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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흥[慶復興]

혼돈의 고려말, 정치적 격랑을 모두 지나온 재상

미상 ~ 1380년(우왕 6)

1 개요

경복흥(慶復興)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부터 우왕(禑王) 때에 걸쳐 활동한 정치가로, 생년은 미상이며 몰년은 1380년(우왕 6)이고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공민왕대에 기철(奇轍)을 숙청할 때 일조하여 일등공신이 되었고 이후 재상을 역임하였으나 신돈(辛旽)과 대립각을 세우고 그를 제거하려다 역으로 장형을 받고 유배되었다. 신돈 실각 후 다시 복직되었으나 우왕대에 이인임(李仁任)에 의해 탄핵당하여 유배지 청주(淸州)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2 출생 배경과 입사

경복흥은 청주 사람으로 원래 이름은 천흥(千興)이었으나 후에 복흥으로 개명하였다. 경씨(慶氏)는 청주 단본(單本)인데, 고려 초부터 청주를 지배하던 주요 호족세력으로 청주 용두사철당간기(龍頭寺鐵幢竿記) 에도 기록되어 있는 경씨에서 이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청주 경씨가 언제 중앙으로 진출했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적어도 고려 중기인 문종(文宗) 때(1046~1083)에는 진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명종(明宗) 때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중앙의 관직을 받게 된 경진(慶珍)의 이름이 『고려사』에 등장하며, 그 아들로 정중부를 제거하고 스물여섯의 젊은 나이에 무신정권의 최고 집권자가 된 경대승(慶大升)은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후 13세기에 들어 경씨 3대가 연이어 고위관직에 오르게 되는데, 고종(高宗) 때 경번(慶蕃)이 과거에 급제하여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냈고 그 아들인 경수(慶綏)는 충렬왕(忠烈王) 때 과거에 급제하여 전법판사통례문사(典法判事通禮門事)를 지냈으며, 경수의 아들 경사만(慶斯萬)이 좌부대언(左副代言)과 우대언(右代言)을 역임하게 된다. 경사만은, 충숙왕(忠肅王)의 비로 충혜왕(忠惠王)과 공민왕을 낳게 되는 명덕태후 홍씨(明德太后 洪氏)의 조카딸과 결혼하면서 궁중에 자주 드나들며 태후를 가까이 모시는 것이 환관과 다름없어 사람들의 비난을 샀다고 한다. 경사만의 아들이 바로 경복흥이다. 곧 경복흥은 고려 고종 이래 청주 경씨가 중앙의 권문세족(權門世族)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에 태어나 관계에 진출하게 되는 것이다. 경복흥은 처음에 감찰장령(監察掌令)으로 천거되었다가 공민왕 초에 군부사판서(軍簿司判書)로 서용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3 기철 숙청과 홍건적 토벌의 공신

경복흥이 관직에 나아간 14세기 후반 공민왕 초는 국내, 국외적으로 복잡하고 혼란한 시기였다. 특히 정국 운영과 관련하여 기철을 필두로 한 기씨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기철’ 등이 임금의 위세를 빙자하여 나라의 법도를 뒤흔드는 일이 벌어졌다. 자신의 기쁨과 분노에 따라 〈관리의〉 선발과 승진을 조절하니 정부의 명령[政令]이 이로 인해 늘거나 줄었고, 남이 땅을 갖고 있으면 그를 제거하고, 또는 인민이 있으면 이를 빼앗았다. 이러한 일은 과인이 부덕한 소치인가, 아니면 기강이 제대로 서지 않아 제어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긴 것인가?’ 라는 공민왕의 인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기씨 일가는, 몽골에 공녀로 끌려갔던 기씨 처녀가 순제(順帝)의 눈에 띄어 총애를 얻고 순제의 장남인 애유식리달랍(愛猷識里達臘)을 낳아 황후가 되고 그 아들이 황태자에 책봉되면서 번성하였다. 그러자 고려에 남아 있던 그 아버지와 오빠들을 비롯한 기씨 일족은 고위관직을 독차지하고 고려말기 정계를 주름잡으며 위세를 떨쳤는데, 기씨 일가의 이러한 행태는 공민왕 재위 초반 반원개혁정치의 주된 불씨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복흥은 공민왕의 뜻을 받들어 개혁정치에 참여하고 특히 1359년(공민왕 8) 역모를 꾸민 기철 일파를 숙청하는데 일조하여 일등공신에 오르게 되었다. 경복흥은 이후 고위관직을 내리 역임하게 된다.

공민왕대는 내우외환으로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도 잦아 변경이 어지러웠다. 특히 1359년(공민왕 8) 12월과 1361년(공민왕 10) 10월, 홍건적의 두 차례 침입은 고려에 큰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에 홍건적 토벌에 나섰던 경복흥은 1360년(공민왕 9) 그 공로로 진충동덕협보공신(盡忠同德協輔功臣)의 호를 받고 평장사(平章事)와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랐다. 이어 1361년(공민왕 10)에 홍건적이 물러나자 왕을 호종했던 공을 인정받아 일등공신이 되었다.

