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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철[奇轍]

누이동생의 힘을 믿고 고려왕을 능멸하다

미상 ~ 1356년(공민왕 5)

1 개요

기철은 충혜왕(忠惠王)대에 몽골 순제(順帝)의 제2황후가 된 기황후(奇皇后)의 오빠로, 고려후기의 대표적 부원배이다. 1356년(공민왕 5) 공민왕(恭愍王)의 개혁 과정에서 주살되었다.

2 출신 및 가족 관계

기철은 행주(幸州) 출신으로 몽골 이름은 바얀부카(伯顔不花)이다. 그의 고조부 기윤숙(奇允肅)은 최충헌(崔忠獻)에게 아부해 상장군(上將軍)이 된 이후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까지 올랐다. 아버지 기자오(奇子敖)는 음서(蔭敍)로 출사하여 선주(宣州) 수령에까지 이르렀다가 63세로 죽었다. 어머니는 전서(典書) 이행검(李行儉)의 딸이다. 기황후 책봉 이후 몽골에서 기자오를 추봉해 영안왕(榮安王)에 봉하고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어머니 이씨를 영안왕대부인(榮安王大夫人)에 봉했다. 형 기식은 일찍 죽었고, 동생으로 기원(奇轅), 기주(奇輈), 기륜(奇輪)이 있었다. 확인되는 여동생은 2명으로 한 명은 기황후이며 한 명은 염돈소(廉敦紹)와 결혼했다.

기철의 여동생 기씨는 공녀(貢女)로 몽골에 갔다가 1333년(충숙왕 후2)에 궁녀가 되어 당시 몽골의 황제였던 순제의 총애를 받았다. 1335년(충숙왕 후4)에 순제의 제1황후가 사망한 후 기씨를 황후로 책봉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몽골의 승상 바얀(伯顔) 등이 출신을 문제 삼아 반대하여 이루어지지 못했다. 1339년(충숙왕 후8)에 황자 아유르시리다라(愛猶識理達臘)를 출산하고 1340년(충혜왕 후 원년)에 바얀이 실각한 후 제2황후에 책봉되었다.

기씨의 제2황후 책봉은 고려 신료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340년 (충혜왕 후 원년) 경, 안축과 이제현은 각기 「청동색목표(請同色目表)」와 「걸비색목표(乞比色目表)」를 통해 고려인을 색목인(色目人)과 같이 대우해 줄 것을 몽골에 요청했다. 색목이란, 몽골에서 활동했던 위구르, 무슬림 등의 외지인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몽골은 중국을 정복한 뒤 다수의 한족을 통치하기 위해 소수이면서 농경지대의 행정에 밝은 외지인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 과정에서 몽골은 이들을 우대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으며, 몽골이나 중국과는 다른 그들의 법률과 풍속 등을 존중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때 이제현, 안축 등이 고려에 대한 대우를 색목과 같이 해달라고 한 것은 그간의 고려인에 대한 대우와는 다른, 어떤 의미에서든 우대조치를 요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요구는 고려가 몽골에 복속되어 있었던 100여 년에 이르는 원 간섭기 동안 이루어진 바 없었던 것이다. 관련하여 이 시기가 기황후의 책봉과 황자 출산이 이루어진 직후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러한 점은 기황후 책봉이 당시 고려 신료들에게 가졌던 정치적 의미를 가늠할 수 있게 해 준다.

