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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손[金慶孫]

불굴의 명장, 모함에 스러지다

미상 ~ 1251년(고종 33)

김경손 대표 이미지

귀주성 전경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국립문화재연구소)

1 개요

김경손(金慶孫, ?~1251)은 13세기 중엽 고려의 무장이었다. 몽골의 침입하자 이에 맞서 귀주성(龜州城)을 지키며 용맹을 떨쳐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이연년(李延年) 형제의 난을 진압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권력자였던 최항(崔沆)에게 의심을 사 처형되었다.

2 결사대 12명과 함께 몽골군에 맞서 싸우다

1231년(고종 18) 여름, 몽골군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계속될 고려와 몽골의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13세기 초에 이미 몽골 초원을 통일하고 서하(西夏)와 금(金)을 공략해 들어간 것은 물론, 더욱 서쪽으로 나아가 서요(西遼)와 호라즘을 정벌했으며, 북방으로는 남러시아 지역까지 치고 들어갔던 몽골. 이들의 칼끝이 고려로도 향한 것은 아마도 피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몽골군은 압록강 하구의 함신진(咸新鎭), 즉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義州)로 가장 먼저 들이닥쳤다. 이곳은 대륙과 한반도 사이의 길목이었다. 고려의 관문을 지키던 장수 조숙창(趙叔昌)은 싸워보지도 않은 채 항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몽골군의 길잡이가 되어 안내하며 다른 지역에도 항복하도록 권유하였다. 저항하는 철주(鐵州)를 처참하게 박살낸 몽골군은 인근 정주(靜州)로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에는 바로 김경손이 있었다.

당시 그의 직함은 정주분도장군(靜州分道將軍)이었다. 이곳에 2천여 명의 병력이 설정된 때도 있었지만, 이 시점에 그의 휘하에 어느 정도의 병력이 있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사실상 제대로 훈련된 병력이 거의 없었던 분위기도 느껴진다. 밀려오는 몽골군에 맞서 김경손이 성문 밖으로 이끌고 나아가 싸운 병력은 불과 12명이었다. 겨우 12명. 사료에는 이들에 대해 ‘감사사(敢死士)’, 즉 ‘죽음을 무릅쓴 무사’라 표현하였다.

이들이 일반 군졸들이었는지, 혹은 장교들이었는지, 심지어 군에 속한 군사이기는 했는지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구체적인 관직이나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군졸 내지 의용병같은 인물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사료에는 여기에서부터 흡사 무협지나 소설 같은 전황이 묘사되어 있다. 장렬하지만, 장렬함에 내몰린 그들의 모습에 그리 통쾌한 장면은 아니다.

김경손은 12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성 밖에 나가 몽골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그리고 놀랍게도 몽골군은 이들의 저항에 일단 퇴각하였다. 소수의 선발대였을 가능성도 있다. 뒤이어 대군이 다시 밀려왔다. 이를 본 김경손은 일단 12인을 데리고 성으로 귀환하였다.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이다 돌아온 이들을 맞이한 것은 텅 빈 성이었다. 몽골의 대군이 도착한 것을 본 정주 사람들이 모두 도망쳐 숨어버렸던 것이다. 김경손 일행은 얼마나 황망했을까. 하지만 이들의 등 뒤에는 몽골군이 닥쳐오고 있었다. 김경손은 12인을 이끌고 귀주(龜州)로 달렸다. ‘산에 올라 밤길을 행군하며 7일 동안 불에 익힌 음식을 먹지 못하고’ 강행한 여정이었다.

귀주는 11세기 초 거란의 3차 침입 당시 고려가 거란군을 섬멸하며 대승을 거두었던 지역이었다. 이 시기에도 고려 북방의 요충지로 굳건히 자리잡고 있었다. 김경손이 도착할 무렵, 이곳으로 삭주(朔州)·위주(渭州)·태주(泰州) 등 인근 지역의 장졸들도 속속 집결하였다. 이제 귀주는 몽골의 대군을 막아내야 할 전초기지가 되었다.

