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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존[金仁存]

예종대를 대표하는 문인 관료, 여진 정벌을 반대하다

미상 ~ 1127년(인종 5)

김인존 대표 이미지

고려사 권96 열전6 제신 김인존 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김인존(金仁存)은 고려 선종(宣宗) 시기부터 인종(仁宗) 시기까지 활동한 관료이자 학자이다. 자는 처후(處厚)이고, 처음 이름은 김연(金緣)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대표적인 개경의 문벌이었다. 1127년(인종 5)에 사망하였고 이후 예종(睿宗) 묘정에 배향되었다. 외교측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요, 송 등으로 사행을 다녀왔고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재상이 되어 당대 정치에 한 축을 담당하였다. 김인존이 활동했던 시기의 고려는 중원의 송(宋), 거란의 요(遼), 여진의 금(金) 사이에서 국제정세에 정치·군사적으로 민감하고 유연하게 대처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었다. 김인존은 고려가 마주하는 중요한 국면마다 신중하고 정확한 판단력을 가지고 안팎에서 활약하였다. 시호에서 알 수 있듯이 특히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을 드날렸다.

2 개경의 문벌로 태어나 고위직을 역임하다

김인존은 강릉 김씨로 신라 왕족인 각간(角干)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할아버지는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를 지낸 김양(金陽)이고 아버지는 과거에 급제하여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郎 同中書門下平章事)를 역임한 김상기(金上琦)다. 김상기는 여러 차례 과거를 주관하였고 시호인 문정(文貞)에서도 드러나듯 학문과 문장으로 뛰어났던 인물이었다. 어머니는 한남군대부인 최씨(漢南郡大夫人 崔氏)이며, 남동생 김고(金沽)와 누이가 있었다. 김고는 문하시중(門下侍中) 유홍(柳洪)의 딸과 혼인하였으니 명의태후(明懿太后) 유씨(柳氏)의 자매이다. 이후 경원 이씨를 후처로 맞이하였다. 누이는 해동공자 최충(崔沖)의 증손인 최용(崔湧)과 혼인하였다. 김인존은 이자연(李資淵)의 손녀이자 이자겸(李資謙)의 누이인 경원군부인 이씨(慶源君夫人 李氏)와 혼인하였으니, 그야말로 당대 개경 최고의 가문 간의 통혼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듯 김인존 가문은 경원 이씨와 해주 최씨, 정주 유씨 가문 등 대표적인 개경의 문벌이라 할 수 있는 가문과 지속적으로 통혼관계를 맺었다.

이후 자식대에도 강력한 혼맥이 이어지는데, 이는 김인존의 외조카가 예종의 숙비(淑妃)인 장신궁주(長信宮主)이고 장남인 김영석(金永錫)이 문하시중 이공수(李公壽)의 딸과 혼인한 것 만 봐도 알 수 있다. 김영석이 ‘벌열(閥閱)에서 나고 자랐다’고 묘지명에서 서술되어 있듯, 김인존 가문은 당시 개경의 여타 유력 가문은 물론이고 왕실과 통혼 할 수 있는 사회적 지위에 있었던 대표적 문벌이었던 것이다. 아들은 김영석, 김영윤(金永胤), 김영관(金永寬)이 있었고 최함(崔諴)과 혼인한 딸이 하나 있었다. 세 아들들 역시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아들 뿐 아니라 아우와 사위 모두 고위직에 올랐다. 당시 김인존 가문은 중국 동진시대의 대표적인 명문 귀족인 왕씨와 사씨[王謝]에 비견될 정도였다.

