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지증왕

지증왕[智證王]

신라 발전의 발판을 마련한 마지막 마립간이자 최초의 신라 국왕

437년(눌지 마립간 21) ~ 514년(지증왕 15)

지증왕 대표 이미지

포항 냉수리 신라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지증왕(智證王, 437~514)은 신라 제22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00년~514년이다.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재위 479~500)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지방 통치 제도를 포함한 여러 제도를 정비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등, 신라가 중앙집권국가로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그의 재위 시에 신라(新羅)라는 국호를 확정하고 왕의 호칭이 마립간(麻立干)에서 왕으로 바뀌었는데, 당시 신라의 발전을 잘 보여주는 일이다.

2 가계와 즉위

지증왕은 437년(눌지마립간 21)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재위 356~402)의 손자이며 아들인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조생부인 김씨(鳥生夫人 金氏)는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재위 417~458)의 딸이다. 지증(智證)이라는 이름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왕이 죽은 이후에 붙여진 시호(諡號)이다. 하지만 그의 본명인 지도로(智度路)[혹은 지대로(智大路)나 지철로(智哲老)라 쓰기도 한다.]와 비슷하기 때문에, 이름의 다른 표기로 여겨진다.

지증왕은 체격이 매우 건장하고 힘이 세었으며 담력이 컸다고 전한다. 왕비는 이찬(伊湌) 등흔(登欣)의 딸인 연제부인 박씨(延帝夫人 朴氏)인데, 지증왕이 왕비를 맞이하는 과정에 대해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왕이 즉위한 후 왕비를 구하였는데, 몸집이 너무 커 보통의 여자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에 삼도(三道)에 보내 왕비가 될 여인을 찾도록 하였다. 사신이 모량부(牟梁部)에 이르자 큰 나무 아래에서 개 두 마리가 북만한 크기의 똥을 양쪽에서 물고 다투는 것을 목격한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량부 사람들에게 물으니 모량부 상공(相公), 곧 이찬 박등흔의 딸이 눈 것이라 말하였다. 이에 그 집을 찾아가 보니, 그녀의 키가 7척 5촌(약 180cm) 정도이고 체격이 매우 커 왕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왕에게 보고하니, 왕이 그녀를 왕궁으로 불러들여 왕후로 맞이하였다고 한다.

왕비와의 사이에서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 어사추여랑(於史鄒女郞) 등의 자식을 두었다. 그런데 위의 이야기에서 왕비는 지증왕이 즉위한 이후에 맞이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증왕이 15년간 왕위에 있었기에, 그 장남인 법흥왕은 즉위시 16살을 넘을 수 없는 어린 나이였을 것이다. 그런데 법흥왕이 즉위시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어 연제부인 박씨가 법흥왕의 친어머니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 지증왕이 즉위할 때 나이가 64세였는데 그때까지 혼인을 한 적이 없다고 보기 힘든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아마 즉위 과정에서 정치적 도움을 얻기 위해 다시 결혼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지증왕은 500년 6촌에 해당하는 전왕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재위 479~500)이 후사가 없이 사망하자, 64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3 마립간에서 왕으로

지증왕은 즉위시 64세의 고령이었으며 갈문왕(葛文王)의 지위에 있었다. 갈문왕은 일종의 부왕(副王)으로 왕비의 아버지나 왕의 아버지로서 왕이 아니었던 인물들이 추봉(追封)되거나, 왕의 동생과 같이 가까운 친척이 맡아 왕을 보좌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즉 지증왕은 즉위 전부터 상당히 영향력 있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내물과 눌지 직계로 이어지던 왕실과는 다른 방계 왕족이었고, 왕위계승의 우선 순위에서 먼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그가 즉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정상적이지 않은 방식이었다고 추정된다. 전왕인 소지마립간이 말년에 여색에 빠져 국정을 등한시 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왕궁 안에서 왕비와 승려가 부정한 일을 저지르고 왕을 시해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는 ‘사금갑(射琴匣)’ 설화가 존재하는 것을 볼 때, 일련의 정치적 분쟁 끝에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 뒤를 이어 원래 왕위계승권이 없었던 지증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혼인 설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모량부 세력과의 연합을 통해, 눌지 직계 왕실을 물리치고 왕위를 차지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는 왕위에 오른 지 4년이 지난 503년까지도 여전히 마립간인 매금왕(寐錦王)의 칭호를 사용하지 못하고 갈문왕으로 불렸는데, 이렇게 일반적이지 않은 왕위 계승 과정을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혼인을 통해 협력 관계를 공고히 한 모량부 박씨 세력의 도움을 받으면서 점차 집권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그것은 지증부터 신라의 왕호가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뀐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지증왕은 503년(지증왕 4) 10월 나라의 이름을 신라(新羅)로 정하고, 아울러 왕의 호칭을 마립간에서 신라국왕(新羅國王)으로 바꾸는 조치를 단행한다. 그전까지 신라는 국호를 한자로 표기할 때, 발음이 유사한 한자들을 사용하여 사로(斯盧)나 사라(斯羅), 신로(新盧) 등으로 다양하게 적었다. 신라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때 여러 표기 중, “덕업이 날마다 새로워지고 사방을 망라한다[德業日新 網羅四海]”는 좋은 의미와 연관지어 ‘신라’를 유일하고 공식적인 표기법으로 확정한 것이다. 그리고 신라 고유의 표현이었던 마립간 호칭도 중국식 표현인 왕으로 교체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중국식 표현으로의 명칭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국호의 표기법을 단일화한 것은 주변에 신라가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면서 그 위상이 높아진 것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고, 왕호도 여러 수장들 중의 우두머리 수장이라는 지위에서 벗어나, 다른 수장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초월적 권력자로 위상과 권한이 강화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왕호는 지증왕대에 만들어진 「포항 냉수리 신라비」 와 법흥왕대 만들어진 「울진 봉평리 신라비」 가 발견되면서 그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마립간은 공식적으로 ‘매금(寐錦)’이라 표기되었다. 그런데 법흥왕 대에도 여전히 ‘매금왕’이라는 호칭이 사용되었던 것을 보면, 아예 매금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왕이란 표현만 쓰도록 한 것이 아님이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지증왕의 왕호 교체는 호칭 자체의 변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독점적 권력자로서 왕의 지위를 확고히 하면서 그 위상을 강화한 것에 있다고 하겠다. 한동안 마립간이라는 칭호가 여전히 사용되었지만, 이제 신라왕은 다른 수장들 보다 우위에 있는 대표 수장이 아니라, 초월적인 권력자로서의 위상을 가지게 된 것이다. 지증은 마립간에서 왕으로 우뚝 선 것이다.