3 국왕과의 갈등 및 대립

기씨의 제2황후 책봉을 계기로 기씨 일가는 고려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기륜과 충혜왕은 1341년(충혜왕 후 2)에에 충혜왕이 전자유(田子由)의 처이자 기씨의 친척인 이씨를 강간한 사건, 이어 기륜이 전마파(田麻頗)와 함께 내료를 구타하자 충혜왕이 악소배를 기륜의 집으로 보내 전마파를 수색한 사건 등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상호 갈등·대립했다. 기철은 1343년(충혜왕 후 4)에 이운(李芸), 조익청(曺益淸) 등과 함께 몽골 중서성에 글을 올려 왕의 탐음부도함을 극언하고 고려에 행성(行省)을 세워달라는 입성책동(立省策動)을 제기했다. 기륜 단계에서는 충혜왕과의 갈등이 표면화되고 해결되는 방식이 서로간의 폭행이라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던 것에 비해, 기철 단계에 이르면 갈등의 발단은 개인적인 것에 있었을 수 있지만 그 해결방식이 정치행위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에 1343년(충혜왕 후 4) 10월에 고용보(高龍普)가 고려에 사신으로 왔으며, 11월에는 타치(朶赤) 등이 사신으로 와서 영접나온 충혜왕을 구타, 포박해 몽골로 압송하였다. 기철 등의 입성논의 이후 2개월 만에 고용보 등이 고려에 왔고 다음 달에 충혜왕 압송이 이루어지고 있어 시기적으로도 양자의 관련성을 생각해볼 수 있지만, 충혜왕이 폐위된 후 몽골에서 보내 온 조서에는 충혜왕의 방자하고 무도(無道)한 행위를 “백성들이 견디지 못해 서울에 와서 호소”했기 때문에 그를 귀양 보내고 그 아들, 즉 충목왕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한다 하여 기철 등의 입성론이 충혜왕 폐위의 발단이 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한편, 충혜왕을 유배 보낸 후 몽골은 기철로 하여금 홍빈(洪彬)과 함께 정동행성(征東行省) 사무를 서리하도록 하였다. 이 또한 기철 등의 입성론과 충혜왕 유배 및 폐위가 연관선상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례라 할 수 있다. 충혜왕 폐위 조서를 갖고 와서 충혜왕을 유배 보낸 후 국사를 정리하고 충혜왕 사후 어린 충목왕(忠穆王)을 안고 몽골의 순제에게 보였던 고용보(高龍普)가 기황후 세력이었던 점 또한 이 과정에서 기씨 일가의 영향력이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충혜왕 폐위와 충목왕 즉위 과정을 통해 확대된 기씨 일가의 영향력은 충목왕대 정치도감(整治都監)의 개혁과 그에 대한 정동행성의 공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347년에 충혜왕대 이래로의 흐트러진 정치와 부패한 측근을 정리하라는 몽골 황제의 명에 따라 왕후(王煦), 김영돈(金永暾), 안축(安軸), 김광철(金光轍)을 판사로, 이원구(李元具), 백문보(白文寶), 전녹생(田祿生), 신군평(申君平) 등 33인을 소속시킨 정치도감이 설치되었다.

정치도감의 관원들은 권세가들의 토지 탈점과 겸병을 조사하여 정승 채하중(蔡河中), 정동행성 이문 윤계종(尹繼宗) 등을 뇌물죄로 처벌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또한 기철의 동생인 기주를 그간의 횡포로 처벌하고 기황후 일가의 인물인 기삼만(奇三萬)을 토지를 탈점하고 불법을 자행한 죄로 곤장을 치고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 그런데 기삼만이 20일 만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그 부인이 정동행성에 이를 호소하니, 정동행성 이문소(理問所)에서는 왕에게 고해 정치도감 관원인 좌랑 서호(徐浩)와 교감 전녹생을 가두었다. 정치도감 판사인 왕후와 김영돈이 왕 및 몽골 첨의부에 호소했으나 그들을 구해내지 못했다. 정동행성 이문소에서 정치도감 관원을 국문하고, 몽골에서도 사신을 보내 와 기삼만 사건을 심문하고 장형을 가했다.

이후 몽골 황제는 친서를 내려 다시 정치도감을 두어 왕후를 판사로 삼게 했으나, 이미 한 차례 정치관들이 투옥되는 등의 사건을 겪은 이후 이들의 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는 어려웠다. 정치도감의 활동은 지지부진하다가 충목왕 사후 부원세력들을 지지기반으로 갖고 있었던 충정왕(忠定王)이 즉위하면서 정치도감은 폐지되었다.

