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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 김춘추[太宗武烈王 金春秋]

최초의 진골(眞骨) 왕 김춘추(金春秋), 백제를 무너뜨리다

603년(진평왕 25) ~ 661년(무열왕 8)

태종무열왕 김춘추 대표 이미지

태종 무열왕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개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 603~661)는 신라 제29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651년~661년이다. 그는 진골(眞骨) 신분으로 최초로 왕위에 올라 중대(中代) 왕실을 열었다. 가야 왕족 출신의 김유신(金庾信)과 중첩된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긴밀한 관계를 구축해 권력을 장악하여 왕위에 올랐고, 뛰어난 외교 역량을 발휘하여 나당(羅唐) 군사동맹(軍事同盟)을 체결함으로써 숙적 백제(百濟)를 멸망시켰다. 삼국통일전쟁을 시작하여 통일신라 중대 전성기를 연 왕이라 할 수 있다.

2 신라 최고의 장수이자 충신 김유신(金庾信)을 얻다

김춘추(金春秋)는 603년(진평왕 25) 제25대 진지왕(眞智王, 재위 576~579)의 아들 김용춘(金龍春)과 제26대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의 딸 천명부인 김씨(天明夫人 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춘추는 조부가 왕이었지만, 실제 왕위 계승 서열에서는 멀리 있었다. 진지왕이 죽자 왕위는 아들인 김용춘이 아니라, 형의 아들인 백정(白淨-진평왕)에게 전해졌는데, 진평왕은 자신의 직계 후손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원칙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로서 김춘추 가계는 왕위 계승권을 갖지 못한 진골귀족으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외모와 능력이 출중했고 야심도 있었던 김춘추는 여러 진골귀족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 재위 시에 상당한 정치적 지위에 오른다. 그리고 자신의 최측근이자 신라 최고의 장수 김유신(金庾信)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두 사람의 인연은 629년(진평왕 51) 김춘추의 부친 김용춘이 김유신과 그 아버지 김서현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했던 낭비성전투(娘臂城戰鬪)때까지 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본격적으로 가까운 관계가 된 것은 선덕여왕대에 김춘추가 김유신의 둘째 여동생 문희(文姬), 곧 문명부인(文明夫人)과 결혼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의 사이에서는 문무왕(文武王)을 비롯하여 신라를 이끌어나갔던 아들들이 태어났다.

김유신과의 관계는 단순히 개인 간의 것이 아니라 진지왕계와 가야 유민 세력이라는 정치세력 간 결합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뛰어난 능력을 갖춘 두 사람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자신들의 능력과 뜻을 펼쳐나갔고, 곧 신라 중앙 정치를 주도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지속적인 군사적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 급기야 642년(선덕여왕 11) 7월에는 백제 의자왕(義慈王, 재위 641~660)의 대규모 군사 작전에, 신라는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경남 합천군)을 포함한 낙동강 서쪽의 40여 성을 빼앗기는 큰 피해를 입고 만다. 이때 대야성을 지키고 있던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金品釋)과 딸이 적군에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위기가 선덕여왕의 실정 때문이라는 책임론이 대두되었고, 선덕여왕을 도와 정국을 주도하던 김춘추와 김유신 등 신흥 귀족세력에 대한 정치적 공세가 이어졌다. 김춘추로서는 딸의 죽음이라는 사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 또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신라를 위협하는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킬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선덕여왕과 자신을 공격하는 내부의 귀족세력들을 제압할 필요도 있었다.

3 진골(眞骨) 최초의 왕이 되다

김춘추는 백제와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주변국과 군사적 협력 관계를 구축하려는 시도를 한다. 먼저 642년 겨울 고구려를 찾아가 군사동맹을 제의하나, 당시 군사 정변을 일으켜 고구려의 권력을 장악한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거절당하고, 오히려 억류되는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처남이자 자신의 최측근 김유신이 즉각 구출작전에 나서 고구려에 압박을 가하고, 자신이 기지를 발휘하여 고구려에서 무사 귀환한다.

