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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金坵]

명문장으로 외교에 공을 세우다

1211년(희종 7) ~ 1278년(충렬왕 4)

김구 대표 이미지

지포집 서문

한국고전종합DB(한국고전번역원)

1 개요

김구(金坵, 1211~1278)는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무신집권기 후반부터 대몽항쟁기를 거쳐 원 간섭기 초기까지 관리로 활동하면서 몽골에 보내는 외교 문서 작성에 크게 공헌하였다. 문집으로 『지포집(止浦集)』이 전해진다.

2 촉망받던 젊은 인재, 풍파에 시달리다

김구의 자(字)는 차산(次山), 본관은 부녕현(扶寧縣)이었다. 어린 시절 이름은 백일(百鎰)이었다. 고려 시대에는 성인이 된 후 이름을 고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그의 선대에 대해서는 기록이 명확하지 않아 다소 이견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인 김정립(金鼎立)은 1204년(희종 즉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었으니, 김구는 개경(開京) 관리 집안의 자제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글을 잘 지었던 김구는 17세에 예비고시인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하고, 22세였던 1232년(고종 19)에 본고시인 예부시(禮部試)에 급제하여 관리의 자격을 획득하였다. 이렇게 대를 이어 학업에 힘써 과거에 급제하는 것은 당시 명예로운 일로 칭송받았다. 더구나 급제 석차가 장원에 이은 2등이었으니, 젊은 김구는 상당히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과거에 급제하면 개경 시가에서 풍악을 울리며 행진을 시켜주고 고향에 돌아가면 지방관과 향리들이 영접하여 잔치를 열어주는 등, 나라에서 큰 영예를 내려주었다. 젊은 김구는 아마 앞으로 관리로서 활약할 미래를 가슴 벅차게 꿈꾸었을 것이다.

사연은 알 수 없지만, 누군가 그런 김구를 질투하였던 모양이다. 황각보(黃閣寶)라는 고향 사람이었다. 김구가 관직을 임명받을 찰나, 황각보가 관아에 고발을 하였다. 김구의 선대에 흠결이 있다는 제보였다. 이 흠결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우선 문제가 생긴 김구의 출사에 대해 살펴보자. 내용이 전해지지 않는 이 제보는 상당히 치명적인 내용이었던 듯하다. 당시를 호령하던 무신집정(武臣執政) 최이(崔怡)가 김구의 재주를 아껴 구제하려 했는데도 실패하여, 원래 임명하려 하였던 관직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제주도(濟州道)에 발령을 해야 했다고 하니 말이다.(이후 서술에서 특별한 별도 전거가 붙어있지 않다면 대체로 열전에 수록된 내용이다.)

후대의 기록이라 사실 여부를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제주로 간 김구는 돌담장을 세워 토지 구획을 명확히 하여 이전에 문제가 되었던 토지 겸병과 사슴·말의 곡식 훼손을 막는 공을 세웠다고 한다. 임기를 마친 뒤에는 드디어 개경으로 올라와 한림원(翰林院)의 관직을 받았고, 곧이어 서장관(書狀官)으로 몽골에 가는 외교 사절단에 배속되었다. 1240년(고종 27), 그의 나이 30세 때였다. 당시 고려는 1231년(고종 18) 이래로 몽골의 침입을 버티고 있었다. 이른바 ‘대몽항쟁기’라 불렸던 시기였다. 어려운 상황에서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으로서 김구는 어떤 소감을 느꼈을까. 이때 지은 글을 모아 『북정록(北征錄)』으로 펴내었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서경(西京)을 지나며 황량해진 풍경에 안타까워했던 시, 대몽항쟁 과정에서 처절하게 항쟁하다가 도륙당한 철주(鐵州)를 지나며 그들을 기린 시 등이 몇 수 전한다.

