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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金鏞]

공신과 역적, 출세욕에 불탄 두 얼굴의 야심가

미상 ~ 1363년(공민왕 12)

김용 대표 이미지

고려사 권131 열전 김용 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김용(金鏞, ?~1363)은 고려 후기의 정치가이다. 공민왕(恭愍王)의 측근으로 크게 신임을 받으며 높은 지위에 올랐으나, 자신의 권세를 위해 거듭 음모를 꾸미다가 결국 처형되었다.

2 금의환향, 그리고 끊임없는 정치적 부침

김용의 출신에 대해서는 본관이 안성(安城)이라는 점 외에는 『고려사(高麗史)』에 전해지는 것이 없다. 역사서에 기록된 그의 첫 행적은 원(元)에서 숙위(宿衛)를 하던 강릉대군(江陵大君) 왕기(王祺)를 모셨다는 일이다. 왕기는 충숙왕(忠肅王)의 아들이자 충혜왕(忠惠王)의 동생이었다. 왕기는 형이 왕위에 있었던 1341년(충혜왕 후2)에 원에 입조(入朝)하도록 소환되었다. 당시 고려의 왕족이나 고위 관리의 자제들이 이렇게 원에 머물며 숙위를 맡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왕위에 가까웠던 왕기가 원에 가게 된 데에는 정치적인 역학관계가 작용하였을 것이다.

왕기는 이 뒤로 10년가량 원에 머물렀다. 정치에 형편없던 형이 폐위되고 그 아들들, 즉 자신의 어린 조카들인 충목왕(忠穆王)과 충정왕(忠定王)이 연이어 즉위하는 동안, 원에 머물던 왕기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김용이 정확히 언제부터 왕기를 모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복잡다단한 정국 속에서 1351년(공민왕 즉위)에 왕기가 새로 고려의 국왕으로 임명되었으니, 그가 바로 공민왕이다. 그리고 원에서 그를 모시던 여러 사람들은 이제 고려로 금의환향을 하였다. 당시에는 이렇게 일찍부터 모시던 측근들이 국왕 즉위 후에 중용되면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례들이 빈번히 나타났다. 김용은 먼저 고려로 파견되어 왜구 방어를 담당하였다. 이를 비롯한 이후의 이력을 보면 아마도 김용은 군사 분야에 능력이 있다고 신임을 받았던 듯하다. 이미 호종하던 당시에 대호군(大護軍)까지 승진해 있었으며, 공민왕 즉위 후에는 국왕을 호위하는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에 임명되었다. 고려 무반(武班)의 최고위 등급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김용은 공민왕이 자신을 호종했던 사람들을 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으로 책봉할 때 1등 공신에 책정되었다. 공민왕의 김용에 대한 신임과 총애는 상당했던 듯하다. 측근들 간에 권력 경쟁이 붙어 서로 견제할 때에도 김용은 무사했으며, 왕명의 출납과 궁중 숙위 등을 맡은 밀직사(密直司)의 종2품직인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임명되고 또 수충분의공신(輸忠奮義功臣) 칭호를 하사받았다. 모두 공민왕 원년인 1352년 한 해에 주어진 영예였다.

그러나 그 해 겨울에 ‘조일신(趙日新)의 난’이 터지면서 김용의 출세 가도가 처음 막히게 되었다. 역시 공민왕의 최측근 중 한 명이었던 조일신이 난을 일으켜 다른 권신(權臣)들을 제거 혹은 제압하고 정국을 장악하였는데, 김용은 당시 궁궐 안에서 숙직을 서고 있었으면서도 화를 입거나 대응에 나서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측근의 무력행사에 잠시 눌렸던 공민왕은 곧 사태를 진압하였다. 그리고 이 때 김용의 태도로 보아 난에 가담했던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장(杖)을 치고 섬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런데 1년 반 정도가 지난 1354년(공민왕 3) 6월, 원에서 고려에 파병을 요청하면서 김용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 당시 원은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 애를 먹고 있었는데, 대륙 남부에서 거병한 장사성(張士誠)을 상대하는 전선에 고려군을 투입하라고 요청하였다. 김용은 여기에 지명되어 정계에 복귀할 수 있었으며, 안성군(安城君)에 임명되어 다시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이듬해에 귀국한 뒤에는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매일 궁에 들어와 크고 작은 일을 세세히 보고하도록 명을 받는 등 공민왕의 신임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김용은 각종 참소와 음모를 꾸미며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끝내는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왕명(王命)을 위조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것이 발각되어 제주도(濟州島)에 유배되었다.