정동행성 이문소가 기삼만 옥사사건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을 보인 것은 정동행성이 정치의 대상이었던 점에도 한 가지 요인이 있으나, 기씨 일가를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이 정동행성, 특히 정동행성 이문소를 중심으로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정동행성 이문소를 중심으로 한 기씨 일가의 세력 구축은 기철이 충혜왕대에 몽골에 의해 ‘행성 참지정사’에 임명되었던 것과 관련이 깊다. 기철은 공민왕대 초반, 요양행성의 좌승 및 평장정사의 관직을 갖고 있었음이 확인되기에, 충혜왕대 기철이 몽골로부터 수여받은 ‘행성 참지정사’ 역시 정동행성의 그것이 아닌, 요양행성의 그것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기철이 갖고 있었던 ‘행성 참지정사’ 직책이 요양행성의 것이라 하더라도, 기씨 일가를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이 정동행성 이문소를 중심으로 결집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우선 정동행성이 몽골과 관련된 기관이었다는 점에서, 이들이 당시 몽골 황후의 일가로서 대표적 부원세력이었던 기철, 기씨 일가를 중심으로 결집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한편, 기철은 충목왕 즉위 이후에도 계속 고려에 있으면서 중요한 국면마다 정치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1347년(충목왕 3) 9월에는 고려에서의 소송 문제에 개입해 충목왕이 그의 뜻에 따라 결정을 내리고 있는 모습이 확인된다. 따라서 2개월 전에 발생했던 기삼만 옥사사건 당시에 기철이 고려에 있으면서 정동행성의 정치도감 공격에 간여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하겠다. 그는 1348년(충목왕 4) 충목왕 사후에도 왕후와 함께 정동성사를 섭행했다.

충목왕대에 급격한 정치적 성장을 보인 기씨 일가는 충정왕대에 고려의 유수한 가문들과의 통혼을 통해 ‘귀족화’를 지향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철의 딸이 왕후의 아들 왕중귀(王重貴)와 혼인했으며 이에 앞서 기철의 조카 기인걸은 이제현(李齊賢)의 손녀와 혼인했다.

기철을 포함한 기씨 일가의 고려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은 공민왕의 즉위를 계기로 한층 강화되었다. 여기에는 충정왕에 밀려 고려국왕위에 오르지 못했던 왕기(王祺), 즉 공민왕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기황후 세력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기황후 세력의 지원을 받으며 공민왕이 즉위한 후, 기씨 일가의 전횡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예컨대, 기철의 동생인 기원과 관련해서는 공민왕이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행성으로 가는데 기원이 공민왕과 말을 나란히 세워 걸어가면서 이야기하려 하여 공민왕이 싫어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외에도 몽골에서 공민왕에게 공신 칭호를 주었을 때 기철이 왕에게 보낸 축시에서 신하를 칭하지 않았던 사례 역시 공민왕 즉위 초 기씨 일가의 구성원들이 국왕과 대등한 관계를 형성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철 등 기씨 일가의 주요 인물들이 공민왕과 대등한 관계를 형성하려 한 것에 더하여 이들의 전횡은 공민왕의 국정운영에 장애가 되기도 했다. 1354년 4월의 인사에서 기륜이 찬성사에, 기원의 아들인 기완자불화(奇完者不花)는 삼사좌사에 임명되는 등 기씨 일가 인물들의 관직 진출이 두드러졌다. 그리고 이들은 다른 인사에 개입해 자신들의 당여들에게 관직을 제수하게 하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에 권겸(權謙)은 딸을 몽골 황태자, 즉 기황후의 아들인 아유르시리다라의 비로 들였고, 노책(盧頙)은 딸을 바쳤다.