이후 김구는 한림원에서 8년 동안 근무하였고, 국학(國學)의 종5품 관직인 직강(直講)에 올랐다.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김구 개인의 관직 생활은 비교적 평온했던 듯하다. 그러나 다시 한 번 풍파가 닥쳐왔다. 최이의 아들로 권력을 승계받아 당시 집권하고 있었던 최항(崔沆)의 심기를 거슬렀던 것이다. 1247년(고종 34)에 최항은 김구에게 자신이 조성한 『원각경(圓覺經)』에 발문을 짓게 하였는데, 그 글의 내용을 보고 “나에게 입을 닫고 있으라는 것이냐!”며 분노하여 좌천시켜버렸다. 최항은 극도로 권력에 예민하여 많은 조정 중신들을 유배 보내고 죽이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김구가 정말 그런 의도로 적은 것을 최항이 간파한 것인지, 아니면 그가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으로 곡해를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김구는 속절없이 좌천되었고, 최항이 죽을 때까지 다시 관직에 오르지 못하였다. 이때 아마도 부안으로 내려가 살며 후학들을 가르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3 외교 일선에서 활약하며 장년에 전성기를 맞이하다

김구가 정계로 복귀한 것은 최항이 사망한 후인 1257년(고종 44)이었다. 『지포집』의 연보에 따르면 다시 한림원으로 복귀하였다고 한다. 10년 만의 귀환. 그의 나이가 벌써 47세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이듬해에 최항의 아들 최의(崔竩)가 제거되면서 최씨정권이 붕괴되었고, 이어 오랜 항쟁을 끝내고 몽골과 강화를 맺는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외교적으로 몽골과 교섭하는 일이 국정의 큰 과제로 떠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김구는 자신의 능력을 크게 발휘하였다.

『지포집』에는 김구가 작성한 외교문서와 원의 고위 관리들에게 보낸 서한류가 약 50여 건 실려 있다. 이는 『동문선(東文選)』에 채록되어 있었던 것을 옮긴 것이다. 이 문서들은 1259년(고종 46)부터 1278년(충렬왕 4)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특히 그 첫 문서는 강화를 위해 국왕 고종(高宗)을 대신하여 태자가 몽골에 입조했을 때 지참한 고주표(告奏表)이다. 작성자인 김구도 사신단의 일원으로 태자를 수행하였다. 막중한 임무를 띠고 간 사신단의 일원으로서, 또 중요한 문서인 고주표를 작성한 당사자로서 김구 역시 큰 책임감을 느끼며 다녀왔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몽골 칸이 죽음과 계승 분쟁으로 복잡한 상황이 벌어졌지만, 다행히 태자 일행은 전 칸의 동생이자 장차 차기 칸이 될 쿠빌라이를 만나 강화를 맺고 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 몽골에 다녀온 태자가 바로 다음 국왕인 원종(元宗)이다. 원종대에 김구는 여러 외교 문서들을 작성하면서 그 능력을 입증하였다. 쿠빌라이의 즉위를 하례하는 표문, 연호 반포를 축하하는 표문, 공물을 보내는 표문 등이 부분적으로 전해진다. 특히 1263년(원종 4) 4월에 우역(郵驛) 설치와 군대 파견·군량 수송 등의 현안에 대하여 고려의 입장을 알리며 설득한 표문을 작성하였는데, 8월에 원에서 이를 수용한 것이 높이 평가를 받았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후로도 양국 간의 중요 현안 논의에서 고려측의 외교 문서는 김구가 작성한 것이 많았다. 그 해 12월에 당시의 중신들이었던 이장용(李藏用)과 유경(柳璥)이 그를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이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임명받은 데에는 이 공이 특히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당시 그의 할아버지가 승려였다는 이유로 대간직(臺諫職) 임명에 반대하는 의견이 제기되었으나, ‘재능이 있으므로’ 원종이 임명을 강행하였다고 한다.