3 다시 찾아온 기회, 그리고 전성기

두 번째로 유배형에 처해진 김용은 자신의 현실과 미래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했을까. 처음에는 난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았고, 두 번째에는 왕명을 위조하는 큰 범죄를 저지른 처지였다. 이대로 정치적 생명이 끝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공민왕은 김용에게 다시 기회를 주었다. 1356년(공민왕 5) 5월, 공민왕은 전격적으로 기철(奇轍)을 비롯한 이른바 부원세력(附元勢力)들을 제거하였다. 원의 황후였던 기황후(奇皇后)의 오빠였던 기철과 그 일가는 당시 원의 위세를 등에 업고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공민왕은 이 때 난맥에 빠져 있던 정국을 쇄신하고 정치 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원의 영향력에서 멀어지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을 실행하였고, 기철 세력 제거는 그 첫걸음이었다. 그리고 공민왕은 김용을 비롯한 자신의 측근들을 요직에 앉혀 정국을 주도하려 하였다. 김용은 재상인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임명되어 다시 정계로 화려하게 귀환하였다. 유배형에 처해진 죄인 신분에서 갑자기 고려의 재상으로 올라선 것이다. 관제 개편이 이루어진 뒤인 1358년(공민왕 7)에는 중서시랑 문하평장사(中書侍郞 門下平章事)에 임명되어, 여전히 재상의 지위를 보유하였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고려사』에는 공민왕이 유독 김용을 감싸주었던 모습들이 많이 실려 있다. 이미 앞의 내용에서도 거듭된 잘못에도 불구하고 계속 용서하며 복귀시켰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공민왕이 김용을 특별히 총애하였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고려사』에는 그 외에도 같은 잘못을 저지른 다른 사람들이 처벌 될 때 김용만 권세와 총애로 모면 받은 사례, 그가 순군만호(巡軍萬戶)로 있을 때 그 휘하의 순군이 홀적(忽赤, 코르치) 장군을 구타하였는데도 왕이 이를 문제 삼지 않은 사례 등이 실려 있다. 당시 김용은 1천여 명의 무뢰배들을 순군에 넣고 늘 자신을 따르게 하였다고 한다. 국왕의 총애를 받으며 벼슬도 재상에 이르고 휘하에 무력까지 보유한 이때가 아마도 김용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왕조의 위기에 더욱 불탄 권력욕, 자신까지 태우다

1361년(공민왕 10) 10월, 고려에 큰 위기가 닥쳐왔다. 무려 10만 명에 달했던 홍건적(紅巾賊)이 압록강을 건너 또 고려를 침략하였다. 원에 대한 반란군이었던 홍건적은 이미 2년 전인 1359년(공민왕 8)에 고려를 침략하여 큰 피해를 입혔었다. 격렬한 전투 끝에 이들을 몰아낼 수 있었지만, 그 뒤로도 간헐적으로 홍건적의 침투에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이 때 홍건적 대군이 밀려왔던 것이다.

고려는 즉시 군을 동원하여 반격에 나섰다. 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에 이방실(李芳實), 도원수(都元帥)에 안우(安祐), 도병마사(都兵馬使)에 김득배(金得培), 서북면군용체찰사(西北面軍容體察使)에 정세운(鄭世雲) 등이 임명되어 전선에 투입되었다. 일부 전투에서 고려군이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홍건적은 개경(開京)을 향해 밀려들어왔다.