총명하고 예리한 성품의 김인존은 아버지 뒤를 이어서 어린 나이에 과거 급제하여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다. 선종, 헌종(獻宗), 숙종(肅宗)까지 내시(內侍)로서 왕을 모시다가 외직에 나가기를 자원하여 상서예부원외(尙書禮部員外)를 거쳐 개성부사(開城府使)로 나갔다. 이후 간관(諫官)이 되어 기거사인 지제고(起居舍人 知制誥), 기거랑(起居郎)을 역임하였으나 언사가 임금에게 거슬러 좌천되었다. 이후 이부낭중 겸 동궁시강학사(吏部郞中 兼 東宮侍講學士), 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되었다가 요에 사행을 다녀와서 예부시랑 간의대부(禮部侍郞 諫議大夫)로 자리를 옮겼다. 1109년(예종 4)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 임명되었다가 1111년(예종 6)에 비서감 추밀원부사(秘書監 樞密院副使)로 승진하여 송에 다녀왔다. 이후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병부상서(兵部尙書), 예부상서(禮部尙書), 호부상서(戶部尙書), 정당문학(政堂文學), 참지정사(叅知政事)를 지냈다. 이후 수사도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상주국(守司徒 中書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 上柱國)으로 승진하였는데, 1117년(예종 12)에 북방 국경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판서북면병마사(判西北面兵馬使)가 되어 나갔다 왔다. 인종이 즉위하고 이자겸이 득세하자 자청하여 재상직에서 내려와 판비서성사 감수국사(判秘書省事 監修國史)가 되었다가 이자겸의 난이 평정된 이후 익성동덕공신(翊聖同德功臣) 호를 받고 문하시중(門下侍中) 자리에 올랐다. 그는 1127년 최종적으로 수태부 문하시중 판이부사(守太傅 門下侍中 判吏部事)라는 최고의 관직에서 관직생활을 마감하였다.

3 당대를 대표하는 문인이자 학자로 명성을 날리다

김인존은 과거에 급제하여 입사하였고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늙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을 정도로 학문을 좋아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가풍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예종이 동궁에 있을 시절, 동궁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로 임명되어 직접 학문을 가르치는 일을 담당하였다. 이때 『논어신의(論語新義)』를 찬술하여 『논어(論語)』를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김인존은 고려에 문풍을 진작시키고자 하였던 예종에게 스승이자 중요한 인재였다.

김인존은 유학에 정통한 학자로서 활약하며 왕의 명령으로 많은 책을 편찬하였다. 1106년(예종 1) 3월에는 태사관(太史官)과 함께 음양과 지리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책을 모아 비교하고 번잡하고 혼란스러운 부분을 삭제하고 정리하는 작업에 참여하여 『해동비록(海東秘錄)』이라는 하나의 책으로 편찬하였다. 1113년(예종 8)에는 박승중(朴昇中) 등과 함께 『시정책요(時政策要)』 5책을 편찬하였으며, 1116년(예종 11)에는 『정관정요(貞觀政要)』에 대한 주해(註解)를 편찬하여 올렸다. 예종은 궁궐 안에 청연각(淸讌閣)과 보문각(寶文閣)을 지어 학사들과 자주 만나며 강론을 듣곤 하였는데, 이때 김인존이 『예기(禮記)』, 『서경(書經)』 등을 강론하였다. 또한 예종대에 동지공거(同知貢擧)와 지공거(知貢擧)로서 두 차례 과거를 관장하여 인재를 선발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1117년(예종 12)에 청연각에서 왕이 종친과 양부(兩府)에게 연회를 베풀고 김인존에게 그 일을 기록한 「청연각기(淸讌閣記)」를 짓게 하였는데, 그 글은 명문으로 『고려사』뿐 아니라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도 남아있다. 문한(文翰)을 담당하여 당시의 조서(詔書)와 교서(敎書)는 그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았는데, 『동인지문사륙(同人之文四六)』에 「사견의관교습표(謝遣醫官敎習表)」, 「숙왕유교(肅王遺敎)」 등이 전해진다. 이 같이 관료로서 쓴 공적인 글 외에 『동문선(東文選)』에 그가 쓴 시인 「대동강(大同江)」이 남아있어 그의 문학세계를 엿볼 수 있다.

