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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치상지[黑齒常之]

백제부흥군의 장수에서 당의 무장(武將)으로

미상 ~ 689년(신문왕 9)

흑치상지 대표 이미지

삼국사기 흑치상지 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 말의 귀족이자 부흥운동을 주도한 장수이다. 백제가 멸망하자 나당연합군에 항복했다가 도망쳐 백제부흥운동을 시작했다. 이후 당에 항복하여 자신의 근거지였던 임존성(任存城)을 함락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써 부흥운동을 종식시켰다. 이후 당으로 들어가 여러 정벌에 참여해 공을 세웠다.

2 흑치(黑齒) 가문의 성립과 흑치상지의 성장과정

흑치상지의 성은 흑치, 이름은 상지(常之), 자(字)는 항원(恒元)이다. 630년(무왕 31) 백제의 서부(西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차(沙次), 조부는 덕현(德顯), 증조부는 문대(文大)이다. 어머니와 부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당의 무장(武將)인 흑치준(黑齒俊)이 그의 장남이다. 흑치상지는 689년 9월, 조회절(趙懷節)과 반란을 도모했다는 주흥(周興)의 무고로 감옥에 갇혔다가 10월에 사망했다.

흑치상지의 조상은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扶餘氏)였으나, 흑치 지방에 봉해졌기 때문에 자손들이 이것을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흑치 가문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성립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흑치를 말 그대로 ‘검은 이’로 이해해서 필리핀 지방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흑치상지가 백제부흥운동을 전개했던 예산 지역의 옛 지명을 근거로 이곳이 흑치라고 주장하며, 여기에서 나아가 백제의 지방통치제도인 담로제와 연결시키기도 한다. 이 경우 ‘흑치’ 가문의 성립은 흑치상지 출생 이전이 된다. 그런가하면 흑치상지가 당에서 활약하며 분봉을 받은 후, 백제식 성을 버리고 당시 변방을 의미하는 말인 흑치를 성으로 취했다고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흑치’ 가문은 흑치상지가 당으로 간 이후 성립된 셈이다.

현재로서는 어느 것이 정확한 설명인지 알 수 없다. 다만 흑치상지의 집안이 원래 왕족이었고, 대를 이어서 달솔(達率)을 역임할 정도로 유력한 귀족가문이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흑치상지의 증조부와 조부, 아버지까지 3대가 모두 달솔을 역임했고, 흑치상지 역시 20살이 되기 전 젊은 나이에 달솔에 올랐기 때문이다.

흑치상지는 어려서부터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나 『사기(史記)』, 『한서(漢書)』 등 유학과 역사를 익혔다. 뿐만 아니라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장으로서의 자질이 뛰어났고, 음양오행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고 한다. 이처럼 문무(文武)의 소양을 겸비했던 흑치상지는 20세가 되기 전에 아버지의 지위를 이어서 달솔에 올랐고 후에는 풍달군장(風達郡將)을 역임했다. 군장은 민정과 군정 모두를 담당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어릴 적 교육과 경험이 큰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3 백제부흥운동기의 활동

흑치상지의 활동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 과정에서이다.

660년(의자왕 20) 7월, 사비성이 함락되고, 웅진성으로 피난 갔던 의자왕이 웅진방령 예식진(熊津方領 禰寔進)에 의해 잡혀와 항복을 함으로써 백제가 멸망했다. 흑치상지도 이 때 나당연합군에 항복을 했다. 당시 그의 나이 31세였다. 그러나 나당군이 의자왕을 감금하고 백제의 백성들을 노략질하자 그를 따르는 장수 10여 명을 이끌고 달아났다. 그리고 나당군에 잡혔다가 도망친 사람들을 모아 임존산(任存山)을 거점으로 백제부흥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흑치상지의 기치 아래 모여든 사람들이 열흘 만에 3만이 넘었다. 8월 26일, 소정방은 나당군을 임존성으로 보냈지만 이기지 못했다. 이후 흑치상지군은 200여 성을 회복할 정도로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이후부터 유인궤(劉仁軌)에게 항복하기 이전까지 3년여 간의 활동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임존성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나당군에 대항했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한편 당은 유인원(劉人願)을 비롯한 군사 1만을 남겨놓고 9월 3일에 백제를 떠났다. 신라군도 김인태(金仁泰) 등 7천의 군사를 남겨놓고 신라로 돌아갔다. 그러나 부흥운동군의 공격은 더욱 거세져 사비성과 웅진성에 있던 나당군을 압박·고립시키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당과 신라가 고구려 공격에 나서면서 장기화되었다. 그러던 중 661년 9월(혹은 662년 5월), 복신(福信)과 도침(道琛)이 왜에 있던 부여풍(扶餘豐)을 부흥군의 왕으로 옹립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부흥군은 사기가 크게 떨어졌고, 나당군은 이를 틈타 웅진강 동쪽의 성책들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웅진성은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663년 6월에는 부여풍이 다시 복신을 살해하는 등 부흥군 지도층의 내분이 격화되었다. 그러자 나당연합군은 당에서 증원된 부여융(扶餘隆)을 비롯한 손인사(孫仁師)의 군대와 합세하여 9월 7일에 주류성을 함락시켰다.