김용은 이러한 상황에서 11월에 총병관(摠兵官)에 임명되었다. 총병관이라는 직함은 원래 고려 관직 체계에는 없었던 것이라 그의 역할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훗날 김용에 이어 총병관이 된 정세운이 전체 군에 대한 통수권을 행사했던 모습이 보인다. 즉 김용은 고려군 전체를 총지휘하여 홍건적의 대대적인 침입에 맞서야 할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전황은 크게 불리했다. 이미 홍건적은 절령(岊嶺) 방어선을 뚫고 개경 인근의 흥의역(興義驛)까지 밀고 내려왔다. 공민왕은 개경을 지켜야 한다는 장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쪽으로 피난을 떠날 채비를 서둘렀고, 개경 시내에서 의병(義兵) 모집을 호소해도 호응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결국 공민왕 일행은 서둘러 피난길에 올랐다. 개경은 곧 홍건적에게 함락되었고, 12월에 공민왕은 지금의 안동(安東)인 복주(福州)까지 피신했다.

이 시점에 공민왕은 김용 대신 정세운을 총병관에 임명했다. 정세운 역시 김용과 함께 공민왕을 호종한 이래로 최측근으로 오랫동안 곁에 있었던 신하였다. 그는 김용에게 “적을 구경하기만 하고 도모하지 않으니, 누가 본받지 않겠소. 만약 적을 소탕하지 않는다면, 산골짜기로 도망가서 숨더라도 살아남거나 나라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라고 질책하며 반격 준비에 나섰다. 그리고 이듬해인 1362년(공민왕 11) 1월, 정세운은 공들여 모은 20만의 병력을 안우·이방실·김득배·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를 비롯한 장수들과 함께 이끌고 개경을 공격하여 홍건적을 격파하고 수도를 탈환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힘겨운 전란을 극복한 사실에 모두가 기뻐하였을 듯한 그 순간, 김용은 거대한 음모를 꾸몄다. 정세운과 안우 등 공을 세운 인물들에게 권세와 왕의 총애를 빼앗길까 하여, 이들을 모두 죽여 없애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김용은 먼저 왕명을 위조하여 안우·이방실·김득배에게 정세운을 제거하도록 하고, 이어 안우 등을 죽여 입을 막았다. 자신이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치밀하고 철저하게 움직였던 모습이 사료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홍건적 격퇴에 큰 공을 세운 중신들이 어이없이 제거된 이 사건을 이른바 ‘3원수 살해 사건’이라 부르기도 한다. 공을 세운 장수들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우려한 공민왕의 뜻이 반영된 사건이라고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내밀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김용이 이 사태의 주역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유능한 군사 지휘관들을 잃게 하였다는 점에서 고려 왕조에 큰 타격을 입힌 사태였다. 그러나 김용은 이 사태 이후에도 찬성사(贊成事)에 임명되어 여전히 재상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경쟁자들을 다수 제거한 김용은 매관매직을 일삼는 등 권세를 마음껏 부리며 살았던 듯하다.

이듬해인 1363년(공민왕 12) 2월, 홍건적 격퇴 후 복주를 떠나 개경을 향해 올라온 공민왕 일행은 개경 인근의 큰 사찰인 흥왕사(興王寺)를 행궁(行宮)으로 삼아 머물렀다. 승전과 귀경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큰 잔치가 열렸다. 개경의 궁궐이 파괴된 상황이었기에 이 뒤로 한동안 공민왕은 흥왕사에 머물렀다. 이 때 김용은 치안을 담당하는 순군제조(巡軍提調)에 임명되어 공민왕의 안전을 지키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런데 윤3월 신미일 한밤중에 50여 인의 무리가 흥왕사를 습격했다. 이들은 원 황제의 명령을 받고 왔다고 외치며 공민왕을 모시고 있던 관리들을 죽였고, 우정승(右政丞) 홍언박(洪彥博)까지 살해하였다. 또한 공민왕의 침소를 습격하여 침상에 누워 있던 사람을 죽이고 만세를 불렀다. 명백한 국왕 암살 시도였다.

