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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眞平王]

선대(先代)를 이어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다

미상 ~ 632년(선덕여왕 1)

진평왕 대표 이미지

삼국사기 진평왕 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진평왕(眞平王)은 신라의 제26대(재위: 579~632) 왕이다. 진흥왕(眞興王)의 손자(孫子)이며, 숙부(叔父)인 진지왕(眞智王)을 이어 왕위에 올랐다. 태어나면서부터 기이한 용모에 체격이 매우 컸다고 전해진다.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수많은 침략을 받았다. 진평왕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중국과의 외교를 강화하는 등 다양한 정책을 시행하였다. 선대(先代) 왕들의 정책을 이어 신라의 행정조직을 정비하였으며, 이를 통해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왕으로 평가받는다.

2 커다란 아이, 진평왕의 왕위계승

진평왕의 성은 김(金)씨이며 이름은 백정(白淨)이다. 『삼국유사』에는 왕의 이름을 따서 백정왕(白淨王)으로 전하기도 한다. 아버지는 진흥왕의 태자 동륜(銅輪)이며, 어머니는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딸인 만호부인(萬呼夫人) 김씨이다. 어머니 만호부인은 만녕부인(萬寧夫人)이라 쓰기도 한다. 진평왕의 왕비는 복승갈문왕(福勝葛文王)의 딸인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이며, 『삼국유사』에는 승만부인(僧滿夫人) 손(孫)씨가 후비(後妃)로 기록되어 있다. 진평왕은 태어나면서부터 기이한 용모를 가졌으며, 신체가 매우 컸다고 한다. 신체가 얼마나 컸는지 『삼국유사』에는 그의 신장이 11척이며, 내제석궁(內帝釋宮)에 행차했을 때 돌계단을 밟아 세 개를 한꺼번에 부러뜨렸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진평왕의 아버지인 동륜은 566년(진흥왕 27년)에 태자에 올랐으나, 왕위를 승계하지 못하고 572년(진흥왕 33)에 죽었다. 진흥왕이 사망하자 동륜태자의 동생이자,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었던 사륜(舍輪)이 왕위에 오르니 바로 진지왕이다. 진지왕은 진흥왕을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왕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사망하였다. 이에 진지왕의 조카이자 동륜의 아들인 진평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처럼 『삼국사기』에는 진지왕이 죽음으로 인하여 조카였던 진평왕이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서는 진지왕이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러워, 나라 사람들(國人)에 의해 폐위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삼국유사』의 기록을 신뢰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진평왕의 왕위계승 과정에서 사륜계(舍輪系)와 동륜계(銅輪系)의 대립을 중심으로 하는 왕실 내부에 모종의 갈등이 있었다고 추정되고 있으며, 『삼국유사』에 나라 사람들[國人]로 표현되는 진골 귀족 간에 정국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갈등이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결국 이러한 갈등 속에서 진평왕을 지지하는 세력이 승리하였고, 그 결과, 진지왕은 폐위되고 진평왕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3 선대(先代) 왕들을 이어 행정조직을 정비하다

신라의 행정조직은 6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정비되기 시작했는데, 진평왕 시대는 그와 같은 국가 체제 정비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때이다. 왕위에 오른 진평왕은 먼저 579년(진평왕 원년) 이찬(伊飡)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아 국정을 맡기고, 자신의 동생인 백반(伯飯)을 진정갈문왕(眞正葛文王)으로, 국반(國飯)을 진안갈문왕(眞安葛文王)으로 봉하였다. 580년(진평왕 2)에는 이찬 후직(后稷)을 병부령(兵部令)으로 삼아 나라의 군사권을 맡겼다. 581년(진평왕 3)에는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중앙행정관부인 위화부(位和府)를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위화부의 설치는 과거 귀족들에 의하여 주도되던 관리 인사를 국가가 담당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또 583년(진평왕 5)에는 선박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선부(船府)를 설치하였다.

이듬해인 584년(진평왕 6) 2월에는 572년(진흥왕 33)부터 사용되던 연호인 홍제(鴻濟)를, 건복(建福)으로 바꾸었다. 진평왕은 연호를 바꿈과 동시에 행정조직 정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같은 해 3월에는 나라의 조세를 담당하는 조부(調府)와 수레와 탈 것을 담당하는 승부(乘府)에 각각 영(令) 1명을 두었고, 586년(진평왕 8)에는 의례를 담당하는 예부(禮部)에 영(令) 2명을 두었다.