긴 하늘에 구름 걷히고 물이 하늘을 비쳤는데 雲捲長空水映天
대동루 위에 벌어진 화려한 잔치 大同樓上敞華筵
청화한 햇빛은 장막 틈으로 새어 들고 淸和日色篩帘幕
나부끼는 향연은 관현에 뜨네 旖旎香煙泛管絃
한 줄기 긴 강은 맑아 바로 거울인데 一帶長江澄似鏡
두 줄 수양버들은 멀리 완연 연기로고 兩行垂枊遠如煙
을밀대 앞의 경치를 行看乙密臺前景
십 년 본 것을 징험하여 장래에 표지해 두네 自驗十年表未然

김인존의 뛰어난 문학적 능력은 1102년(숙종 7), 20대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고려 경내로 들어오는 요의 사신을 맞이하는 접반사(接伴使)가 되었을 때의 일화에도 전해진다. 이때 온 요의 사신은 학사(學士) 맹초(孟初)였는데, 그가 보기에 김인존이 어려 보이자 소양이 낮을 것으로 판단하여 내심 쉽게 보았다. 그러던 중 두 사람이 말을 나란히 하여 교외로 나간 어느 날이었다. 끝없이 내리던 눈이 그치고 사방을 둘러보니 아득하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고요히 오직 말발굽소리만 났다. 이에 문인이었던 맹초가 감상을 이기지 못하고 시를 읊기를 “말발굽이 눈을 밟으니 마른하늘에 천둥이 치네.”라고 하였다. 그런데 김인존이 곧바로 응답하는 시를 읊어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니 세찬 불길이 타오르네.”라고 하였다. 기대하지 않았던 훌륭한 답시에 맹초는 무척 놀랐던 듯하다. “진실로 천재로다.”라고 감탄하고 이후 날마다 시를 주고받으며 둘의 사이는 급속도로 친해져서 헤어질 때는 맹초가 차고 있던 허리띠를 김인존에게 선물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김인존은 이미 젊은 나이에 요를 대표하는 문인에게 인정을 받을 정도로 문학적 수준이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4 사신이 되어 요와 송에 다녀오다

김인존은 일찍이 외교적 능력을 인정받아 고려에 온 사신을 접대하거나 외국으로 사행을 가는 일을 담당하였다. 접반사로서 고려에서 요의 맹초를 접대한지 3년이 지나고 1105년(예종 즉위)에 숙종이 죽자 이를 알리는 고애사(告哀使)로서 이번엔 그가 요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사신 행렬이 지나는 곳마다 모두 연회를 베풀고 음악을 연주하니, 이를 정중히 거절하였으며, 요의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길복(吉服)을 입는 것과 무도(舞蹈)의 절차를 생략할 것을 청하였다. 요의 입장에서는 다소 무리가 될 수 있는 요구였으나 이때 친분이 있던 맹초가 중재하여 길복은 입되 무도는 면제하게 해 주었다.

1111년(예종 6)에는 사은사(謝恩使)로서 송에 다녀왔다. 이때 송은 요와의 갈등 때문에 고려와의 관계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였다. 그래서 송 휘종(徽宗)이 고려 사신을 우대하여 본래보다 등급을 높여서 대우하고 여러 차례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때 경험한 것들이 지나치게 성대하고 화려했던 모양이다. 이에 대하여 김인존은 송이 처한 상황을 고려한다면 사치스러움이 너무 심하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런데 이때 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 김상기의 부고를 듣게 된 김인존은 임금에게 사신 다녀온 일을 보고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 부친상을 치르는 것을 선택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예에 어긋난다는 비난을 사기도 하였다.

5 간관 김인존, 여진 정벌을 반대하다

11세기 후반은 동북아시아는 송-요-고려가 상호 경쟁과 긴장 속에서 나름의 평화를 유지해나가던 시기였다. 하지만 이 아슬아슬한 공존은 여진의 성장으로 인하여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여진 부족 중 완안부의 급격한 성장으로 고려와의 갈등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1104년(숙종 9)에 한 차례의 충돌이 벌어지게 된다. 이때 등장하는 이가 바로 윤관(尹瓘)이다. 하지만, 고려는 이때 뼈아픈 참패를 경험하게 되고, 이후 윤관의 건의로 별무반(別武班)을 설치하는 등 전쟁에 대비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그러나 숙종의 죽음으로 바로 전쟁으로 이어지지는 못하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다.

