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고려
  • 나옹혜근

나옹혜근[懶翁惠勤]

고려 말 불교계의 새로운 바람

1320년(충숙왕 7) ~ 1376년(우왕 2)

나옹혜근 대표 이미지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나옹혜근(1320~1376)은 공민왕대 활동한 대표적인 고승이다. 그는 원(元)에 유학하여 수도에서 고승 지공(指空)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강남(江南)으로 내려가서는 평산처림(平山處林) 등의 저명한 고승들과 교류하였다.

그는 고려로 돌아와서는 공민왕의 공경을 받아 불교 교단의 통합 시책의 중심에서 활동하게 된다. 나옹은 1370년(공민왕 19)에 선교(禪敎)의 승려들을 대상으로 시행한 시험인 공부선(功夫選)을 주관하였고 다음 해에는 왕사로 책봉되었다. 1372년에는 양주 회암사(檜巖寺)를 대대적으로 중창하였는데 그곳으로 지나치게 많은 신도들이 몰리게 되자 조정에서 나옹을 추방하였고 1376년에 밀성군(密城郡)으로 향하던 중에 병이 났고 여흥 일대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하게 된다. 후에 그의 제자들이 승탑(僧塔), 윤필암(潤筆庵) 등을 조성하면서 그의 위상은 더욱 높아진다. 그 과정에서 나옹의 제자들은 우왕대 불교계의 최대 세력으로 부상하여 여말선초 불교를 이끌어나가는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2 원에서의 유학

나옹은 젊은 시절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에 있는 요연선사(了然禪師)에게 출가하였고 전국의 이름난 사찰들을 돌아다니며 수학에 정진하였는데 양주 일대 회암사에 머물면서 득도하였다. 그는 20대 후반에 원으로 들어가 수학에 더욱 매진하게 된다.

나옹은 약 4년간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 일대) 소재의 법원사(法源寺)에 머물면서 당대의 고승인 지공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후에 강남지역으로 내려가 그 일대의 저명한 고승들과 문답을 나누며 교류하였으며 안거(安居)에 참여하는 등 약 3년간 강남 불교를 경험하게 된다. 대도로 다시 돌아온 뒤에는 하북성과 산서성 일대를 유력하다가 황제인 순제(順帝)의 명으로 광제선사(廣濟禪寺)에 주지하기도 하는 등 약 10년간 원에 있으면서 당시의 고승들을 통해 불교를 수학하고 경험하였다.

나옹은 1358년(공민왕 7)에 고려로 귀국하였다. 그는 원에서 오랜 기간 수학한 경험을 바탕으로 종래의 구산문(九山門)이나 조계종(曹溪宗)과는 다른 임제선(臨濟禪)을 도입하고 간화선(看話禪)의 입장을 취하여 고려 말 선풍(禪風)을 새롭게 한 것으로 평가된다.

3 공민왕의 기용, 공부선의 주관과 왕사 책봉

나옹은 원에서의 수학을 마치고 1358년(공민7)에 고려로 돌아왔다. 그는 1360년에 공민왕의 요청으로 개경으로 들어와 입궐하여 설법하였다. 당시 공민왕은 불교 교단의 통합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으며, 신돈(辛旽)을 주살하고 친정(親政)을 선언한 후에는 1370년에 선교(禪敎)의 승려들을 개경의 광명사(廣明寺)에 모아 공부선을 시행하였다. 이때의 시험을 나옹이 주관하도록 하였으며, 다음 해인 1371년에 그를 왕사로 책봉하고 당시 선종의 제1도량으로 여겨진 송광사(松廣寺)에 주석하도록 하였다. 나옹은 공민왕의 비인 노국대장공주와 공민왕의 국상(國喪)에서 천도불사를 담당하는 등 우왕대 초에 이르기까지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나옹은 기존에 고려 불교 교단에서 활약한 고승들과 달리 승과에 합격한 이력이 없고 승관(僧官)으로 활동하면서 차근차근 지위를 높여간 바도 없다. 그러나 그가 원에 들어가 오랜 기간 머무르면서 당대의 고승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교류하여 원대 불교를 두루 경험하였기 때문에 공민왕이 그를 전격 발탁하였다. 더욱이 공민왕은 그를 불교 교단의 영수 자리인 왕사에까지 책봉하였는데 이는 당시 불교 교단의 승려들 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이례적인 조치였다. 즉 나옹이 왕사로 책봉되어 공민왕대 불교 교단 통합 시책의 한 가운데서 활동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공민왕의 총애가 작용한 것이었다.