4 기황후의 공민왕 폐위 모의에 맞선 공신

한편 고려에서 친정이 거의 몰살되다시피 한 기황후는 몽골에서 공민왕에게 복수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마침 기철 세력이 처단될 때 고려를 배반하고 몽골에 도망가 있던 최유(崔濡)가 공민왕을 참소하였는데, 이를 구실삼아 1363년(공민왕 12)에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德興君)을 옹립하기로 모의하였다. 덕흥군은 충선왕(忠宣王)의 서자라고도 하나 충선왕이 내쫓은 궁인(宮人)이 몽골의 백문거(白文擧)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라는 이야기도 있는 등, 신분이 불분명한 인물이었다. 애초에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가 공민왕이 즉위한 후 몽골로 도망하였다. 기황후는 이 덕흥군을 추대하여 최유와 함께 군사 1만을 이끌고 고려로 가도록 하였다. 사실 이와 같은 조처는 원의 권위로 공민왕을 폐립하고 덕흥군을 세우는 것으로, 공민왕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거나 새로 부임해오는 고려왕 덕흥군을 실력으로 저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공민왕은 인심을 추스르고 군사를 일으켜 저항하였는데, 이 때 경복흥은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元帥)로 출정하여 안주(安州)에 진을 치고 적진에 격문을 띄워 사람들을 회유하였다.

우리나라의 부로(父老)들과 그 자제들은 공명을 위해 혹은 황제에게 조회하기 위해 빈객이 되어 중국에 갔다. 머문 기간은 서로 다르나 객지의 밥을 먹으며 늙었으니 어찌 돌아오고 싶지 않겠는가? … 어찌하여 이제 또 스스로 고생을 자초하는가? … 너희들은 오히려 몸바쳐 은덕 갚을 줄을 모르고 그릇되게 백가의 자식(白家之息, 덕흥군을 가리킴)을 따라 스스로 반역의 그물에 걸렸다. 꼭 삼족을 멸하고, 묘를 파헤치며, 집을 웅덩이로 만들고, 토지와 가솔들을 적몰한 후에야 그만둘 것인가? … 이 글이 너희들에게 도착한 후 3일 안에 무리를 잘 타일러 신속하게 투항해 오면, 물고기가 물을 얻는 것과 같이 하고 새가 수풀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하리라. 아아, 이를 듣지 않는다면 너희들과 영원히 결별할 것이다.

그러나 최유는 덕흥군을 동반하여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는데,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 등의 장수들이 이를 격퇴하였다. 소식을 들은 공민왕은 경복흥을 좌시중(左侍中)에 임명하고 왕을 영접하는 의례와 같이 하여 군대의 개선을 맞이하였다. 곧, 경복흥은 고려말의 혼란 상황 속에서 무장들의 활약이 필요할 때 등장하여 연이은 활약으로 공신반열에 오른, 이 시기의 신흥 무장세력으로 평가받는다.

5 정국 전환의 격랑 속, 경복흥의 몰락과 재기

경복흥은 공민왕이 신돈을 기용하고 그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정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신돈은 1365년(공민왕 14)에서 1371년(공민왕 20)까지 약 6년간 공민왕의 명에 따라 왕을 대신하여 정권을 장악했던 인물이다. 공민왕은 즉위 후 여러 개혁을 단행하고자 하였으나 기씨 세력과의 갈등, 홍건적의 침입, 폐립과 덕흥군의 침입 등으로 재위 전반 어려움을 겪었고 이러한 사건들을 수습한 끝에 정국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던 무장들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공신 책봉을 통해 무장 세력의 정치적 위상이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경복흥, 최영과 같은 인물들이었다. 이는 국왕 중심의 정국 운영과 정치개혁을 도모하던 공민왕의 구상과 맞지 않는 것이었고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개혁을 추진할 인물로 등용된 자가 신돈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공민왕은 신돈을 통해 세신대족(世臣大族)에 대한 대규모 인사를 추진함으로써 그들을 관직에서 축출하는 조치를 취하여, 홍건적과 왜구 격퇴 과정에서 성장한 무장세력의 정국 주도를 견제하였다.

경복흥은, 공민왕의 지지 속에 득세한 신돈에 대립하여 1367년(공민왕 16) 10월에 그를 제거하려는 모의를 하게 된다. 이른바 오인택(吳仁澤) 사건으로, 신돈 제거 시도 중 가장 큰 사건이다. 그러나 이 기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그 결과로 경복흥은 중앙에서 제거되는 수모를 겪는다. 『고려사』 열전의 경복흥조(條)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경복흥은 비록 재상의 지위에 있었으나 정사에 참여할 수 없었고 신돈에게 배척당하여 파직되어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으로 봉해졌다. 후에 오인택(吳仁澤) 등과 더불어 신돈을 제거하려 모의하다 일이 누설되어 장형을 받고 흥주(興州)로 유배되었으며 그 가산은 몰수되고 집안 사람들은 노비가 되었다.