돌아온 김춘추는 외교적 노력을 이어갔지만 여의치 않았다. 643년 9월에는 당에 군사동맹을 제의했으나 당 태종이 거절했고, 647년에는 백제의 우방이라 할 수 있는 왜(倭)까지 건너가 의사를 타진하였지만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김춘추의 시도들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반대 귀족세력들의 공세는 더욱 커졌다. 마침내 647년 1월 화백회의의 의장이자 상대등(上大等)인 비담(毗曇)이 반란을 일으켰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조력을 받아 반란을 진압하였고, 더불어 반대파를 제압하고 내부 권력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8월에 선덕여왕이 사망하자 김춘추는 선덕여왕의 사촌여동생인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647~654)을 왕위에 올리고, 자신이 사실상 실권을 행사하면서 백제와의 전쟁을 준비한다. 그리고 654년 3월 진덕여왕이 사망하자, 형식상 알천(閼川)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진골로서는 최초로 왕위에 오른다. 이로써 동륜태자 직계에서 진지왕의 손자 김춘추의 직계로 왕위가 넘어가게 된다. 이를 보통 신라 중대 왕실이라 부른다.

4 외교의 달인, 나당 군사동맹을 성사시키다

김춘추는 비담의 반란을 진압하고 진덕여왕을 즉위시킨 후, 본격적으로 백제를 물리치고 신라를 안정화시킬 방안을 모색해 나갔다. 즉 백제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도움을 줄 동맹을 찾는데 주력하였다. 특히 당과의 군사동맹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당은 643년 이미 신라의 군사동맹 제의를 거절한 바 있다. 그러나 당시 당은 645년(선덕여왕 14) 대규모 고구려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고, 고구려 정벌에 강한 자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의 동맹 제의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고 거절했었다. 그런데 이 645년 당 태종의 고구려 원정이 실패로 끝나고, 충격을 받은 당은 대고구려전의 전략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속적으로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기회를 엿보던 김춘추는 이러한 당의 사정 변화를 알고, 648년(진덕여왕 2) 그 자신이 직접 아들 김문왕(金文王)과 함께 당으로 건너가 당 태종을 만나 군사동맹을 논의하고, 김문왕을 당에 머무르게 하면서 성의를 보인 끝에 당 태종의 동의를 이끌어내었다. 김춘추는 이렇듯 최고위 권력자이면서도 그 자신이 직접 외국에 나가 적극적인 외교 교섭에 임한 훌륭한 외교가였다. 김춘추는 당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그것에 부합하는 제안을 함으로써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당과의 군사동맹을 마침내 성사시킨 것이다.

649년 당 태종이 죽고 그 아들 고종(高宗)이 즉위하는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김춘추는 650년(진덕여왕 4)에 장남 법민(法敏), 곧 나중의 문무왕을 당에 보내 진덕여왕이 지은 오언태평송(五言太平頌)을 바치고, 또 법흥왕 이래 사용하던 독자 연호를 포기하고 당의 연호를 사용하는 등 많은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양국의 군사동맹을 더욱 확고해졌다.

그리고 드디어 654년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게 되자, 이제 양국 동맹은 백제와 고구려에 대한 공동 군사작전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655년(태종무열왕 2) 1월 고구려가 백제, 말갈(靺鞨)과 함께 신라 북쪽 국경을 공격하여 33성을 탈취하자, 태종무열왕은 당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당이 이에 응해 정명진(程名振)과 소정방(蘇定方) 두 장수를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다.

이렇듯 나당 군사동맹은 실로 뛰어난 외교가 김춘추가 이룩한 외교적 성과라 할 수 있다.

5 숙적 백제를 정벌하여 삼국통일을 성공적으로 시작하다

왕위에 오른 김춘추는 우선 자신의 왕권을 확고히 하는 내부 정비 작업을 진행한다. 이전과 달리 진골로서 왕위에 올랐다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유교 이념을 활용하여 왕권의 위상과 권위를 확보하였다. 즉위 직후 선친 용춘을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어머니 천명부인을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추봉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정립하였고, 655년(태종무열왕 2) 3월에는 진흥왕의 동륜태자 책봉 이후 처음으로 장남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또 동시에 자기의 측근들을 주요 요직에 임명하여 자신이 원하는 대로 정국을 이끌어나갈 수 있도록 하였다. 655년 10월 자신의 딸 지소부인(智炤夫人)을 김유신과 결혼시켜 중첩된 혼인관계를 통해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였고, 660년(태종무열왕 7)에는 그를 최고 관직인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하여 국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아울러 655년 태자 책봉시 다른 아들들을 모두 고위직으로 승진시키고, 658년(태종무열왕 5)에는 셋째 문왕을 집사부 중시(中侍)에 임명하여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로써 태종무열왕은 왕권 중심의 내부 권력구조를 확립하고 자신이 원한대로 백제 정벌, 나아가 삼국통일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였다.