4 영토를 확장하고 법과 제도를 마련하다

지증왕 대 국호의 고정과 왕호의 변화는 국가 체제의 변화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6부라는 독자적인 지역 집단의 연합체였던 신라가 초월적 권력자인 왕을 중심으로 통합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발전하면서, 그러한 발전에 걸 맞는 변화가 필요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할 수 있다.

지증왕은 502년(지증왕 3) 지방관을 통해 전국에 농사짓기를 권장하는 한편 소의 힘을 사용하는 농업 기술, 곧 우경(牛耕)을 전국에 보급하였다. 이는 철제 농기구의 광범위한 보급과 함께 농업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늘릴 수 있는 농업 기술의 발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농업의 발전을 통해 확보한 국가 경제력을 바탕으로 신라는 국가를 발전시켜 나갔으며, 제도의 정비도 시행하였다.

한편 이러한 신라의 발전은 당연히 신라 통치 제도의 정비를 필요하게 된다. 왕을 중심으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변모해 감에 따라, 그에 걸맞는 통치 제도의 마련이 필요해 진 것이다. 502년에 순장(殉葬)을 금지하고, 504년 사람이 죽었을 때 얼마나 가까운 친척인가에 따라 상복 입는 기간을 정해 놓은 상복법(喪服法)을 제정했으며, 505년에는 주군현(州郡縣)을 정하고, 새로 확보한 실직주(悉直州 : 현재 강원도 삼척)에는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지방 장관 격인 군주(軍主)로 삼았다.

아울러 같은 해 11월에 얼음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업무와 선박을 이용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509년(지증왕 10) 1월에는 동시전(東市典)을 설치하여 왕경의 시장 관련 업무를 보게 했고, 그해 3월에는 함정을 설치하여 맹수를 잡도록 하였다. 514년에는 최초의 소경(小京)인 아시촌소경(阿尸村小京, 지금의 경남 함안군으로 추정)을 설치하여 영역 안의 통치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이러한 법과 제도의 마련은 발전한 국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이러한 법과 제도의 마련이 집적되어 가면서 포괄적 통치 제도로서의 신라 법제가 완비되어 갈 수 있었고, 이것이 바로 520년(법흥왕 7)의 신라 율령 반포의 기반이 되었다. 법흥왕 대 중앙집권국가로의 큰 발전이 이미 지증왕 대에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특히 지증왕대 제도 마련에 주목되는 부분은, 지방 통치 제도로서 주(州)의 설치와 그 장관 군주(軍主)의 파견이다. 주는 신라 지방 행정 단위 중 최상위이며 광역의 행정 단위이다. 그런데 이 지방 통치 제도의 마련은 신라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졌다. 군주는 그 이름을 볼 때 쉽게 알 수 있듯이, 군단의 지휘관에서 유래하였다. 즉 지방 통치 제도는 신라의 영토 확장과 함께 갖추어져 간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512년(지증왕 13) 6월에 하슬라주(何瑟羅州,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의 군주로 파견된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 지금의 경북 울릉군)을 정벌하여 신라 땅으로 편제하였다. 이사부는 505년 최초로 설치된 주인 실직주(悉直州, 지금의 강원도 삼척시)에 파견된 군주였다. 그런데 7년 뒤 주의 위치가 옮겨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주가 행정 중심의 단위가 아니며, 군주 역시 군사 지휘관적 성격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가 군대를 보내 영역을 확장하면서, 새롭게 신라 땅에 들어온 곳 중 군단이 주둔하는 곳을 주로 삼고, 주를 포함한 주변 지역의 통치를 군단의 사령관인 군주가 담당하였던 것이다.

지증왕 대 지방 통치 제도로서 주가 처음 설치되고 소경과 같은 특수 지방 행정 만들어 진 것은, 신라 발전과 함께 늘어난 국력을 바탕으로 영토 확장이 이루어졌고, 확장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한 제도를 마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5 중고기 신라 왕실의 시조

514년(지증왕 15) 7월 지증왕이 78세의 일기로 사망하고, 뒤를 이어 그의 장남 법흥왕(法興王)이 즉위한다.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면서, 신라를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발전시킨 왕이다. 따라서 『삼국유사』에서는 이 법흥왕부터 진덕여왕까지를 불교가 번성했던 신라의 전성 시기로 보고 중고기(中古期)로 명명하였다. 지금도 중고기는 신라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이 중고기 신라 발전의 기반은 이미 지증왕대 갖추어졌다고 할 수 있다. 또 중고기에는 지증왕의 직계 후손들이 왕위를 계속 계승하였으므로, 그는 중고기 신라 왕실의 실질적인 시조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면 지증왕은 중고기의 왕이 아니지만, 그로부터 사실상 신라 중고기가 시작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