주류성 함락 후 나당군은 임존성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거센 저항에 한 달이 넘도록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후퇴하였다. 이 때 임존성에 있던 흑치상지는 별부장 사타상여(別部將 沙咤相如)와 함께 당군에 항복했다. 당시 당 고종이 사신을 보내 회유했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부여융의 항복 권유가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흑치상지와 사타상여는 당의 군사와 군량을 받아서 임존성 공격의 선봉에 섰다. 그리고 유인궤(劉仁軌)의 군대가 뒤따라 들어가 임존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그의 나의 33세였다. 임존성에서 마지막까지 항거하던 지수신(遲受信)은 고구려로 달아났다. 이로써 백제 부흥운동은 막을 내리게 된다.

4 당에서의 활동

이후 백제고지에는 유인궤가 남아서 전후 처리를 하고, 흑치상지는 부여융과 함께 손인사의 군대를 따라 당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장안(長安) 만년현(萬年縣)에 편적되었다. 당이 수도에 거주할 수 있도록 허락한 백제인은 의자왕과 왕족들, 그리고 스스로 당에 투항한 흑치상지와 같은 인물들뿐이었다. 당 조정의 배려 덕분에 이듬해인 664년 초, 부여융이 웅진도독이 되어 백제고지로 귀환할 때 흑치상지도 절충도위(折衝都尉)를 받고 함께 돌아와 웅진도독부의 군장이 되었다. 그러나 신라가 점차 백제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고, 671년(무무왕 11)에 사비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면서부터는 사실상 웅진도독부가 기능을 상실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부여융이나 흑치상지가 백제 지역을 다스리는 역할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웅진도독부가 폐지되자 흑치상지는 다시 당으로 돌아갔다. 흑치상지는 672년에 충무장군행대방주자사(忠武將軍行帶方州刺史)에 제수된 것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승진을 거듭했다. 그리고 당의 중앙군 중 하나인 좌령군위(左領軍衛)의 장군에 임명되면서 부양군(浮陽郡)의 개국공(開國公)에 분봉되고 이곳을 식읍으로 하사받았다.좌령군 장군은 당에 투항한 이민족 장군에게 종종 수여되던 군직으로, 그만큼 당 황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이후 흑치상지는 당의 무장으로서 여러 전쟁에 참여했다. 678년 9월에 토번(吐番)이 침입해오자 대총관 이경현(李敬玄)을 따라 출정했는데, 본진이 크게 패하였다. 그러자 흑치상지는 결사대 500명을 이끌고 적군을 습격해 토번군을 후퇴시켰다. 680년과 681년에도 토번군을 기습공격해 물리쳤는데, 토번이 흑치상지를 매우 두려워했다고 한다.

684년에는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전횡에 반발해 서경업(徐敬業)이 남쪽 양주(揚州)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흑치상지는 진압군으로 참여해 또 한 번 공을 세웠다.

686년에는 돌궐(突厥)이 침입했는데, 흑치상지가 군대를 이끌고 가서 막았다. 이 공으로 연국공(燕國公)과 식읍 3천호에 봉해졌다. 이후 687년에도 돌궐이 유주(幽州)와 삭주(朔州) 등을 잇달아 공격했다. 흑치상지는 돌궐의 군사를 대파하고, 고비사막 이북으로 쫓아냈다.

흑치상지에게 위기가 닥친 것은 697년 10월, 돌궐과의 싸움에서였다. 우감문위중랑장(右監門衛中郎將) 찬보벽(㸑寶壁)은 측천무후에게 표를 올려 자신이 돌궐의 잔병들을 끝까지 추격하겠다고 했다. 이에 측천무후는 흑치상지에게 찬보벽의 군사를 멀리서 호응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찬보벽은 흑치상지를 기다리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 갔다. 그리고 돌궐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찬보벽은 죽음을 맞았고, 흑치상지 역시 이에 연좌되어 전공이 없어지는 벌을 받았다.

5 흑치상지의 죽음과 사후 평가

689년(영창 원년) 9월, 흑치상지는 응양장군 조회절(鷹揚將軍 趙懷節) 등과 반역을 모의했다는 죄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측천무후는 서경업의 반란 이후로 혹리(酷吏)들을 기용해서 공포정치를 행하고 있었는데, 당시 혹리로 이름을 떨치던 주흥(周興)이 흑치상지를 모함한 것이다. 이로 인해 흑치상지는 조회절과 함께 처형되었다(10월). 혹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감옥에서 목을 매고 자살했다고도 한다. 당시 흑치상지의 나이는 60세였다.

흑치상지의 억울한 죽음은 아들 흑치준에 의해 9년 만에 신원되었다. 698년, 측천무후는 흑치상지를 신원하는 제(制)를 내리고, 그를 좌옥검위대장군(左玉鈐衛大將軍)에 추증했다. 이듬해 1월에는 흑치상지 묘의 개장(改葬)을 허락하는 조칙을 내렸고, 2월에 낙양 북망산(北邙山)으로 이장되었다. 이 때 측천무후가 담당 관리를 파견하고 많은 재물과 노복들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현재 흑치상지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는 상황이다. 흑치상지가 백제를 배신하고 부흥운동을 끝내는데 앞장섰다는 점에서 역사적 평가를 박하게 내리기도 한다. 반면에 당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쳐 『구당서』와 『신당서』 열전에 실릴 정도로 성공한 이민자의 한 모델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리고 백제의 멸망을 지켜보면서 부흥운동을 일으켰지만 실패했고, 타국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기는 했지만 무고로 희생당하고 마는 비운의 인물로 보는 입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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