예종이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고 2년이 지난 후 고려는 다시 여진과의 전쟁을 준비한다. 윤관은 여진과의 전쟁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때에도 여진 정벌의 선두에 서게 된다. 이것이 바로 동북 9성 축조로 유명한 윤관의 여진 정벌이다. 윤관은 “신이 일찍이 성고(聖考)의 밀지를 받들었는데 지금 또 엄명을 받았으니, 어찌 감히 3군을 통솔하여 적의 보루를 깨뜨려 물리치고 우리 강역으로 만들어 나라의 치욕을 씻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출정에 강한 자신감을 보였고 여러 대신들 역시 모두 왕의 개전 명령에 찬성하였다. 오직 한 사람, 김인존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김인존은 국제 정세에 대한 나름의 판단으로 이 정벌이 고려에 득이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홀로 상소하여 강력하게 출정을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 하나로 이미 여진 정벌로 기울어진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결국 윤관을 필두로 고려는 대대적인 여진 정벌에 나서게 된다.

김인존의 우려와는 달리 정벌은 대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였다. 여진을 격파하고 해당지역에 성을 수축하였다. 개선장군 윤관이 큰 포상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완안부가 파견한 군대와 현지 여진 부족의 거센 반격이 계속되어 고려군의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상황은 악화일로로 가고 있었다. 여진은 여진대로 고려는 고려대로 괴로운 상황에서 여진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고 옛 땅을 돌려달라고 애걸하였다. 정세를 파악한 고려 조정의 분위기는 이미 1년 전과 달라져 화의를 맺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었고 이에 의견이 일치되지 못하고 대립하였다. 예종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이 깊어지고 있었다. 이때 김인존은 거란과의 관계를 이유로 여진에게 9성을 돌려줄 것을 간하였다. 그의 논리는 이러했다. 처음 9성을 쌓고 거란에 표문을 올려 설명하기를 여진의 궁한리(弓漢里)가 본래 고려의 옛 땅이고 그 사람들도 고려의 백성이므로 수복하고 성을 쌓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궁한리 추장 중에는 거란의 관직을 받은 자가 많아 거란에서는 고려가 거짓말을 한다고 여기고 있다. 따라서 9성을 도로 돌려주지 않는다면 곧 거란의 견책이 뒤따를 것이다. 만약 고려가 9성으로 인하여 동쪽으로 여진, 북쪽으로 거란에 대비하게 된다면 오히려 9성을 유지하는 것이 득보다 실이 크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예종은 그의 말을 옳다고 여겨 여진에게 9성을 반환하였다. 김인존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출정한지 2년 만의 일이었다.

이후 김인존은 동료인 간의대부(諫議大夫) 이재(李載)와 어사대부(御史大夫) 최계방(崔繼芳) 등과 함께 윤관과 오연총(吳延寵)에게 패전의 죄를 물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예종은 승선(承宣)을 보내 달래보았지만 이들이 간쟁하는 것을 그치지 않자 결국 윤관 등을 파직하고 공신호를 박탈하였다. 1년 뒤 윤관과 오연총 등을 논죄해야 한다는 주청을 다시 올렸으나 또 허락받지 못하자 대각(臺閣)의 낭관(郎官)들이 모두 관직을 버리고 일을 보지 않는 강수를 두었다. 이때 송 사신을 접대하는 일 때문에 왕이 간곡히 설득하여 대부분 다시 출근하였는데, 김인존만이 바로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 사례만 보아도 김인존은 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간관으로서 자신이 주장하는 바에 강경한 태도를 지녔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파한집(破閑集)』을 저술한 이인로(李仁老)도 김인존에 대하여 왕에게 간언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나라에 유익한 것이지만 처음에는 잘못되고 거칠어 보일 수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면모는 1107년(예종 2)에 승려 담진(曇眞)을 왕사(王師)로 책봉하는 문제에서도 잘 나타난다. 예종은 그를 봉숭사(封崇使)로 삼으려 했는데, 김인존은 본인이 간관으로서 왕사를 책봉하는 문제에 반대하는 간언을 하였기 때문에 만일 봉숭사가 된다면 임금을 속이게 되는 것이라 말하며 사양하였다. 왕이 강력하게 두세 번이나 더 권하였는데도 뜻을 굽히지 않고 결국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진 정벌 문제에 있어 임금의 뜻과 조정의 여론에 상관없이 자신의 의견을 시종일관 굳게 주장하는 모습과 왕의 강권에도 봉숭사의 임무를 끝내 거절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김인존의 인물의 강직한 일면을 엿볼 수 있다.