급제 직후에 문제가 되었던 선대의 흠결도 아마 이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미 오래전 과거 급제 당시부터 당시 문장의 대가 이규보(李奎報)로부터 훗날의 기대주로 주목받았던 김구가 드디어 본격적으로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외교 문서를 작성할 때에 아름다운 표현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핵심은 아니다. 현안에 대하여 잘 정리하고 이쪽의 입장을 상대가 수용하도록 근거를 제시하며 논리적으로 제안하는 내용이 가장 중요하다. 물론 이는 국왕과 조정 관리들의 논의를 거치며 정리되는 것이지만, 최종적으로 이를 조리있고 품격있는 글로 작성하는 것은 문서 작성자의 몫이다. 김구는 왕조 간에 오가는 공식적인 문서뿐만 아니라 원의 고위 관리들에게 보내는 서한도 작성하여 양국 간의 현안들을 조율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김구의 공헌에 대하여 『고려사(高麗史)』에 수록된 그의 열전에서는 아래와 같이 묘사하였다.

당시에 원이 징계하거나 꾸짖지 않고 넘어가는 해가 거의 없었지만, 김구가 보내는 글을 지었는데, 일에 따라 언사(言辭)가 모두 이치에 맞았다. 〈황제가〉 답하는 조서(詔書)에 이르기를, ‘말하는 것이 간절하고 진실하므로, 이치로 보아 마땅히 승인하고 허락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원의 한림학사(翰林學士) 왕악(王鶚)이 매번 표문을 볼 때마다 반드시 아름다운 문장이라고 칭찬하면서 그 얼굴을 보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노년에 접어든 김구는 점차 다음 세대의 외교 인재를 양성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다. 그는 참지정사에 오른 후 참외(參外) 문신들을 시험하여 포상하는 방식을 도입하여 외교 문서 작성 능력을 갖춘 젊은 신하들을 양성하자는 건의를 올려 국왕의 윤허를 받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조치는 결국 실행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한 당시 통역관들이 사리사욕을 채우며 제대로 일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젊은 문신들에게 한어(漢語)를 익히도록 통문관(通文館)을 설치하였다. 통역관을 별도로 두더라도, 외교 사절로 파견된 관리들이 한어로 소통할 수 있다면 일도 수월해지고 통역관들의 농간도 제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4 명예로운 노년의 재상, 후대에 이름을 남기다

김구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정당문학(政堂文學)·이부상서(吏部尙書)를 거쳐 재상인 참지정사(叅知政事)·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등을 역임하였고, 충렬왕(忠烈王) 시대에는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참문학사 판판도사사(叅文學事 判版圖司事) 등을 지냈다. 국자감시와 예부시를 주관하는 영예도 누렸으며, 신종(神宗)·희종(熙宗)·강종(康宗)·고종의 실록을 편찬하는 데에도 참여하였다. 충렬왕이 김구 등과 주고받은 시가 『용루집(龍樓集)』이라는 문집으로 엮였던 것도 그에게는 큰 영광이었을 것이다. 원에 붙어 권세를 누리던 강윤소(康允紹)가 왕에게 무례한 태도를 보여도 아무도 문제를 삼지 못했는데, 김구만 이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던 일화가 열전에 전한다. 1273년(원종 14) 8월, 그의 나이 63세 때였다.

‘성품이 성실하고 질박하며 겉치레가 없고 말이 적었으며, 말이 국사(國事)를 논하는 데 이르면 간절하고 올곧아서 피하는 것이 없었다’는 열전의 묘사는 이러한 사례들에 기반한 표현일 것이다. 충렬왕은 그를 세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하지만 세자의 스승이 된 이듬해, 김구는 병이 들어 1278년(충렬왕 4)에 68세로 사망하였다. 충렬왕은 많은 공을 세운 원로 대신에게 예우를 갖추어 조문하는 뇌문(誄文)을 적게 하고, 장례 비용을 관청에서 부담하게 하였다. 또한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내려 그의 삶을 기렸다. 비록 젊은 시절에 험한 풍파를 겪으며 고생하였지만, 좌절하지 않고 능력을 갈고 닦은 끝에 마침내 기회를 얻어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 자신도 성공할 수 있었던 입지전적인 인물의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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