귀주의 방어를 총괄하던 병마사(兵馬使) 박서(朴犀)는 김경손에게 성 남쪽을 지키도록 하였다. 몽골군이 남문을 향해 돌격하자 김경손은 자신이 데리고 온 12인과 여러 곳에서 모인 별초(別抄)들을 이끌고 나가 싸우려 하였다. 그러나 별초들은 김경손의 지휘를 따르지 않고 버텼다. 결국 김경손은 이들을 성으로 돌려보내고, 정주에서부터 데리고 온 12인만을 이끌고 출격했다. 깃발을 든 몽골의 선봉 기병을 활로 쏘아 죽이고, 팔에 화살을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독전을 계속하여 여러 번 겨루니 몽골군이 물러났다. 그러자 김경손은 쌍소금(雙小笒)을 불며 성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12인에 대한 기록은 이 뒤로 더 나오지 않아, 그들의 운명은 알 길이 없다.

3 귀주성을 몽골군의 공세에서 지켜내다

몽골군의 첫 번째 공격은 김경손과 12인의 분전으로 일단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이 뒤로 몽골군은 성을 포위하고 파상적인 공세를 펼쳤다. 박서는 김경손에게 성의 방어 전반을 맡겼다. 그러나 앞의 기록들에서 보았듯이, 정주에서도 귀주성에서도 몽골군에 맞서 싸우려는 의지를 지닌 고려인들은 극히 드물었다. 유라시아를 유린하던 당시 몽골군의 기세를 떠올려 본다면, 겁을 먹은 당시인들의 심정이 짐작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김경손이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반전이 벌어졌다. 이 뒤로 귀주성의 고려인들은 몽골군의 지독한 공격을 악착같이 막아내기 시작하였다. 직전 시점에 별초들이 김경손의 면전에서 출격을 거부하던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변화가 생겼던 것일까?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으나, 김경손과 12인의 결사대가 보여주었던 용기와 승전이 큰 자극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이 지나치지는 않을 듯하다.

몽골군은 성을 여러 겹으로 둘러싸고 총공격을 시작하였다. 사료에는 이때의 전투 장면에 대해서도 마치 전쟁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한 묘사가 담겨 있다. 박서의 총지휘 아래에 고려군은 사력을 다해 맞서 싸웠고, 김경손도 그를 보좌하여 방어에 힘썼다. 몽골군이 화공을 위해 수레에 나무와 풀을 싣고 접근하니 김경손은 끓는 쇳물을 쏟아 부어 미리 태워버렸다. 김경손은 몽골군이 쏜 포탄이 자신의 정수리 위를 지나 그의 뒤에 있던 병사의 몸을 산산조각 낼 정도로 최일선에서 전투를 지휘하고 독려하였다. 위험한 자리이니 위치를 옮기자는 부하들의 말에도 김경손은 자신이 움직이면 사기가 흔들린다며 그대로 지휘를 계속하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솔선하는 장수의 모습이 군사들에게 어떤 효과를 발휘했을지, 충분히 짐작되는 일이다.

몽골군의 귀주성 공격은 이렇게 한 달가량 계속되었지만, 고려군은 끝까지 버텨내었다. 결국 몽골군은 귀주성 공략을 포기하고 우회하였다. 몽골군의 침입 이후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던 고려군이 거둔 귀중한 승전보였다.

귀주성은 이 뒤로도 대몽항쟁 과정에서 거듭 몽골군의 지독한 공격을 겪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박서가 이끄는 고려군은 악착같이 이 성을 지켜내는 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전투들에서는 김경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아마도 첫 번째 전투 이후로 다른 지역으로 배속된 듯한데, 전쟁 과정에서 그가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였는지에 대해 더 이상의 기록이 남겨져 있지 않다.