경번 이래 4대째 고위관직에 오르며 고려말 명문세족의 대표적 인물로 떠오른 경복흥은 재상급 신료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돈을 앞세운 공민왕의 정국 전환의 기도 속에 한순간에 몰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신돈도 공민왕에게 신뢰를 잃어 결국 실각하고 정치적 상황은 새로운 국면을 맞아 재편되기에 이른다. 공민왕은 신돈을 중용하면서 제거하였던 무장세력을 다시 소환하고 유배 갔던 경복흥은 이 때 좌시중(左侍中)을 제수 받고 다시 중앙으로 복귀하게 된다.

6 고려말의 혼란, 정치적 좌절과 죽음

1374년(공민왕 23) 고려는 뜻하지 않은 정치적 혼돈 국면에 들어서게 된다. 공민왕이 홍륜(洪倫)과 최만생(崔萬生)에게 칼로 난자당해 잔혹하게 시해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을 뿐 아니라 공민왕의 후사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공민왕은 정비로부터 후사를 얻지 못하고 신돈의 비첩인 반야로부터 아들 우(禑)를 얻었는데, 우왕의 이 출신 문제 때문에 공민왕의 후계에 대한 조정의 의견은 둘로 갈린다. 공민왕의 모후인 명덕태후와 시중이었던 경복흥은 종친들 가운데 한 사람을 세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인임 등의 강력한 주장으로 결국 우가 즉위하게 되어 정국은 이인임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형국으로 들어선다.

경복흥은 성격이 청렴하고 정직한 편으로 이인임 정권에 협력한 권신들 가운데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또한 경복흥은, 북원(北元) 사신 접대에 반대하는 정도전(鄭道傳)을 유배보낸 일이나, 지윤(池奫), 허완(許完) 등의 인물을 제거할 때 이인임의 뜻에 동조하여 함께 하였던 것으로 보아, 우왕 재위 초반에 이인임과 협력하여 정국을 운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민왕의 모후인 명덕태후와 인척관계에 있었던 경복흥은 이인임이 우왕을 추대할 당시 종실을 세우고자 도모하였고, 이인임의 권력 독점에 비판적인 인물이었다. 경복흥이 정방제조(政房提調)로 있을 때 청렴하고 어진 사람을 천거하려고 하였으나 이인임 등이 인사권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통에 할 수 있는 일이 지극히 제한되었던 것에서 드러나듯, 이인임 일파는 명덕태후의 비호 아래 있던 경복흥을 견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명덕태후의 인척이자 시중이었던 경복흥조차 관리 선발은 물론 정국 운영에 영향력을 잃을 정도로 이인임의 권력 독점이 심화된 상태였던 것이다. 더하여 이인임의 사리사욕을 위한 횡포, 국정에 대한 농단이 계속되자 경복흥은 회의를 느껴 정치에의 뜻을 잃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매일같이 술만 마시며 도당의 회의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당시 이인임은 우왕 즉위 이래 약 6년에 걸쳐 자신의 반대세력을 차차 제거해 나갔는데, 1380년(우왕 6) 정월에 명덕태후가 세상을 뜨자 숙청의 화살이 경복흥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이인임은 즉시 경복흥의 제거를 도모하여 동년 3월, 경복흥이 매일같이 술만 마시며 정무에 게으르다고 참소하여 그를 청주로 유배보낸다. 뿐만 아니라 경복흥의 당여(黨與)였던 문하평리(門下評理) 설사덕(薛師德), 밀직부사(密直副使) 표덕린(表德麟), 판서(判書) 정용수(鄭龍壽), 이을경(李乙卿), 왕백(王伯), 중랑장(中郞將) 나흥준(羅興俊) 등에게도 장형을 내려 역시 유배보냈다. 결국 이해 9월 경복흥은 유배지 청주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게 된다.

경복흥은 명덕태후의 인척으로 공민왕대에 출사하여 홍건적의 난을 퇴치하고 공민왕 초반의 개혁 정국에 참여하였으며 원의 공민왕 폐립에 맞서 덕흥군과의 전쟁을 수행하여 공민왕의 공신 반열에 올랐던 인물이다. 또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신돈을 이용한 정국 전환 과정에서 제거되었다가 신돈의 실각 이후 다시 재상으로 복귀하였고, 공민왕의 시해와 우왕 즉위 당시의 혼란상을 목도하였으나 결국 권신 이인임에게 제거당하는 말로를 겪었다. 세족이자 고위관료였던 경복흥의 이러한 인생 역정은 고려말 격동의 정치사와 정치세력의 명멸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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