따라서 나옹은 기존의 불교 교단의 일원으로 입지를 다진 것은 아니었으나, 그가 입적한 후에 제자들이 그를 추모하는 불사를 대대적으로 진행함과 동시에 우왕대 불교 교단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인다. 공민왕대 나옹이 기용되고, 이후 추모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그의 승단은 고려 말 불교 교단의 주류가 되었다.

4 회암사 중창

나옹은 젊은 시절 1344년(충혜왕 후5)에 양주 일대 회암사에 머물면서 득도하였다. 그의 스승인 지공은 고려에 머무른 동안 회암사의 지형을 보고 서축의 난타사, 즉 인도의 날란다사와 같으므로 이곳에 사찰을 세우면 불법(佛法)이 크게 흥할 것이라고 하며, 그 터를 측량한 바 있었다. 나옹은 그러한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1374년(공민왕 23)에 회암사의 대대적인 중수를 시작하였고 1376년(우왕 2)에 완성되자 낙성회(洛城會)를 열게 된다.

그러나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입과 흉년이 거듭되면서 국가재정이 피폐해진 상황이었다. 더욱이 공민왕의 비인 노국대장공주 영당(影堂)을 짓는 공사가 진행되던 와중에, 회암사가 대규모로 중수됨에 따라 비판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또한 공사를 시작한 그해 공민왕이 시해당하였다.

회암사가 낙성되고 문수회(文殊會)가 열렸을 때 회암사에 지나치게 많은 신도들이 남녀, 귀천을 막론하여 몰리게 되면서 사헌부(司憲府)의 비판을 받게 된다. 이에 도당(都堂)의 명으로 절의 문을 닫게 되었으나 회암사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막을 수 없게 되자 조정에서는 나옹을 추방한다. 결국 그는 1376년에 밀성군(密城郡)로 향하던 중에 병으로 여흥 일대 신륵사에서 쉬다가 그곳에서 입적하게 된다. 왕사 나옹의 탄핵 및 추방,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공사가 진행되던 중에 공민왕이 시해당하고, 공민왕대 정치를 부정하려는 정치 세력이 주도한 것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이후에는 나옹의 제자인 무학(無學, 1327~1405), 혼수(混脩, 1320~1392) 등이 회암사에 주석하였다. 특히 무학 자초의 경우 조선 태조 이성계의 지극한 공경을 받아 왕사로 책봉되었고 회암사에도 많은 양의 토지와 재물이 시납되었다. 또한 태조가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는 회암사에 궁실(宮室)을 짓고 머무르는 등 이곳의 사세(寺勢)는 조선 초에도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5 제자들의 나옹 현창

나옹은 왕사에까지 올랐으나 조정의 탄핵을 받아 추방되던 중에 입적하였다. 이러한 불안정한 분위기 속에서 나옹의 제자들은 화장(火葬), 즉 다비식을 진행하게 되었는데 사리가 무수히 많이 나오게 된다. 불교에서 사리는 깨달음의 증거로서 고승의 도력(道力)을 상징하는 물품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현상은 나옹의 제자들뿐 아니라 일반 사람들에게도 이적(異蹟)으로 여겨졌다.

다비식에서 이적이 발생하면서 나옹은 신앙의 대상으로까지 추앙되었으며 그의 문도들은 스승의 행적과 관련이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사찰을 중수하였고 종, 승탑 등 그를 기념하는 조영물들을 조성하였으며 그의 어록을 간행하였다. 특히 나옹이 중창한 회암사와 그가 입적한 곳인 신륵사가 문도들의 거점으로서 크게 대두하게 된다. 이러한 움직임이 단기간에 전국적인 규모로 진행되면서 나옹의 위상은 더욱 높아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나옹의 문도들이 당시 지배층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는 모습이 보이게 되는데 특히 당시의 고관이자 유명 문인이었던 이색(李穡)에게는 불사에 관한 기록물인 기문(記文)의 작성을 많이 요청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옹의 문도는 우왕대 불교계의 최대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며 여말선초 불교를 이끌어나가는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