591년(진평왕 13)에는 외국 사신의 접대를 담당하는 영객부(領客府)에 영(令) 2명을 두었다고 한다. 다만 영객부령 설치에 관해서는 『삼국사기』 직관지에 651년(진덕왕 5)에 두었다는 기록이 있어, 진덕왕 5년에 들어가야 할 기록이 착오로 인하여 간지(干支)가 동일한 진평왕 13년에 기록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622년(진평왕 44)에는 이찬 용수(龍樹)를 내성사신(內省私臣)으로 삼아 대궁(大宮)·양궁(梁宮)·사량궁(沙梁宮)을 모두 담당하게 하였다. 내성은 왕실 업무를 담당하는 내정기구로서, 내성사신의 설치는 왕실과 관련한 제반 업무를 통일하여 독립된 관부에서 처리하게 함으로써, 내정기구의 위상을 강화하고 기능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내성이 설치됨으로써 왕실 운영에 필요한 체계적인 제도기반을 마련되었다.

이듬해인 623년에는 군사를 담당하는 병부(兵部)에 대감(大監) 2명을 두었다. 624년(진평왕 46)에는 국왕과 궁궐의 수비 등을 담당하는 시위부(侍衛府)에 대감(大監) 6명을 두었으며, 유공자에 대한 포상업무를 담당하는 상사서(賞賜署)와 불교와 관련이 있는 관부인 대도서(大道署)에 각각 대정(大正) 1명을 두었다. 이처럼 새로운 관부가 설치되고 담당 관료가 배치된 것은 신라의 국가 체제가 확대되고, 그 업무가 증대된 결과였다. 국가의 업무가 증대됨에 따라 업무의 내용도 세분화되었고 그러한 업무를 책임질 전문적인 관청과 관료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4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으로부터 헤쳐나가다

진흥왕은 고구려와 백제를 상대로 영토를 확장하였다. 신라의 영토가 팽창한 만큼 진평왕 시대에는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더욱 빈번히 침입을 받게 되었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602년(진평왕 24)에 백제가 아막성(阿莫城)을 공격해왔고, 이듬해인 603년(진평왕 25)에는 고구려가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침입하였다. 608년(진평왕 30) 2월에도 고구려가 신라의 북쪽 경계를 침범하였으며, 같은 해 4월에는 고구려로부터 우명산성(牛鳴山城)을, 611년(진평왕 33)에는 백제로부터 가잠성(椵岑城) 을 빼앗겼다. 616년(진평왕 38)에는 모산성(母山城)에서, 618년(진평왕 40)에는 가잠성에서 백제와 전투를 치뤘다. 이후에도 진평왕 재위 기간 동안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상대로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 했다.

진평왕은 이러한 상황을 다양한 방법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다. 먼저 새롭게 성을 쌓거나 산성(山城)을 수리·정비하였다. 591년(진평왕 13)에는 남산성(南山城)을 새롭게 쌓았으며, 593년(진평왕 15년)에는 명활성(明活城)과 서형산성(西兄山城)을 고쳐 쌓았다. 602년(진평왕 24)에는 소타(小陀)·외석(畏石)·천산(泉山)·옹잠(甕岑) 등 4성을 쌓아 백제를 압박하였다.

이뿐 아니라 군사 조직도 새롭게 확충하였다. 583년(진평왕 5년)에는 서당(誓幢)을, 591년(진평왕 13)에는 사천당(四千幢)을, 604년(진평왕 26년)에는 군사당(軍師幢)을, 605년(진평왕 27)에는 급당(急幢)을, 625년(진평왕 47)에는 낭당(郞幢)을 설치하였다.

이처럼 진평왕은 군사 체제의 정비를 통해 고구려·백제와의 전투에 대비하였으나, 신라는 그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 사이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진평왕은 이처럼 고립된 상황을 벗어나고자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594년(진평왕 16)에 진평왕은 중국의 수(隋)에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고 수나라로부터 상개부낙랑군공신라왕(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에 봉한다는 조서를 받았다. 그리고 이를 시작으로 600년(진평왕 22)부터 604년(진평왕 26)까지 2년마다 수나라에 사신을 보냈으며, 608년(진평왕 30)에는 원광(圓光)법사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정벌해달라는 내용을 담은 걸사표(乞師表)를 지어, 수나라에 보내기도 하였다. 중국에서 수가 망하고 당(唐)이 세워진 뒤에도 진평왕은 621년(진평왕 43)부터 631년(진평왕 53)까지 대략 1~2년에 한 번씩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었다. 진평왕은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고립된 외교 환경에서 벗어나, 국제관계를 신라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나가고자 하였다.

진평왕은 632년(진평왕 54) 봄에 사망하였다. 『삼국사기』에는 한지(漢只)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진평왕릉은 현재 경주시 보문동에 위치하고 있다. 진평왕은 54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신라 시조인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을 제외한다면, 신라의 역사에서 가장 오랜 기간 재위에 있었던 왕이 된다.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있었다고 한다. 이에 첫째 딸인 덕만(德曼)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덕만은 바로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善德女王)이다. 또 다른 딸인 천명공주(天明公主)는 진지왕의 아들인 용춘(龍春)과 결혼하여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을 낳았다.

『삼국유사』에는 진평왕의 셋째 공주로 선화(善花)와 백제 무왕(武王)에 관한 설화가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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