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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덕왕[憲德王]

김헌창의 난으로 정치·사회적 모순이 폭발하다!

미상 ~ 826년(헌덕왕 18)

헌덕왕 대표 이미지

경주 헌덕왕릉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헌덕왕은 신라 제 41대 왕이다. 애장왕(哀莊王)대에 섭정을 하면서 정치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했다. 즉위 후에도 동생을 비롯한 일부 왕족들과 정치권력을 독점하면서 귀족세력을 견제했다. 이로 인해 무열왕계 등 귀족들의 불만이 커졌고, 이후 김헌창(金憲昌)의 난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자연재해와 기근이 계속되어, 곳곳에서 도적이 발생하는 등 사회적으로도 매우 불안정했다.

2 헌덕왕의 가계

헌덕왕의 성은 김(金), 이름은 언승(彦昇), 시호는 헌덕(憲德)이다. 조부는 제38대 원성왕(元聖王)이고, 아버지는 원성왕의 첫째 아들인 혜충태자(惠忠太子) 김인겸(金仁謙)이다. 어머니는 성목태후(聖穆太后) 김씨(金氏)이다. 제39대 소성왕(昭聖王)은 헌덕왕의 형이고, 김수종(金秀宗, 흥덕왕興德王)과 김충공(金忠恭), 김제옹(金悌邕)은 헌덕왕의 동생이다. 왕비는 귀승부인(貴勝夫人) 김씨(金氏)로, 숙부인 김예영(金禮英)의 딸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왕비 귀승랑(貴勝娘)이 헌덕왕의 동생인 김충공의 딸이고, 시호는 황아왕후(皇娥王后)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헌덕왕의 자식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자식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없는 가운데, 모순되는 기록이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822년(헌덕왕 14), 헌덕왕은 동생인 김수종을 부군(副君)으로 삼고, 2개월 뒤에는 김충공의 딸 정교(貞嬌)를 태자비로 삼았다. 태자비라는 표현에서 태자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三國史記)』 녹진(祿眞) 열전에서는 헌덕왕에게 아들이 없다며 상반된 내용을 전하고 있다. 이에 부군과 태자는 같은 것으로, 김수종이 곧 부군이자 태자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에서 진표율사(眞表律師)를 계승한 심지(心地, 心智)가 헌덕왕의 아들이라고 하여, 헌덕왕에게 아들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헌덕왕에게 아들이 없었다는 녹진 열전의 기록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헌덕왕에게는 이름을 알 수 없는 태자와 심지라는 두 아들이 존재했고, 며느리로 정교부인이 있었다고 하겠다.

헌덕왕은 809년 왕위에 올라 826년까지 18년간 신라를 통치했다. 826년 10월, 왕이 죽자 천림사(泉林寺) 북쪽에 장사지냈다. 현재 헌덕왕릉은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에 위치하고 있다. 헌덕왕이 죽은 뒤에는 동생 김수종이 왕위에 올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이 되었다.

3 즉위 이전의 활동과 왕위계승

헌덕왕 김언승은 790년(원성왕 6)에 당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다녀온 후 대아찬(大阿飡)의 관등을 제수받았다. 다음해에는 제공(悌恭)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잡찬(迊飡)에 올랐다. 그리고 794년(원성왕 10)에는 시중(侍中)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에는 관등이 이찬(伊湌)까지 오르며 재상이 되었으며, 이어서 병부령(兵部令)에도 올랐다. 원성왕의 손자였던 김언승은 원성왕대에 주요 관직을 역임하면서 조부의 정치를 도왔고,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대해 나가고 있었다.

원성왕이 죽고 소성왕(昭聖王)이 왕위를 이었으나,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죽었다. 소성왕의 태자였던 김청명(金淸明)이 즉위해 애장왕이 되었지만, 당시 그의 나이는 13세에 불과했다. 이에 병부령이자 숙부였던 김언승이 애장왕을 대신해 섭정을 펼치게 되었다. 김언승은 801년(애장왕 2) 2월, 어룡성(御龍省)의 장관인 사신(私臣)에 올랐다. 원래 어룡성은 내성(內省)에 소속된 국왕 근시기구였다. 그런데 어룡성의 장관이 내성과 같은 사신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김언승이 섭정을 위해 어룡성을 내성으로부터 분리·독립시키고 그 지위도 격상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김언승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등(上大等)에 취임해, 애장왕대의 정치를 주도하게 된다.