그러나 공민왕은 대비(大妃)의 밀실로 피신한 상태였고, 침상에서 살해된 것은 공민왕을 가장하고 있던 환관 안도적(安都赤, 안도치)였다. 이를 알게 된 자객들은 행궁을 장악하고 공민왕을 유인해 끌어내려 하였다. 이미 공민왕을 호위하고 있던 병사들은 이리 저리 흩어진 상태였다. 밀실 앞에 공민왕의 부인이자 원 황실의 공주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지키고 앉아 자객들의 출입을 막고 있었으나, 빠져 나갈 방안이 보이지 않는 큰 위기 상황이었다. 더구나 자객들은 개경으로 일당들을 보내 재상들을 죽여 없애려 하였다. 국왕과 재상들이 일거에 제거될 수도 있는 급박한 사태였다.

이 때 여러 재상들은 묘련사(妙蓮寺)에 모여 국왕을 위해 축성을 올리고 있었다. 이들에게 소식이 전해졌을 때 이미 자객들의 기병이 절 입구까지 들이닥쳤다. 천만다행으로 재상들은 이곳을 빠져나와 개경의 순군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최영 등이 개경의 병력을 이끌고 출동하여 흥왕사로 달려가 자객들을 제압하고 공민왕을 구출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른바 ‘흥왕사의 변’이라 불리는 사건이었다.

당시 순군의 장으로 있었던 김용은 흥왕공신(興王功臣)에 포함되어 포상을 받았다. 그러나 김용을 향한 의심의 눈길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사실 이미 변란이 일어났던 날부터 좌정승(左政丞) 유탁(柳濯)은 김용을 의심하고 있었다. 재상들이 참여하는 행사가 있었는데도 김용만 묘련사에 가지 않았으며, 흥왕사로 진압군을 파견할 때의 태도도 수상하다고 느꼈다. 당시 유탁은 먼저 흥왕사로 가라는 김용의 권고를 듣지 않고 순군에 남아 그의 동태를 지켜보았다고 한다. 더욱 의심을 키운 것은 사건 도중에 잡혀온 자객들을 심문 없이 모두 죽여버리고, 이후 잡혀온 자객들도 심문하지 않는 김용의 처리 방식이었다. 결국 그는 유배를 당했고, 국문 끝에 죽임을 당했다. 사지를 찢어 각 도(道)에 조리돌리고 머리는 개경으로 보내 저자에 효수(梟首)하였으며, 그 집은 적몰(籍沒)하여 연못으로 만드는 극형에 처해졌다.

김용은 도대체 왜 이런 극단적인 음모를 꾸몄을까? 이는 아마도 공민왕에게 오빠가 살해당한 기황후가 원한을 품고 있었으며, 그런 기황후를 부추겨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덕흥군(德興君)을 새 왕으로 옹립하려 했던 최유(崔濡) 등이 김용과 손을 잡았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미 큰 권세를 누리고 있었지만 더 큰 출세를 위해 자신을 오랫동안 아껴준 국왕마저 시해하려 하였던 것이다.

공민왕은 김용의 배신에 대하여 믿지 못했던, 아니 차마 믿고 싶지 않았던 듯하다. 김용을 유배지로 보내면서도 예전의 공을 생각하여 순군에 내려 문초하지는 않겠다고 한 것이나, 훗날 그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 탄식하고 그 무리의 죄를 추궁하지 말라고 한 데에서 그러한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공민왕을 원에서 모시다가 귀국한 뒤로 불과 10년 남짓한 시간이었다. 그가 공신과 역적의 타이틀을 모두 가지게 된 것은. 왕의 신임과 총애를 받으며 높은 지위에 올랐던 김용.

당시의 파란만장했던 국내외 정치 상황에서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여 나라를 바로잡는 데에 애쓰기보다는 자신의 출세욕에 지극히 충실했고 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그의 삶은 후대인들에게 짙은 씁쓸함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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