6 변방에 나아가 고려의 국경을 넓히다

고려가 여진에게 동북 9성을 돌려주고 화친을 맺은 지 6년 후, 1115년(예종 10) 완안부가 나라를 세워 금(金)이라 하면서 고려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다시 한 번 급변하게 된다. 금은 맹렬한 기세로 세력을 확장해나가며 요를 공격하였다. 1117년(예종 12)에 금의 공격으로 고려 북방 국경에 있는 요의 주군(州郡)이 거의 파괴되고 있었다. 당시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였던 김인존은 판서북면병마사가 되어 북방 국경지대의 군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는 아래의 시를 남기고 임지로 떠났다.

십년을 대각(臺閣)에서 임금의 말씀을 맡았는데,
오늘은 뒤집혀 장군[閫外臣]이 되었네.
간원에서 바른 언론 펼치지 못하였지만,
변방에서 오로지 오랑캐 군사를 쓸어내려 하네.
귀밑머리 일찍 흰 것은 나라 걱정 때문이며,
흐르는 눈물 금하기 어려운 것은 어버이 그리워서이네.
마을 문에 모인 젊은이들에게 깊이 감사하는 것은,
맑은 술 백 항아리로 가는 사람 전별해서네.

마침내 금의 군대가 요의 개주(開州)를 차지하고, 내원성(來遠城)을 습격하여 대부영(大夫營)·걸타영(乞打營)·유백영(柳白營)의 세 영을 함락시키고 전함을 모두 불태워 버린다. 통군(統軍) 야율영(耶律寧)과 내원성자사(來遠城刺史) 상효손(常孝孫) 등은 금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고려의 영덕성(寧德城)에 첩문을 보내 내원성과 포주성(抱州城) 두 성을 반환하고 배를 띄워 달아났다. 이로부터 약 7개월 전에 고려는 금에 사신을 보내 포주는 원래 우리 땅이니 돌려받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금은 고려 스스로 쟁취하라고 답하였다. 사전에 이 지역을 고려가 되찾는 것에 대하여 금의 묵인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김인존은 바로 군대를 이끌고 두 성에 들어가 차지하고 병장기와 물화를 거두어들였는데 그 수가 매우 많았다. 그가 이 사실을 상세히 적어 왕에게 급히 보고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며 포주를 의주방어사(義州防禦使)로 고치고 압록강을 국경으로 삼았다. 이것은 요와 금 사이의 전쟁에서 고려가 크게 힘들이지 않고 어부지리로 얻게 된 성과라 할 수 있다. 시대는 바야흐로 발호하는 금을 중심으로 국제 정세의 판도가 새롭게 짜이고 있었고 고려는 이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 여진 정벌에 힘을 쏟았었던 고려는 이제 금과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관계설정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7 관직에서 물러나 왕의 조언자가 되다