한편 기철은 공민왕의 사법권에도 간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이 과오를 범한 감찰규정(監察糾正)에게 장형을 가한 후 유배를 보냈으나, 기철이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자 공민왕이 즉시 그를 석방했다는 사례는 당시 기철이 국왕권에 비등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례들을 볼 때, 공민왕이 이들을 주살한 후 내린 교서에서 “기철 등이 국왕을 능가하는 위세를 부리며 국법을 어지럽혀 관리의 선발과 이동이 그의 희노(喜怒)에 따르고 정치의 명령이 그에 따라 신축되었다”라 한 것은 기철 등을 주살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야기였을 수 있지만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공민왕대 초 기씨 일가의 동향은 1356년(공민왕 5) 반원개혁에 주요한 발단이 되었다. 1355년(공민왕 4) 2월, 몽골의 어향사 야사불화(埜思不花)가 횡포한 행동을 하자, 이를 참지 못한 전라도안렴사 정지상(鄭之祥)이 그를 가두고 “나라에서 이미 기씨 일당을 주멸하고 다시는 원을 섬기지 않기로 했다.”고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당시 고려에서는 이미 기씨 일가 주살을 포함한 일련의 개혁을 지향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직전인 1354년(공민왕 3) 11월, 몽골의 승상이었던 톡토(脫脫)가 당시 한인 반란세력 중 하나였던 고우성(高郵城)의 장사성(張士誠)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실각한 소식이 원정에 참여했던 고려군에 의해 고려에 전해진 것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은 즉위 전의 숙위기간을 통해 어느 정도 몽골의 세력 약화를 파악하고는 있었겠지만, 이 사건은 공민왕이 몽골의 쇠퇴를 보다 분명히 확인하는 데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356년(공민왕 5) 2월에는 기철이 쌍성(雙城)의 반란민과 모의하여 역모를 꾸민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공민왕은 같은 해 5월, 재추들을 위한 잔치를 베푼다는 구실로 재추들을 모이게 한 뒤 밀직(密直) 강중경(姜仲卿), 대호군(大護軍) 목인길(睦仁吉), 우달치(于達赤) 이몽고대(李蒙古大) 등에 명해 장사를 매복시켜 두었다가 기철 등을 죽이게 했다. 이후 기철의 아들 기유걸, 기새인, 조카 기완자불화 등이 주살되었고, 기철의 도당으로 금녕군 김보, 밀직부사 이야선첩목아, 행성원외 조만통, 동첨 홍익, 찬성 황하연, 평리 이수산(李壽山), 밀직 왕중귀, 대언 황하안, 호군 황하식 등이 유배당했으며, 전밀직 임군보(任君輔), 전광흥창사 임인기, 전호군 김남득, 전낭장 노지경 등은 장형을 받았다.

4 기철 이후 기씨 일가와 고려의 관계

1356년(공민왕 5)에 기철이 주살된 이후 기철을 주축으로 한 기씨 일가의 고려에서의 전횡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공민왕에 대해 앙심을 품은 기황후가 1362년(공민왕 11)에 홍건적의 난으로 고려의 상황이 어수선한 틈을 타 고려의 왕족을 자칭하던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기씨의 족자인 기삼보노(奇三寶奴)를 그 원자로 삼았다. 이어 공민왕 폐위를 도모하여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였다. 또한 기철의 아들 기새인테무르(奇賽因帖木兒)는 동녕부 지역에서 세력을 모아 아버지의 복수를 명분으로 고려 국경지역을 침범하였다. 이에 공민왕은 그를 타도하는 것을 명분으로 동녕부(東寧府) 정벌을 단행하기도 했다.

한편, 기황후는 1368년(공민왕 17)에 몽골의 수도인 대도(大都)가 명(明)의 군대에 함락되었을 때 순제와 함께 상도(上都)로 도망하였다. 다음해에 다시 지금의 내몽고 지역으로 도망갔는데, 이후 그의 행적은 알 수 없다. 기황후의 아들인 황태자 아유르시리다라는 1370년에 순제가 사망한 후, 순제를 이어 황제로 즉위했으니, 그가 1378년(우왕 4)까지 재위한 소종(昭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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