4 이연년 형제의 난을 진압하다

몽골의 1차 침입 이후 김경손의 행적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가 전해진다. 우선 그는 1233년(고종 20) 5월에 대장군 지어사대사(大將軍 知御史臺事)로 임명되었다. 대장군은 고려군의 무반 서열에서 두 번째로 높은 종3품 관직이었으니, 그가 승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귀주성 전투에서 김경손이 활약한 내용은 민간에도 널리 퍼졌던 것으로 보인다. 1237년(고종 24)에 전라도 지역에서 ‘이연년(李延年) 형제의 난’이 터졌다. 무신집권기에 여러 지역에서 발발하였던 백성들의 봉기들 중 하나였다. 이들은 원율(原栗)·담양(潭陽) 등 여러 곳에서 세력을 보아 해양(海陽) 등의 지역을 차지하고 기세를 올렸다. 김경손은 전라도지휘사(全羅道指揮使)로 이들을 진압할 임무를 맡았다. 그가 나주(羅州)로 오자 이연년은 나주성을 포위하여 위기로 몰아넣었다. 크게 불리한 상황에서 김경손은 나주의 민심을 수습하며 직접 전투에 나섰다. 이때 이연년은 “지휘사는 바로 귀주에서 공을 세운 대장으로 인망이 매우 두텁다. 내가 마땅히 생포하여 도통(都統)으로 삼으려 하니 활을 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 김경손의 명망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자기의 무예에 대해 자신감이 있었는지, 이연년은 직접 앞으로 나가 김경손의 말고삐를 잡으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경손은 군사들을 독려하여 결국 이연년을 베고 난을 진압하였다.

5 명망이 독이 되어 목숨을 잃다

이렇듯 김경손은 용맹한 무장으로 명성을 드높였다. 그런데 그는 또한 당대의 명문 집안 출신이었다. 먼 옛날이긴 하지만 그의 집안은 신라의 왕실이었고, 할아버지 김봉모(金鳳毛)는 무신집권기에 외교 방면에서 많은 공헌을 하여 재상에 이르렀다. 아버지 김태서(金台瑞)도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왕을 섬기며 재상에 올랐다. 김경손에게는 김약선(金若先)과 김기손(金起孫)이라는 형제가 있었는데, 김약선은 당대의 무신집권자였던 최이(崔怡)의 사위였고 김기손은 재상이 되었다. 김약선의 딸은 국왕 원종(元宗)의 부인이 되어 훗날 충렬왕(忠烈王)이 될 왕자를 낳았다. 이렇듯 김경손의 집안 사람들은 문·무 양면에서 모두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은 물론, 정치적으로도 왕실 및 무신집권자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 명문가 출신에 명장(名將)으로 이름을 날린 김경손의 명망은 상당히 높았다.

그리고 그 명망이 김경손의 목을 죄어오는 역설이 벌어졌다. 국왕을 거의 허수아비처럼 두고 권력을 휘두르던 무십집권자가 존재했던 무신집권기의 정치적 상황이 야기한 일이었다. 김경손의 집안이 무신집정 최씨 집안과 긴밀하게 엮여 있기는 했으나, 한편으로는 잠재적인 경쟁자가 될 가능성도 충분했다. 최이의 사위였던 김약선이 바로 그 최이에 의해 살해당한 것은 표면상 치정이 얽힌 문제였으나, 정치적 견제 역시 개입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다. 김경손 역시 최이를 저주하고 배신하려는 뜻을 품고 있다는 참소를 당했다가 다행히 화를 피한 적이 있었다.

문제는 두 집안의 다음 세대 사이에서 더욱 커졌다. 1249년(고종 36) 윤2월, 김경손의 조카 김미(金敉)가 최이의 아들 최항(崔沆)이 자기를 해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먼저 그를 해하려 김경손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김미는 김약선의 아들로, 최이의 외손자이자 최항의 조카였다. 당시 최이의 후계자 자리를 둘러싸고 최항과 김미가 경쟁 관계에 있었다. 김경손은 이 상황을 최이에게 알렸고, 최이는 김미를 유배형에 처하고 그 세력을 붕괴시켰다.

최이 사후 최항은 다른 무신들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당시 그의 위상은 확고하지 못하였고, 다른 사람에게 밀려날까봐 크게 불안하였던 듯하다. 최항은 김경손이 인심을 얻는 것을 경계하여 섬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리고 2년 뒤인 1251년(고종 38) 3월, 사람을 보내어 유배지에 있던 김경손을 바다에 빠트려 살해하였다. 최항이 자신의 계모인 대씨(大氏)와 그의 아들 오승적(吳承績)을 살해하면서, 오승적의 인척이었던 김경손까지 죽였던 것이다. 대몽항쟁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당대의 맹장이 맞이한 비극적이고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무신집권기, 특히 최항 시기의 혼탁한 정치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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