이제 모든 준비 작업은 끝났고 삼국통일전쟁의 실행만 남았다고 할 수 있다. 659년(태종무열왕 6) 4월 태종무열왕은 드디어 당에 사신을 보내 백제 정벌 전쟁을 위한 군사의 파견을 공식적으로 요청하였다. 이에 당 고종이 660년 3월 소정방을 사령관으로 하는 13만의 대군을 파견한다. 태종무열왕도 그해 5월에 태자와 김유신 등과 더불어 친히 5만의 정예병을 이끌고 백제 공격에 나선다. 태자, 곧 문무왕을 보내 덕물도(德物島, 지금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도)에서 소정방을 맞이하고, 당군이 해로로, 신라가 육로로 백제 도성으로 진격할 것을 정한 후, 자신은 후방에 남고 김유신과 태자 등에게 군의 지휘를 맡겨 진격하게 하였다.

백제군은 잘 정비되고 수적으로도 월등한 신라와 당 연합군에 대응할 수 없었다. 더욱이 『삼국사기』는 이 시기의 백제를 의자왕이 환락에 빠지고 간신배의 말을 믿고 충신을 내쫓는 등, 정치 문란과 지배층의 분열이 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계백(階伯)이 이끄는 5,000의 결사대가 황산(黃山, 지금의 충남 논산시)의 벌판에서 항전하여 신라군의 발목을 잡았으나 곧 전멸하였다. 이제 백제는 신라군을 막을 수 없었고, 신라는 이미 백제 사비도성(泗沘都城, 지금의 충남 부여군) 아래 자리 잡고 있던 당군과 힘을 합하여 7월 13일 백제 도성을 함락시켰다. 의자왕은 웅진성(熊津城, 지금의 충남 공주시)로 도망쳤으나, 18일 부하들에게 잡혀 항복한다. 이로써 백제가 멸망하였다. 태종무열왕은 자신의 딸과 사위를 죽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배신자 모척(毛尺)과 검일(黔日)을 잡아 죽여 사적인 복수도 완수하였다.

태종무열왕은 긴 시간에 걸쳐 치밀하게 준비하여 결국 숙적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의 절반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의 백제 통합은 단순히 무력으로 그 땅을 차지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11월 22일에 왕이 백제 원정을 마치고 왕경으로 돌아와서,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였는데, 이때 항복해 온 백제 관리들에게도 능력에 따라 신라의 관등과 관직을 하사하며 회유했다. 이들을 통해 백제 지역을 안정화시키려 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백제 영토는 물론 백제인까지 하나로 통합하려는 통일을 추구한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태종무열왕이 목표한 삼국통일은 이제 시작이었다.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나고, 661년(태종무열왕 8) 5월 9일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하였다. 태종무열왕은 장군들을 보내 이들에 대응하도록 하면서 삼국통일전쟁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숙원이었던 백제 정벌을 이루어 여한이 없었는지, 그는 661년 6월 59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시호를 무열(武烈)이라 하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왕릉을 만들었는데, 바로 사적 제20호 경주 무열왕릉(慶州 武烈王陵)이다. 그리고 신라왕 중에서 유일하게 묘호(廟號)를 확인할 수 있는데, 태종(太宗)이다. 그가 묘호를 가졌던 것은 자신이 적극적으로 유교 이념과 의례를 도입하여 왕권의 정당성과 권위를 확보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묘호는 당의 태종과 같아 692년(신문왕 12) 당으로부터 개정 요구가 들어오는 외교 문제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는데, 신문왕은 태종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한 공적이 있어 이런 묘호를 쓰게 되었다고 당에 설명한 바 있다.

태종무열왕은 비록 완수하지는 못했지만 삼국통일의 위업을 시작하고, 새로운 중대 왕실을 연 위대한 왕으로 인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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