애장왕대 주요 정책으로는 전반기의 오묘제(五廟制) 개혁과 후반기의 공식(公式) 20여 조 반포를 들 수 있다. 먼저 오묘제를 살펴보면, 오묘제는 신라 중대를 연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때 성립되었다. 이후 혜공왕(惠恭王) 때 개정을 거쳤고, 801년(애장왕 2)에 이르러 또 한 번의 개혁을 하게 된다. 이전의 오묘제에서는 시조를 비롯하여 태종대왕(太宗大王)과 문무대왕(文武代王)을 세세불훼지종(世世不毁之宗)으로 삼았다. 하대를 연 원성왕 역시 이 제도에 따라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만을 사당에 모실 수 있었다. 그런데 애장왕 대의 개혁에서는 태종대왕과 문무대왕의 사당을 별도로 세우고, 시조와 애장왕의 직계 4대조로 5묘를 구성한 것이다. 이로써 이전과는 구별되는 원성왕계라는 새로운 왕통을 확립하고, 원성왕계의 결속을 다지게 되었다.

805년(애장왕 6) 8월에는 공식 20여 조가 반포되었다. 공식의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애장왕 대 관청의 장‧차관직 명칭이 중국식으로 개정된 것을 통해, 일종의 한화정책을 추구하는 방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공식의 반포에 뒤이어 새로운 사찰의 창건을 금지하고 불교행사에서 사치스러운 물품의 사용을 제한하는 교서를 내렸다. 이것은 불교계의 사치로 인한 사회적 폐단을 막기 위한 것인 동시에, 사찰과 연계되는 귀족세력의 성장을 견제하려는 의도이기도 했다. 또한 808년(애장왕 9)에는 사신을 보내 여러 군과 읍의 경계를 획정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처럼 공식의 반포로 시작된 정치개혁은 중앙집권과 왕권의 강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정치개혁은 애장왕이 18세가 되는 805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당시에도 김언승은 여전히 상대등에 있었고, 김언승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 하던 김수종(金秀宗)이 시중을 맡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애장왕이 친정을 행사했다고 하더라도, 그 방향이 전적으로 애장왕의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실시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808년(애장왕 9)에 신라의 사신이 당에 갔을 때, 당 황제가 김언승과 김중공(金仲恭)에게 문극(門戟)을 하사했다고 한다. 문극은 공신이나 고관의 집 앞에 세워놓는 의례용 창을 말한다. 당시 김언승은 당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세를 떨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애장왕 후반대의 정치개혁은 오히려 김언승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권력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김언승은 809년(애장왕 10) 7월, 동생인 김제옹(金悌邕)과 함께 군사를 일으킨 후 궁궐로 들어가 애장왕을 시해했다. 『삼국유사』에는 김언승과 김수종이 애장왕을 시해했다고 되어 있다. 이후 김언승은 스스로 왕위에 올라 헌덕왕이 되었다. 신라는 하대 초 원성왕-소성왕-애장왕에 걸쳐 적자손에 의해 왕위가 계승되었다. 그러나 헌덕왕이 조카를 죽이고 즉위함으로써 이러한 원칙이 무너졌다. 이것은 기록상 신라 최초의 찬탈이며, 이후 치열한 왕위계승전의 한 배경이 되었다.

4 헌덕왕대의 정치와 사회

『삼국사기』에는 헌덕왕의 즉위 직후인 809년 8월, 당에 사신을 보내 애장왕의 죽음을 알렸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810년 당에서 신라왕에게 내린 칙서에 의하면, 당은 그때까지도 신라의 왕을 김중희(金重熙) 즉, 애장왕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헌덕왕이 신라왕으로 책봉을 받은 것은 812년(헌덕왕 4)에 이르러서였다. 이것은 적자손으로 이어지던 왕위계승 원칙을 파괴하고, 왕위를 찬탈한 헌덕왕이 이 사실을 곧바로 중국에 알리지 못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왕위 찬탈에 이어 당으로부터의 책봉이 늦어지자, 헌덕왕은 즉위 초부터 정치적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헌덕왕대의 기록에서 뚜렷한 정치개혁의 모습이 확인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가 주도했던 애장왕대의 개혁정책이 그대로 이어져, 왕권 강화를 지향하고 있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이 시기 정국을 주도한 것은 헌덕왕의 동생인 김수종과 김충공을 비롯하여 왕의 즉위에 공을 세운 귀족들이었다. 그리고 육두품 세력들이 이에 협조하였다. 김충공에게 인재의 쓰임과 인사처리 방법에 대해 진언했던 녹진(祿眞)이 대표적이다. 6두품은 신분의 한계로 고위 관직에 오르기 어려웠으나, 국왕의 왕권강화 정책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였다. 그러나 소수의 왕족과 지지세력을 중심으로 한 헌덕왕의 정국 운영은 정치에서 배제되거나 정책에 반대하는 귀족세력들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김헌창의 난으로 나타났다.

