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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眞興王]

강대국 신라를 만든 전륜성왕(轉輪聖王)

534년(법흥왕 21) ~ 576년(진흥왕 37)

진흥왕 대표 이미지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진흥왕(眞興王, 534~576)은 신라 제2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40년~579년이다. 그는 전왕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이 이룩한 중앙집권국가로의 발전을 바탕으로, 국력을 신장시키고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신라를 고구려, 백제와 대등하게 경쟁하는 삼국의 하나로 우뚝 세웠다. 그가 정복한 영토를 순시하며 세운 순수비(巡狩碑)는 그의 업적을 잘 보여준다. 또한 자신이 불교의 이상적 군주인 전륜성왕(轉輪聖王)임을 표방하는 등 불교를 크게 진작시키고 불교 이념을 국가 통치 이념으로 확립하였다.

2 가계와 즉위

진흥왕은 본명이 심맥부(深麥夫) 혹은 삼맥종(彡麥宗)으로, 534년(법흥왕 21)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의 동생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과 법흥왕의 딸 지소부인 김씨(只召夫人 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진흥왕은 전왕 법흥왕의 조카이면서 외손자였다. 형제로는 숙흘종(肅訖宗)과 만호부인 김씨(萬呼夫人 金氏)가 있다. 왕비는 각간(角干) 영실(英失)의 딸인 사도부인 박씨(思道夫人 朴氏)이고, 둘 사이 자식으로 동륜태자(銅輪太子, ?~572)와 진지왕(眞智王, 재위 576~579)이 있다.

540년 7월 법흥왕이 사망하자 신라 제24대왕으로 즉위하였다. 아마 법흥왕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왕위를 이은 것으로 보인다. 즉위할 당시 진흥왕은 7살의 어린 나이였기에, 태후인 지소부인이 섭정을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즉위할 때 나이가 15살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태후가 섭정했다는 점을 고려하여, 일반적으로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라 534년에 출생하여 7살에 즉위하였다고 보고 있다.

3 국사(國史)를 편찬하다

진흥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어머니인 지소부인이 섭정을 하였는데, 그녀와 함께 541년(진흥왕 2)에 병부령(兵部令)의 지위에 올라 군사권을 장악한 이사부(異斯夫)가 정국을 주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신라는 이미 지증왕(智證王, 재위 500~514)과 법흥왕을 거치면서 강력한 왕권 중심의 권력 구조를 확립했기 때문에, 진흥왕 역시 강력한 권력을 가진 왕이었다.

545년(진흥왕 6) 이사부가 신라의 역사를 정리한 『국사(國史)』를 편찬할 것을 건의하자, 진흥왕은 대아찬(大阿湌) 거칠부(居柒夫)에게 명령하여 편찬 작업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사서의 편찬이란, 자신들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만큼 역량을 갖추고 왕권의 신장이 뒷받침되어야 비로소 편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신라가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발전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진흥왕이 어린 나이로 즉위했음에도 군정운영이 가능했음은, 이사부, 거칠부 등의 유능한 신하의 조력도 있었겠지만, 선대 지증왕부터 법흥왕 시기에 신라 왕권이 크게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4 영토를 확장하고 순수비를 세우다

진흥왕은 전왕들이 다져 놓은 기반 위에서 신라를 크게 발전시켰다. 특히 그는 전쟁을 통해 영토를 크게 확장한 정복 군주였다. 당시 한반도는 고구려와 백제가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었고,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포함한 중부 지역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한강 유역은 중국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의 요지로서, 전략적 요충지였다. 고구려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백제는 그로 말미암아 힘이 크게 약화되었기에, 이를 되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진흥왕은 백제와 군사 협력 관계를 공고히 하면서 고구려를 견제하고 중부 지역으로의 진출을 꾀하였다. 드디어 551년(진흥왕 12) 불과 18세의 나이였던 진흥왕은, 백제 성왕(聖王, 재위 523~553)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해 승리를 거두고 한강 상류 지역을 확보했다. 이어 553년에는 백제마저 물리치고 한강 하류 지역까지 차지하여 한강 유역 전체를 신라의 영토로 삼았다. 이에 격분한 백제가 신라를 공격했으나, 554년 관산성전투(管山城戰鬪)에서 신라군이 성왕을 죽이고 대승을 거두어 한반도 중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한다.

이어 562년에는 대가야(大加耶)를 정복하여 가야 지역을 완전히 신라 영토로 삼는데 성공한다. 아울러 동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여 지금의 함경남도 함흥 지방까지를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로써 고구려와 백제의 양강 구도가 형성되어 있던 한반도에서, 신라가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니 오히려 그들 보다 우위에 서는 강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러한 진흥왕의 영토 확장 업적은 그가 세운 순수비(巡狩碑)에 잘 나타난다. 순수(巡狩)란 왕이 영토 각지를 돌아다니며 천지산천(天地山川)에 제사하고, 방문한 지방의 정치와 민심의 동향을 살피던 행위이다. 순수비는 왕이 순수한 것을 기념하고, 왕의 덕과 업적을 찬양하기 위한 글을 새겨 세운 비석을 말한다. 진흥왕은 자신이 정복한 지역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현재까지 모두 4개가 확인된다. 561년(진흥왕 22)에 건립한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 , 568년(진흥왕 29)에 세운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 , 마운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磨雲嶺 新羅 眞興王 巡狩碑) , 황초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黃草嶺 新羅 眞興王 巡狩碑) 가 그것이다.

