한 직후 사망하고, 그 아들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이 왕위를 잇게 된다.

문성왕은 장보고의 딸을 둘째 왕비로 맞이하려 하였으나, 너무 커진 장보고 세력에 위협을 느낀 중앙 진골귀족들이 일제히 반대하여 장보고의 희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신라 중앙과 장보고 세력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어 갔다.

이제 장보고는 무력으로 신라를 뒤엎으려고 하였다. 846년(문성왕 8) 봄 장보고가 청해진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장보고의 세력은 매우 강성하여 신라에서 그를 어쩌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이때 염장(閻長)이라는 사람이 계략을 써서 장보고를 암살하고 만다. 인재를 아끼는 점이 장보고의 약점이라 보고, 거짓으로 귀의하는 척 하며 방심한 그를 죽인 것이다. 뛰어난 지도자를 잃은 청해진 세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장보고의 아들과 부장 이창진(李昌珍) 등이 일본과 계속 교역을 하는 등 청해진 세력은 얼마간 유지되었지만, 곧 신라 중앙군의 공격을 받아 궤멸되어 버린다. 그리고 851년(문성왕 13), 신라는 청해진의 주민을 벽골군(碧骨郡, 지금의 전북 김제시)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청해진을 없애버린다.

청해진의 몰락과 함께 장보고의 꿈도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그 꿈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장보고는 신라 말 지방 세력들에게 영감과 자극을 주었고, 그의 꿈은 신라 말 고대 골품제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중세 사회를 연 지방 호족 세력들에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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