한편, 헌덕왕대에는 자연재해로 인한 사회 불안이 매우 심각했다. 특히 814년(헌덕왕 6)부터 821년(헌덕왕 13)까지는 한 해를 제외하고 매년 자연재해와 기근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815년(헌덕왕 6)에는 서쪽 지방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고, 819년(헌덕왕 10)에는 사방에서 초적(草賊)이 일어났다. 그러나 헌덕왕은 군사를 보내 이들을 토벌하게 할 뿐,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국의 절동(浙東)지방까지 가서 먹을 것을 구하거나, 굶주림 끝에 자식을 팔아 생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처럼 헌덕왕대에는 정치적으로 불안요소가 내재하고 있었고, 기근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극심했다. 백성들은 살기 위해 유망하거나 도적이 되었지만, 헌덕왕이 이들을 강경 진압함으로써 백성들의 불만은 더욱 쌓여 갔다. 이러한 지방사회의 불안은 이들이 이후 김헌창의 난에 적극 가담하는 한 배경이 되었다.

5 김헌창의 난

헌덕왕대의 정치·사회적 모순은 822년(헌덕왕 14) 3월, 김헌창의 난으로 폭발했다.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이었던 김헌창은 반란을 일으켜 나라 이름을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慶雲)으로 정했다. 이때 내세운 반란의 명분은 아버지 김주원이 원성왕 때문에 억울하게 왕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난의 실질적인 이유는 헌덕왕이 추진해 온 왕권강화 정책에 대한 반발이자, 이 과정에서 견제 받고 소외된 귀족들의 불만이었다. 김헌창역시 애장왕 때에는 시중을 역임하는 등 중앙 정계에서 활동했으나, 헌덕왕 즉위 후 시중에서 물러났고, 무진주(武珍州, 광주광역시)와 청주(菁州, 진주), 웅천주(熊川州, 공주) 등 지방을 전전하며 헌덕왕의 견제를 받는 상황이었다.

김헌창은 무진주와 완산주(完山州, 전주), 청주·사벌주(沙伐州, 상주) 등 4개 주와 국원경(國原京, 충주)·서원경(西原京, 청주)·금관경(金官京, 김해) 등을 장악했다. 반란세력은 신라의 9개 주 중에 4개 주를 장악했는데, 충청도 전지역과 경상도의 서부와 남부 등 수도 경주를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처럼 광범위한 지역을 짧은 시간동안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김헌창의 난에 호응하는 세력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세력들은 곧 헌덕왕대의 정치에서 배제된 귀족세력들일 것이고, 여기에 지방사회의 불안도 일조했을 것이다.

김헌창이 난을 일으키자, 청주도독 향영(向榮)이 탈출했고, 완산주 장사 최웅(崔雄) 등은 경주로 도망쳐 반란의 발생 사실을 알렸다. 이에 조정에서는 8명의 장수를 뽑아 서울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장웅(張雄)을 선발대로 출발시키고, 이어 위공(衛恭)과 제릉(悌凌)이 출정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균정(金均貞), 김웅원(金雄元), 김우징(金祐徵) 등이 3군을 맡아 난을 진압하러 갔다. 이 외에 화랑 명기(明基)와 안락(安樂)이 종군을 청하여, 황산(黃山)과 시미지진(施彌知鎭)으로 나아갔다.

김헌창은 주요 길목에서 관군을 기다렸다. 그러나 장웅이 도동현(道冬峴)에서 승리하고, 위공과 제릉은 장웅과 합세하여 삼년산성에서 승리했다. 균정 등도 성산(星山)에서 적을 섬멸했다. 이에 여러 군대가 웅진에 이르러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김헌창은 몸을 피해 성에 들어가 있다가, 성이 함락되기 직전 자결하였다. 이로써 김헌창의 난은 한 달이 못 되어 끝나고 말았다. 김헌창의 난에서 살아남은 아들 김범문(金梵文)은 825년(헌덕왕 17)에 고달산(高達山) 도적 수신(壽神) 등 100여 명과 함께 재차 반란을 꾀하였다. 이들은 평양(平壤)에 도읍을 세우고자 북한산주(北漢山州)를 공격했으나, 역시 도독 총명(聰明)에게 진압되었다.

김헌창의 난은 헌덕왕을 지지하는 세력과 무열왕계를 지지하는 세력 간의 갈등이 빚어낸 것이었다. 이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신라 하대에 계속된 왕족 및 귀족세력의 분열에 있었다. 여기에 사회적 혼란과 지방사회의 불안이 더해지면서 전국적 규모의 반란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 난의 결과, 김헌창의 종족(宗族)을 포함하여 그를 따르던 무리 239명이 처형되었다. 여기에는 물론 무열왕계 귀족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써 무열왕계는 왕위계승경쟁에서 완전히 배제되었고, 중앙정치에서도 주변적 위치에 머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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