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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왕[腆支王]

왜에서 돌아와 왕위에 오르다

미상 ~ 420년(전지왕 16)

전지왕 대표 이미지

삼국사기 전지왕조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전지왕은 백제의 제18대 왕이다. 태자 시절 왜에 질자(質子)로 갔다가, 아신왕(阿莘王)의 죽음 이후 백제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왕족과 해씨(解氏) 세력을 중심으로 정국을 재편하였으며, 상좌평(上佐平) 직을 처음으로 제정하였다.

2 전지왕의 가계와 태자시절

전지왕은 직지왕(直支王) 혹은 진지왕(眞支王)이라고도 한다. 성은 부여(夫餘), 이름은 영(映)으로, 줄여서 여영(餘映)이라고도 한다. 중국측 사서인 『송서(宋書)』에는 부여전(夫餘腆)이라고 나온다.

전지왕은 제17대 아신왕의 맏아들로,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왕비는 팔수부인(八須夫人)으로, 제19대 구이신왕(久爾辛王기)의 어머니이다. 팔수부인의 출자에 대해서는 해씨 집안, 진씨(眞氏) 집안, 왜(倭)계 등 다양한 주장이 있으나, 해씨 집안 출신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구이신왕이 전지왕의 맏아들이라 기록된 점으로 보아 다른 자식들이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구체적인 이름과 활동사항은 확인되지 않는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전지왕의 재위기간은 405년부터 420년까지이다. 그런데 『송서』에는 전지왕이 424년(구이신왕 5) 이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428년(비유왕 2)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사망 연대에 차이를 보인다.

전지왕은 아신왕 즉위 3년 만인 394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당시 백제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백제는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과의 전쟁에서 계속 패배함으로써 석현성(石峴城)과 관미성(關彌城) 등 북방의 요충지들을 빼앗겼다. 그 중에서도 396년(아신왕 6, 고구려 영락 6)의 전쟁은 백제의 존망이 위태로울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광개토왕이 직접 수군을 이끌고 공격해 와, 한성이 포위되기에 이른 것이다. 아신왕은 광개토왕에게 항복하고 영원히 노객(奴客)이 될 것을 맹세하는 굴욕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신왕은 군사를 요청하기 위해 왜(倭)와 우호를 맺었고, 이듬해인 397년(아신왕 6)에 태자였던 전지가 왜에 질자(質子)로 건너가게 되었다.

전지는 즉위하기 전까지 23년간 왜에 머무르면서 백제와 왜의 가교 역할을 했다. 당시 전지가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왜의 군사적 지원이었는데, 이같은 노력 덕분에 왜가 가야 지역과 고구려의 대방(帶方) 지역까지 군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동시에 전지는 장기간 왜에 체류하면서 왜를 자신의 든든한 지지 세력으로 만드는 데에도 성공했다. 그 결과 왕위에 올라서도 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3 전지왕의 왕위 계승

405년(아신왕 14) 9월, 아신왕이 죽었다. 당시 아신왕의 나이는 30대 초~중반의 젊은 나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는 아신왕의 사망에 앞서 왕궁 서쪽에서 한 필의 비단과 같은 흰 기운이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대사회에서 흰 기운이란 왕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왕의 죽음이 임박했는데 태자가 계속 왜에 머물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아신왕이 비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닌가 추정되고 있다.

태자의 부재로 인해 백제에서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지배세력 간에 갈등이 일어났다. 아신왕의 둘째 동생인 훈해(訓解)는 정사를 대신하면서 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막내동생인 설례(碟禮)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전지는 왜에서 부왕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귀국했는데, 이 때 왜왕이 100명의 호위군사를 함께 보내주었다. 전지가 국경에 이르렀을 때 한성(漢城) 사람 해충(解忠)이 와서 정변 소식을 전하며 경솔히 들어가지 말라 알려주었다. 이에 전지는 바닷가의 한 섬에서 기회를 엿보며 기다렸다. 그러자 국인(國人)들이 설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전지왕의 즉위 과정을 보면, 백제 지배세력은 전지왕을 지지하는 세력과 설례를 지지하는 세력이 대립하고 있었다. 전지왕 지지파는 훈해와 해충, 왜군 100명, 그리고 국인이라 일컬어지는 세력들이 있었다. 설례를 지지한 세력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으나, 진씨 세력이 여기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진씨 세력은 근초고왕(近肖古王)대부터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왕권과 결탁하여 주요 관직들을 장악해 왔다. 근초고왕부터 아신왕까지 모두 진씨 왕비를 맞이할 정도로 진씨 세력은 정국을 주도해 왔다. 그러나 아신왕대 대고구려전에서의 잇따른 패배로 진씨 세력은 정권 유지에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진씨√세력은 이를 모면하기 위해 설례를 지지했고, 그 덕에 설례가 일시적이나마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지왕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진씨는 세력을 잃고, 전지왕의 옹립을 지지하던 왕족과 해충으로 대표되는 해씨 세력으로 지배세력의 교체가 이루어지게 된다.

