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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공왕[惠恭王]

신라 중대의 종말을 고하다

758년(경덕왕 17) ~ 780년(선덕왕 1)

혜공왕 대표 이미지

성덕대왕신종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혜공왕은 신라 제36대 왕이다. 8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해 어머니인 만월태후(滿月太后)가 오랜 시간을 섭정했다. 재위기간 중에는 각종 천재지변과 귀족들의 반란과 권력다툼이 끊이지 않았는데, 결국 귀족들의 반란과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혜공왕도 시해되고 말았다. 혜공왕의 죽음으로 신라의 중대가 끝나고, 이후 즉위한 선덕왕에 의해 신라 하대가 시작되었다.

2 혜공왕의 가계와 즉위과정

혜공왕의 성은 김(金), 이름은 건운(乾運)이다. 아버지는 제35대 경덕왕(景德王)이고, 어머니는 서불한(舒弗邯) 김의충(金義忠)의 딸인 만월부인(滿月夫人)이다. 첫째 왕비 신보왕후(新寶王后)는 이찬(伊湌) 유성(維誠)의 딸이고, 둘째 왕비는 이찬 김장(金璋)의 딸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각간(角干) 위정(魏正)의 딸 신파부인(神巴夫人)과, 각간 김장(金將)의 딸 창창부인(昌昌夫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자식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재위기간은 765년부터 780년까지이다.

혜공왕이 태어난 날은 758년(경덕왕 17) 7월 23일로, 삼국시대의 왕 중에서 출생 연월일을 정확히 알 수 있는 드문 경우이다. 『삼국유사』에는 혜공왕의 출생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경덕왕은 첫 번째 왕비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왕비를 폐하고, 만월부인을 후비로 맞았다. 오랫동안 아들을 원하던 경덕왕은 어느 날 표훈(表訓) 대덕(大德)을 불러 상제(上帝)에게 아들을 얻도록 청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표훈은 상제를 만난 후 딸은 가능하나 아들은 안 된다는 상제의 말을 전하였다. 그러자 경덕왕은 딸을 아들로 바꿔줄 것을 청하였다. 상제는 딸을 아들로 바꿀 수는 있으나, 그러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라 경고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덕왕은 아들을 얻어 대를 잇기를 원하였다. 이에 만월부인이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혜공왕이다.

이처럼 혜공왕의 출생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딸을 아들로 바꾼 결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혜공왕이 태어나던 날에는 하늘에 천둥과 번개가 크게 치고, 절 16곳에 벼락이 떨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출생 상의 문제 때문에 혜공왕은 어렸을 때부터 여자들이 하는 장난을 하고, 치장하기를 좋아하는 등 왕으로서의 자질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덕왕의 유일한 아들인 혜공왕은 3세 되던 760년(경덕왕 19) 7월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5년 후 경덕왕이 사망하자,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정사를 돌보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어머니인 만월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었다.

3 혜공왕의 왕권 강화 노력

신라 중대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은 ‘전제왕권’이라는 말에 잘 집약되어 있다. 삼국 통일의 완성으로 왕권이 신장되고, 국가권력의 기반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유력 귀족세력들을 성공적으로 제거하였으며, 국왕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유교적 이념과 관료제를 발전시키면서 신라 중대의 왕은 전제적 권한을 누린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혜공왕의 아버지인 경덕왕대 후반부터는 중대적 질서가 크게 흔들리면서, 진골귀족들의 위상이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경덕왕이 말년에 정치에 뜻을 잃고 향락에 빠져 지내자, 경덕왕의 개혁을 지지하던 측근들마저 곁을 떠나는 등 왕의 주변에서 인재가 빠져나갔다. 특히 나이 어린 혜공왕이 즉위하고 만월태후의 섭정이 이루어지자, 귀족들의 반발은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혜공왕과 만월태후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을 하였다.

혜공왕은 즉위 다음해인 766년에 직접 신궁(神宮)에서 제사를 지냄으로써 시조신에게 자신의 즉위를 알렸다. 그리고 767년(혜공왕3)에 당에 사신을 보내 책봉을 요청했다. 당은 이듬해 창부낭중(倉部郎中) 귀숭경(歸崇敬)을 보내 책봉조서와 부절(符節)을 전달했다. 이 때 혜공왕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신라왕(新羅王)에 봉하고, 어머니 만월부인 역시 대비(大妃)로 책봉하였다. 이로써 혜공왕과 만월부인은 국제적으로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혜공왕대의 왕권 강화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점은 오묘제(五廟制)의 개혁이다. 오묘제는 일종의 종묘제도로, 『예기(禮記)』의 규정에 따라 시조를 중심으로 왕의 4대조를 모시는 중국식 제도이다. 신라에서는 무열왕이 처음 오묘제를 시행한 이래, 중국 상고의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를 시조로 삼고 왕의 4대조에 대한 제사를 지내왔다. 그런데 혜공왕은 이것을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인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을 시조로 삼고, 삼국통일에 공을 세운 무열왕(武烈王)과 문무왕(文武王)을 포함한 왕의 2대조에게 제사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는 방식과 제사일도 지정하였다. 이를 통해 오묘제는 신라 독자의 방식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오묘제의 개혁은 776년(혜공왕 12)에 단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는 혜공왕이 18세가 되어 친정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775년(혜공왕 11)의 바로 다음해이다. 혜공왕은 자신의 친정 시작에 맞춰 오묘제를 개혁함으로써 새로운 왕의 즉위에 버금가는 효과를 거두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혜공왕은 이 외에도 유능한 인재를 천거하게 하거나, 지방을 순시하고, 중국에 해마다 사신을 보내는 등 정치력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 그러나 재위기간 내내 천재지변과 재이현상이 끊이지 않았고, 귀족들의 반란이 빈번하여 이러한 노력이 효과를 거두기는 어려웠다.

