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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후[金允侯]

화살로 몽골 살리타이를 격퇴하다

미상

김윤후 대표 이미지

김윤후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개요

김윤후는 고려 고종[고려](高宗)대 몽골과의 전쟁 당시 승려로서 군대를 이끌었던 인물로, 특히 1232년(고종 19) 2차 침입 당시 처인성(處仁城)에서 몽골의 장수인 살리타이(撒禮塔)를 죽인 것으로 유명하다. 이 사건은 이를 계기로 몽골군이 철수하게 된다는 점에서 고려-몽골 전쟁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이후에도 김윤후는 1253년 몽골의 5차 침입 당시 충주산성(忠州山城)에서의 전투에서도 몽골군을 물리치는 데에 공을 세웠다.

전쟁에서의 공으로 1258년(고종 40)에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에 임명되었으나 당시 동북면은 이미 몽골군에게 함락되어 있었으므로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 원종[고려](元宗)대 수사공(守 司空)·우복야(右僕射)로 있다가 치사했다. 그의 가족관계나 생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다.

2 몽골의 1차 침입과 강화천도

1231년(고종 18) 8월, 몽골은 1225년(고종 12)에 발생했던 몽골 사신 저고여 피살사건(著古與被殺事件)을 빌미로 고려를 공격했다. 갑작스런 몽골의 침입에 고려 조정이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가운데 각 지역민들의 분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몽골군은 개경(開京)을 지나 충주에까지 이르렀고, 몽골의 장수들이 개경 근교에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고려 조정은 몽골과의 화친을 추진했다.

1231년(고종 18) 12월 초, 고려의 왕실인 회안공(淮安公)이 몽골군 장수인 살리타이에게 가서 화친의 뜻을 전하고 몽골 사신을 통해 표문을 보냄으로써 양국 간에 화의가 이루어졌다. 이듬해 정월에 몽골군은 철수했다. 그러나 몽골군이 철수한 직후, 당시 집권자였던 최우(崔瑀)는 강화도로 천도할 것을 논의하게 하고 있어 앞서 몽골과 화의를 추진할 당시에도 실제 화친 관계를 유지할 뜻은 없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몽골의 침입을 받고 화의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국왕 고종을 비롯해 신료들 가운데에도 강화도로 천도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최우는 천도를 강행하여 1232년(고종 19) 7월에 강화도로의 천도가 단행되었다. 강화천도(江華遷都)는 최씨 정권을 유지시키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몽골이 수전(水戰)에 약하다는 점을 이용한 전략이기도 했다. 이는 당시 고려에서 몽골의 침입에 대응해 지역 군현민들을 육지에 인접한 해도(海島), 즉 섬으로 들어가게 한 해도입보책(海島入保策)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화친 직후 이루어진 고려의 강화천도는 이후 30여 년에 이르는 항쟁을 가능하게 한 결정이었지만 이는 몽골을 자극했다. 강화천도가 단행된 직후인 1232년(고종 19) 8월에 몽골은 다시 고려를 침입했다.

3 몽골의 2차 침입과 처인성 전투

1232년(고종 19) 8월, 몽골은 1차 침입을 이끌었던 장수 살리타이를 수장으로 해서 다시 고려를 침입했다. 이때 몽골군의 일부 부대는 남하하여 경상도 일대에서 현종[고려](顯宗)대 제작되었던 부인사(符仁寺) 소장 대장경(大藏經)을 불태웠다. 반면 수장 살리타이는 상당기간 서북면(西北面) 지역에 머물면서 강화도의 조정에 사신을 보내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으로 그에 앞서 국왕과 집권자 최우가 몽골에 친조를 하거나 육지로 나올 것을 요구했다. 살리타이의 주력부대는 같은 해 10월 경 남하를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개경을 거쳐 한양산성을 함락시킨 후 11월에 광주성(廣州城)을 포위했다. 그러나 당시 이 지역 부사였던 이세화(李世華)가 민들을 이끌고 강하게 저항해 몽골군을 물리쳤다. 광주산성 전투(廣州山城戰鬪) 이후 살리타이의 군대는 계속 남하하여 처인부곡(處仁部曲)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살리타이가 화살에 맞아 죽게 되면서 수장을 잃은 몽골군은 철군하였다. 이에 몽골의 2차 침입은 일단락되었다.