예종대에 재상의 지위에 오르며 정치일선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김인존은 예종이 사망하고 어린 인종이 즉위하자,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자겸 세력의 권력 장악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김인존은 이자겸과 정치적 노선이 달랐으나 높은 관직에 있으니, 충돌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화가 미칠까 두려워 관직에 물러나기를 왕에게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하는 길에 동요를 듣고는 낙마하여 병을 핑계로 다시 재상직에서의 해임을 요청하여 한직인 판비서성사 감수국사(判祕書省事 監修國史)에 임명되었다. 김인존까지 일선에서 물러나 숨을 죽이니 이자겸의 권세는 거칠 것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인종 역시 이자겸을 제재할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은밀히 김인존에게 이자겸의 권한을 빼앗는 일에 대하여 조언을 구하였다. 김인존은 인종에게 이자겸과 정치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믿고 의지할만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인종이 외가에서 성장하여 외조부인 이자겸의 은혜를 쉽게 저버릴 수 없다는 점과 정치적으로 조정에 이자겸 세력이 가득하여 일이 쉽지 않다는 점을 들어 이자겸을 제거하는 것이 시기상조라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인종은 이 조언을 따르지 않았다. 결국 이른바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 궁이 불타버리자 인종은 뒤늦게 김인존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며 한탄하였다고 한다. 지금까지 그와 관계된 고려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살펴보면, 결과적으로 그가 시세를 바라보는 판단력이 상당히 정확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이자겸이 정계에서 축출되자, 김인존은 다시 고려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으로 화려하게 복귀하게 된다. 예종의 유명(遺命)이라는 이유로 마지못하여 직책을 맡기는 하였지만 다른 사람의 부축이 필요할 정도로 그는 이미 노쇠한 상태였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그는 변화하는 국제 정세의 파도 속에서 신중하게 고려의 방향을 조정하는 키잡이 역할을 다하였다. 1127년 5월, 그가 사망하기 불과 7개월 전의 일이었다. 변방에서 금이 송을 침략하였으나 패배하였고 오히려 송의 군대가 금의 국경에 깊숙이 들어갔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고려에서 김부식 등이 송으로 사행을 떠나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변방의 보고를 들은 조정은 술렁였다. 왕은 이때 서경에 있었는데, 함께 있던 정지상(鄭知常)과 김안(金安) 등은 송이 승기를 잡은 이때, 바로 원병을 보내어 금을 함께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종 입장에서는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중국 역사에 길이 남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에 매우 유혹적인 제안이었을 것이다. 인종은 급히 개경으로 사람을 보내 이 사안에 대하여 김인존의 의견을 물었다. 그가 보기에 변경의 보고는 형세 상 믿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김인존은 신중한 태도로 이렇게 답한다. “전하여 들은 일은 항상 사실을 잘못 보는 경우가 많으니, 뜬소문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강한 적을 노엽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또 김부식이 장차 돌아올 것이니, 청하건대 그를 기다려 진위를 알아보게 하십시오.” 김부식이 돌아오자 보고가 잘못된 것이었고 과연 그의 판단이 옳았음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그는 끝까지 고려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왕은 꼭 그에게 자문을 구할 만큼 조정의 중신으로서 그를 예우하였던 것이다.

8 12세기 문벌사회의 중심에서 살다 가다

김인존은 선종, 헌종, 숙종, 예종, 인종 5대의 조정에서 든든한 가문 배경과 개인의 뛰어난 능력으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그가 활동했던 12세기 고려는 점차 내외적인 충격과 모순들이 축적되어 가던 시기였다. 국제 정세의 측면에서는 여진이 급성장하여 기존의 판도가 흔들리고 있었고 국내 정치적 측면에서는 이자겸의 난을 전후로 문벌사회가 분열되기 시작하였으며 사회경제적인 문제점들이 쌓이면서 민들의 유망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었다. 김인존은 고려 전기 개경 문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면서도, ‘이자의의 난’을 통해 집권하게 된 숙종 초에는 외직으로 자임해 나가고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기 전 면직(免職)을 요청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는 등 문벌사회의 모순과 관련되는 큰 정치적 변란에는 아예 연루되지 않으려는 행보를 보인다. 대외적 관계에 있어서도 보수적이고 현실적이 판단을 많이 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쩌면 그러한 정치적 감각과 처세는 그가 영화롭게 천수를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료에 남아있는 김인존의 정치적 행보를 하나 하나 후대의 시각에서 감히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이 시대를 살아나갔던 한 인간 김인존의 삶과 고민을 그저 따라가며 그를 이해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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