4 혜공왕대의 정치·사회적 혼란

혜공왕대의 왕권강화 노력이 실패하고, 중대사회의 모순이 본격적으로 드러남에 따라 귀족들의 권력쟁탈전이 심화되었다. 때문에 혜공왕 재위 16년 동안 각종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먼저 768년(혜공왕 4) 7월, 일길찬 대공(一吉飡 大恭)과 아우 대렴(大廉)이 반란을 일으켜 33일간 왕궁을 둘러쌌다. 이에 왕군이 이를 평정하고 9족을 멸하였다. 『삼국유사』에서는 이 때 왕도 및 5도 주군(州郡)의 96각간이 서로 싸워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졌는데, 난리가 3개월 만에 멎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공의 난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이를 진압한 공으로 많은 사람이 상을 받기도 했다. 많은 귀족들이 반란에 참여한 만큼, 신라 사회 전체를 뒤흔들 정도로 파급력도 컸다.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은 혜공왕의 출생 일화에서 표훈이 말했던 나라의 위태로움이 바로 이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대공의 난은 진압되었지만, 2년 후인 770년(혜공왕 6)에는 대아찬(大阿飡) 김융(金融)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775년(혜공왕 11) 6월에는 김은거(金隱居)가 반란을 일으켰고, 같은 해 8월에는 염상(廉相)과 정문(正門)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음을 맞았다. 이 중 김은거는 전(前) 시중으로 혜공왕의 정치를 측근에서 도왔던 인물이고, 정문 역시 현직 시중으로서 친왕적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들은 전년에 반왕파의 거두인 김양상(金良相, 후의 선덕왕宣德王)이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된 것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킨 것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귀족들은 혜공왕을 둘러싼 입장에 따라 세력이 분열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780년(혜공왕 16) 2월, 김지정(金志貞)이 세력을 규합하여 궁궐을 에워싸고 침범하였다. 2개월 뒤에 김양상이 김경신(金敬信, 후의 원성왕元聖王)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김지정 일파를 죽였다. 그러나 이미 혜공왕은 김지정 일파에게 시해된 뒤였다.

혜공왕 대에는 이외에도 각종 재이현상과 천재지변이 계속되었다. 즉위 이듬해 정월에 해가 두 개가 나타난 것을 시작으로, 돌연변이 송아지가 태어나고 하늘에서 북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별의 움직임이 달라지고, 땅이 진동하고, 호랑이가 궁궐에 나타나는 등 불길한 조짐의 끝에는 어김없이 반란이 일어났다. 지진과 가뭄, 누리의 피해 등 자연재해도 잇달았다. 자연히 민심이 돌아서고 사회적으로도 불안과 혼란이 팽배할 수밖에 없었다.

5 혜공왕의 죽음과 역사적 평가

에밀레종이라고도 알려진 성덕대왕신종은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왕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러나 경덕왕의 생전에는 완성하지 못하고, 아들인 혜공왕대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다. 그 시기는 771년(혜공왕 7) 12월 14일로, 만월태후가 섭정을 하고 있던 때이다. 종의 명문에는 혜공왕을 ‘聖君’으로 지칭하는 등 왕과 만월부인에 대한 찬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의 왕에 대한 의례적인 표현이지,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평가는 아닐 것이다.

혜공왕의 치세에 대해서 『삼국사기』에서는 장성해서도 음악과 여자에 빠져 절도가 없었고, 잦은 천재지변으로 민심이 등을 돌려 나라를 불안하게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김지정 등이 반란을 일으켜 혜공왕과 왕비를 시해하였다고 한다. 즉, 왕의 무능함과 무절제를 혼란의 원인으로 평가한 것이다. 『삼국유사』에서는 태후의 섭정을 혼란의 원인으로 지목하였다. 그리고 원래 여자였어야 할 혜공왕이 남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성 정체성에 문제가 있었고, 이로 인해 김지정의 난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또한 혜공왕을 시해한 사람을 김지정이 아닌 김양상 일파로 기록하고 있는데, 시해 주체에 대해서는 연구자들도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반란의 와중에 맞이한 혜공왕의 죽음은 신라 사회에 일대의 변화를 초래하게 된다. 원래 신라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의 즉위로 중대가 시작된 이래, 무열왕의 자손들이 왕위를 계승해 왔다. 그런데 혜공왕이 죽고 선덕왕이 즉위하면서 무열왕계에 의한 왕위계승이 단절되고 만 것이다. 선덕왕은 내물왕의 후손으로, 이들은 중대에는 왕위계승권을 갖지 못한 집단이었다. 이 같은 왕위계승 상의 변화는 신라인들에게도 매우 크게 인식되어서, 혜공왕에 이르러 신라 중대가 끝난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새로 즉위한 선덕왕은 신라 하대의 문을 연 첫 주인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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