5 불교를 진흥시켜 통치 이념으로 삼다

또 진흥왕은 불교를 진흥시키는 데에도 크게 힘썼다. 544년(진흥왕 5) 2월 법흥왕이 불교 공인시 세우고자 했던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興輪寺)가 드디어 완공되었고, 3월에는 사람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공식적으로 허락하여 불교가 완전히 정착하게 되었다. 549년(진흥왕 10)에는 남조 양(梁)이 불사리(佛舍利)를 전해 오자 그것을 흥륜사 앞길에서 받들어 모시기도 하였다.

그리고 553년(진흥왕 14)에는 황룡사(皇龍寺)라는 신라를 상징하는 대사찰을 짓는다. 원래 진흥왕은 왕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 새로운 궁궐을 지으려 하다가 절로 바꾼 것이다. 이는 단순한 불교의 장려 차원을 넘어, 왕권의 위상과 정당성을 불교를 통해 확보하려는 의도를 보여준 것이다. 이제 불교를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574년(진흥왕 35)에는 황룡사에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주조하기도 하였다.

진흥왕이 불교를 국가 통치 이념으로 활용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은 그 아들들의 이름이다. 진흥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이 동륜(銅輪)이고 둘째가 사륜(舍輪), 곧 철륜(鐵輪)이었다. 이 이름은 불교에서 불법으로 세계를 통일하고 지배하는 이상적인 군주를 의미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에서 따온 것이다. 전륜성왕은 금륜(金輪), 은륜(銀輪), 동륜(銅輪), 철륜(鐵輪)의 4왕이 있다고 하는데, 이중 동륜과 철륜을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이미 인도에서 아소카왕(Asoka, BC270년경~BC230년경)이 인도를 통일하고 전륜성왕을 표방한 바 있는데, 진흥왕도 아소카왕을 참고하여 신라왕이 전륜성왕임을 내세운 것으로 보인다. 아소카왕이 그러했듯이 그는 넓은 영토를 차지한 정복 군주였지만, 전륜성왕을 표방하며 자애로운 왕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진흥왕은 566년(진흥왕 27) 장남을 신라에서 처음으로 태자(太子), 곧 왕위계승권자로 책봉한다. 비록 동륜이 572년 3월 사망하면서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태자 책봉은 왕의 직계에게 당연히 왕위를 계승한다는 원칙을 확립하고 그것을 지배층 대부분이 인정해야만 할 정도로 왕권이 강화되었음을 보여준다. 태자의 왕위계승권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 전륜성왕 관념과 같은 불교 신앙이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같은 시기 기원사(祇園寺)와 실제사(實際寺)라는 두 절을 건립한 것도 무관하지 않다고 파악된다.

이렇듯 진흥왕은 불교를 장려하고 그것을 국가통치 이념으로 활용하는 불교 국가 신라를 만들었다.

6 화랑도를 시작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만들다

한편 진흥왕대에 화랑도(花郞徒) 제도가 처음 시작되었다. 화랑도란 리더인 화랑과 그를 따르는 무리인 낭도(郎徒)로 구성된 청소년 자치수련조직 겸 군사조직이다. 신라에서 그전까지 이러한 청소년 조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진흥왕대 이를 체계적으로 만들고 국가에서 지원하였다.

그런데 진흥왕이 화랑도 제도를 시작한 것은 청소년에 대한 교육이나 군사 활동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진흥왕이 영토를 확대하면서 신라는 더욱 발전하였는데, 이에 커진 나라에 일할 인재가 더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에 인재를 선발하는 제도가 마땅히 없어서 고민하였다. 그러다가 576년(진흥왕 37) 봄에 원화(源花) 제도를 시행하였다. 이는 두 명의 미녀를 선발하여 원화로 삼고, 두 사람을 따르는 무리들을 모아 함께 생활하면서 관찰한 후, 그 중 뛰어난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첫 번째 선발된 두 명의 원화 사이에 시기가 심하여 반목하다가, 다른 원화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원화 제도는 폐지된다. 이후 아름다운 남자를 뽑아 단장하여 화랑이라 받들게 하였다. 낭도의 무리가 모여들어 서로 도의를 닦고, 이 과정에서 조정에 추천할 만한 인재가 가려지게 되었다.

이후 신라의 많은 인재들이 화랑도를 통해 실력을 키워 나라의 큰일을 하는 인재들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그 많은 인재들의 힘으로 신라는 더욱 발전할 수 있었고, 결국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기반을 만든 것이 바로 진흥왕이었던 것이다.

7 강대국 신라를 만들다

많은 업적을 남긴 진흥왕은 576년 8월 37년간의 긴 통치를 끝내고 사망한다. 말년에 그는 출가하여 법운(法雲)이라는 법명을 가진 승려가 되었고 왕비 역시 출가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불교를 깊게 믿고 크게 진작시켰기에 시호를 진흥(眞興)이라 하였다. 애공사(哀公寺) 북쪽 봉우리에 왕릉을 만들어 모셨는데, 사적 제177호 경주 진흥왕릉이 그것이다.

진흥왕은 전왕들이 이룩한 발전 위에, 신라를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강대국으로 발전시킨 왕으로 평가할 수 있다. 신라의 이러한 발전은 진흥왕대 연이어 독자 연호를 사용했던 것에서 잘 드러난다. 진흥왕은 551년(진흥왕 12)에 개국(開國)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새 시대가 열렸음을 선언하였고, 568년(진흥왕 29) 태창(太昌), 572년(진흥왕 33) 홍제(鴻濟)로 연호를 바꾸었다. 아울러 진흥왕은 불교를 진흥하여 국가적 종교로 만들었고, 동시에 이를 활용하여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였다. 이로써 고구려와 백제가 한반도의 패권을 다투던 시대에서 벗어나, 삼국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는 진정한 삼국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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