4 전지왕대의 국내정치

전지왕은 오랜 시간 왜에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내에서의 지지기반이 취약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지왕의 즉위에는 해씨 세력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따라서 전지왕은 즉위 초부터 해씨를 중심으로 한 지지세력의 결집에 나섰다. 먼저, 406년(전지왕 2) 자신의 즉위에 공을 세웠던 해충을 달솔(達率)로 삼고 한성의 조(租) 1천 석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해수(解須)를 내법좌평(內法佐平)으로 삼고, 해구(解丘)를 병관좌평(兵官佐平)에 임명하는 등 해씨 세력을 중심으로 정권을 재편하였다. 이로써 해씨는 전지왕대에 명실상부한 정국 주도세력으로 부상하였고, 이러한 흐름은 웅진 초기까지 이어지게 된다.

전지왕은 즉위 과정에서 숙부인 설례에 의한 왕위 찬탈을 경험했다. 때문에 전지왕은 안정된 왕권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그 대표적인 조치가 바로 상좌평 직의 설치이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상좌평의 성격을 신라의 상대등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정권을 장악한 해씨 세력이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보기도 했다. 즉, 상좌평을 왕권의 약화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상좌평의 설치를 왕권 중심의 정치체제 확립 과정에서 나타나는 제도적 장치로 보고, 이것을 왕권 강화의 측면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상좌평이 처음 설치된 것은 408년(전지왕 4)이다. 전지왕은 바로 전년도에 해수와 해구를 좌평직에 임명하는 등 해씨를 중심으로 세력을 개편한 바 있다. 그 직후 상좌평을 설치하고, 여기에 서제(庶弟)인 여신(餘信)을 임명해 군무와 정사를 맡긴 것이다. 이때의 상좌평은 고려시대의 총재(冢宰)와 같았다고 한다. 여신은 왕족으로, 해씨 세력과 더불어 전지왕의 즉위에 기여한 인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여신을 상좌평에 임명했다는 것은 전지왕의 왕권강화 정책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즉, 왕족을 통해 다른 귀족세력들을 통제하는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해씨 세력 역시 자신의 권력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왕의 정책에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상좌평은 왕권 강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 전지왕대의 대외관계

『삼국사기』 아신왕조에는 백제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참패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전쟁기사가 남아 있다. 그런데 전지왕조에는 고구려와 관련된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 대조를 이룬다. 이것은 고구려에 대한 외교정책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이전까지의 전면전에서 벗어나 외교를 통한 견제로 전환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고구려와의 전쟁에 적극적이었던 진씨 세력이 물러나고, 반대로 온건한 입장을 보이던 해씨 세력이 대두한 것과도 관련이 깊다.

전지왕은 즉위 이듬해 동명묘(東明廟)에 배알하고, 바로 동진(東晉)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것은 372년(근초고왕 27)에 근초고왕이 동진에 최초로 사신을 보낸 이후, 처음 등장한 조공기록이다. 그렇다고 그동안 동진과의 외교가 단절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전지왕대 들어 동진과의 외교가 새삼 강조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배경으로는 이 무렵 고구려가 중국 남조(南朝)와의 교섭을 모색하였던 사실을 들 수 있다. 북중국에서 신흥 강자로 등장하고 있던 북위(北魏)를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가 남조의 동진이나 송(宋)과의 화친을 도모했던 것이다. 이에 백제는 고구려가 남조와 가까워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다시금 동진과의 관계를 강조하게 되었다. 그 결과 416년(전지왕 12) 동진으로부터 사지절(使指節) 도독백제제군사(都督百濟諸軍事) 진동장군(鎭東將軍) 백제왕(百濟王)으로 책봉 받았다.

원그리고 왜와의 우호적인 관계 역시 지속되었다. 전지왕은 태자시절의 대부분을 왜에 머무르면서 왜에 세력기반을 만들었다. 이러한 관계는 즉위 후까지 이어져, 409년(전지왕 5)에는 왜가 사신을 파견하여 야명주(夜明珠)를 보내왔다. 그러자 전지왕은 왜의 사신을 후한 예로 대접하고, 비단 10필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처럼 왜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 단순히 왜군을 당장 고구려와의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만약에 있을지 모를 전쟁에 대비하는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다.

이처럼 전지왕은 고구려와의 전면전을 피하고, 외교적 방법을 통해 우회적으로 견제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중국 남북조에 대한 고구려의 등거리외교를 견제하기 위해 동진과의 외교를 강조하고, 전쟁 발발 시 군사적 지원을 위해 왜와도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외교정책은 당시 고구려와 백제의 국력 차이를 고려한,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자세라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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