몽골의 2차 침입 당시 처인부곡민들은 그 중심에 있었던 토성(土城)인 처인성(處仁城)에 들어가 있었다. 이는 고려에서 몽골의 침입에 대응해 선택한 해도입보책과 유사한 산성입보책(山城入保策)의 일환이었다. 이때, 승려로서 백현원(白峴院)에 있었던 김윤후 역시 몽골의 침입을 피해 처인성으로 피난을 가 있었는데, 살리타이가 공격해 오자 김윤후가 이끄는 처인부곡민들이 그를 죽인 것이다.

김윤후와 처인부곡민들이 살리타이를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김윤후가 직접 화살로 쏘아 그를 죽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는 이후 고종이 그의 공을 포상하여 상장군에 임명하자 김윤후가 “전투할 때 저는 활이나 화살을 갖고 있지 않았는데 어찌 귀한 상만 받겠습니까”라 하며 사양했다는 것을 볼 때에도 그렇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처인성 전투는 일개 지역민들이 몽골군의 사령관을 죽였다는 점에서 고려의 몽골에 대한 항전 가운데 가장 큰 승리였다고 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김윤후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이는 이후 충주 전투에서의 그의 역할과 역량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전투에서의 처인부곡민과 김윤후의 공은 국가로부터도 인정을 받아 특수 행정구역으로서 일반 군현 지역에 비해 차별을 받았던 처인부곡은 처인현으로 승격되었고, 김윤후는 섭낭장(攝郎將)의 벼슬을 받았다.

4 몽골의 5차 침입과 충주 전투

처인성 전투에서의 공으로 섭낭장에 임명되었던 김윤후는 이후 충주남산성(忠州南山城)의 방호별감(防護別監)으로 임명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다시 한 번 몽골군을 맞아 공을 세우게 된다.

1253년(고종 40) 7월, 예쿠(也窟)를 수장으로 한 몽골의 5차 침입이 이루어졌다. 이때 예쿠는 아모간(阿母侃), 홍복원(洪福源) 등을 대동하고 대규모의 침입을 단행했는데 10월 경 그 군대가 충주에 이르렀다. 이때 충주에 이른 몽골군은 예쿠의 지휘 하에 부장인 아모간, 홍복원 등이 이끄는 주력군이었다. 또한 남하하는 과정에서 항복한 양근성(楊根城) 방호별감 윤춘(尹椿), 충주 인근의 천룡산성(天龍山城) 방호별감 조방언(趙邦彦), 황려현령(黃驪縣令) 정신단(鄭臣旦) 등이 거느리고 있던 민들까지 공격에 합세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몽골군의 남하는 충주에서 저지되었다. 우선 11월에 수장이었던 예쿠가 몽골 내부의 사정으로 소환되었다. 이후 아모간, 홍복원 등이 공격을 계속했으나 충주성을 함락시키는 데에는 실패했다.

여기에는 당시 충주산성 방호별감이었던 김윤후의 활약이 있었다. 10월부터 12월까지, 70여 일에 걸쳐 몽골군이 충주성을 포위하고 공격하는 가운데 성 안에 식량이 거의 다하게 되자 김윤후는 “누구든 힘을 다 바쳐 싸우는 자라면 귀천의 차별 없이 모두 벼슬과 작위를 주겠다”라 하며 병사들을 독려하고 관노(官奴)를 등록한 장부를 불태우고 노획한 말과 소를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이에 충주의 민들이 모두 있는 힘을 다해 적을 공격하여 결국 몽골군을 물리치고 그들의 남진을 막았다.

이후 몽골군은 화의를 명분으로 철군했고, 몽골의 5차 침입이 일단락되었다. 충주 전투(忠州戰鬪)에서의 승리는 충주민들의 항전의식과 함께 일반민부터 노비까지 지역의 전 구성원들의 전투 역량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는 데에 성공한 김윤후의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그 공으로 김윤후는 감문위(監門衛) 상장군(上將軍)으로 승진되었고, 이외 군공이 있는 자들에게는 관노와 백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에 따라 차등 있게 관작이 주어졌다. 그리고 충주는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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