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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경승[杜景升]

시대를 잘못 만난 우직한 용장

미상 ~ 1197년(명종 27)

1 개요

두경승(杜景升)은 12세기 후반에 시작된 무신집권기에 살았던 무신이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1197년(신종 즉위)에 사망하였다. 전주(全州) 만경현(萬頃縣) 사람이었다고 한다.

2 후덕한 청년, 무신정변을 맞이하다

『고려사(高麗史)』에 실린 두경승의 열전에는 첫머리에서 그를 “자질은 후덕하나 글이 모자라고 용력이 있었다”라고 묘사하였다. 청년 두경승은 공학군(控鶴軍)에 들어가 군인이 되었고, 점차 승진하여 대정(隊正)에 올라 후덕전(厚德殿)의 견룡군(牽龍軍)으로 배속되었다. 즉 왕실 호위부대의 장교가 된 것이다. 그의 가계에 대해 『고려사』에는 자세한 서술 없이 장인이 상장군(上將軍)인 문유보(文儒寶)였다는 사실만을 전하고 있다. 평화로운 시대가 이어졌다면, 두경승은 아마도 왕실 호위부대의 장교를 거쳐 장군직을 바라보는 충직한 무인으로 조용히 살았을 듯하다.

그러나 시대는 곧 태풍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1170년(의종 24) 8월, 정중부(鄭仲夫) 등이 무신정변을 일으켰다. 이들은 개경(開京)을 장악하고 국왕을 폐위시킨 뒤 새 왕을 옹립하고, 자신들이 권력을 휘어잡았다. 수많은 문신들이 이 과정에서 살해당했다. 문신이 우대받던 당시의 현실에 대한 무신들의 불만이 터져 나온 사건이었다. 그러자 많은 무신들이 난리의 틈을 타 남의 재산을 노략질하기에 혈안이 되었으나, 두경승은 묵묵히 궁궐을 지켰다고 한다. 당시 정권을 쥐었던 이의방(李義方)은 그러한 두경승을 높이 평가하여 낭장(郎將)까지 승진시켰다. 이의방 본인은 누구보다 권력과 재물을 탐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다소 역설적이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랬기에 자신과 달리 충직했던 두경승을 높이 샀던 것일까.

3 너그러움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다

정중부와 이의방, 이고(李高) 등 무신정변의 주역들은 난폭한 정치를 이어갔다. 이들은 현실에 대한 불만은 있었을지언정, 현실을 좀 더 건강하고 바람직한 쪽으로 이끌고 갈 철학도 의지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히 이들에 대한 반발이 하나 둘 일어났다. 가장 먼저 들고 일어선 사람은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나가 있던 김보당(金甫當)이었다. 이른바 ‘김보당의 난’이 벌어진 것이다. 김보당이 거병하자 남쪽 지역까지 널리 호응이 일어났다. 1173년(명종 3) 9월, 이의방은 자신의 종형인 이춘부(李椿夫)와 두경승을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로 임명하여 남부를 진정시키도록 하였다. 이 때 두경승이 이춘부에게 건넨 조언이 그의 성품을 잘 보여준다.

당시 포악한 이춘부가 지방 수령들을 많이 죽였다고 한다. 그러자 두경승은 이미 적의 기세가 꺾였으니 관대하게 처분하고, 명백하게 반역의 증거가 드러난 자들만 처형할 것을 권하였다. 이춘부는 이 말을 듣고 두경승이 비겁한 자라 여겼으나, 그 말을 따랐다. 그 후 두경승의 관용에 감화된 남부 사람들은 기꺼이 중앙 정부의 방침을 따르며 안정을 찾아갔다. 이에 개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춘부는 두경승에게 크게 감사하며 생사를 같이 하는 벗이 되자고 하였다.

남에게 직언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상대방에게 그 말을 귀에 거슬리지 않게 하면서 동시에 따르게 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성품이 거칠고 이의방을 뒷배경으로 삼고 있던 이춘부가 아니었던가. 짤막한 일화지만, 두경승의 인품이 어땠는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이 공으로 두경승은 장군(將軍)으로 승진하고, 이어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로 임명되었다.

4 활을 쥐고 일어나 용맹을 떨치다

1174년(명종 4) 9월, 이번에는 서경유수 병부상서(西京留守 兵部尙書) 조위총(趙位寵)이 무신정권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른바 ‘조위총의 난’이다. 두경승은 이를 진압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그 동안은 후덕하고 인자한 모습을 주로 보였으나, 여기에서는 그의 장수로서의 용맹함과 군사 지휘력이 부각되었다. 특히 무주(撫州)의 객관에서 벌어진 무용담이 인상적이다. 두경승이 병사들을 이끌고 이동하다가 무주 객관에 도착해 점심을 먹기 시작하였다. 그 때 서경의 군사 천여 명이 기습을 하였다. 수비를 위해 객관의 아마도 부실했을 문이라도 걸어 잠그고 우왕좌왕하며 큰 혼란에 빠질 법한 상황인데, 이 때 두경승은 객관의 문을 열어버렸다. 그리고 적군이 밀려들어오니 활로 한 명을 쏘아 거꾸러뜨렸다. 이에 서경 병력이 패하여 도망쳤다고 한다. 이후 두경승은 병사들을 지휘하여 강행군을 펼쳐 개경까지 철수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명종은 두경승을 동로가발병마부사(東路加發兵馬副使)로 삼아 다시 전선으로 보냈다. 두경승은 5천여 병력을 데리고 진격하여 서경 병력을 크게 격파하였다. 고산(孤山), 의주(宜州), 맹주(孟州), 덕주(德州), 무주(撫州), 대동강(大同江) 일대에서 스무 차례에 걸쳐 연전연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개경으로 돌아온 두경승은 국왕에게 공적을 크게 치하받았고, 후군총관사(後軍惣管使)에 임명되어 다시 전선으로 향했다. 이 때 역시 “이르는 곳마다 적들이 초목이 바람에 쓰러지듯 하였다”라고 묘사될 만큼 승승장구하며 조위총의 병력을 격파하였다. 그는 결국 서경성을 격파하고 조위총을 잡아 죽이는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조위총의 잔여 세력을 진압하는 데에도 활약하였으며, 마침내 재상의 지위인 평장사(平章事)에 오르고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으로 책봉되었다.

5 우직함만으로 버티기엔 버거웠던 권력투쟁의 칼바람

그러나 재상의 지위에 오른 두경승은 이제 권력투쟁이라는 전혀 다른 전장에 나서야 했다. 이곳은 어쩌면 칼과 창이 부딪치는 전쟁터보다 더 살벌한 곳이었다. 우선 그는 글을 모르면서 재상이 되고 심지어 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었다고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이런 빈정거림보다 심각한 것은 다른 무신과의 충돌이었다.

당장 두경승과 마찰을 빚은 사람은 바로 이의민(李義旼)이었다. 무신정변 이래로 의종을 잔인하게 시해하는 등 수많은 사람을 죽이며 권력의 정점에 섰던 또 한 사람의 무신 이의민. 유일하게 그를 긴장시켰던 경대승(慶大升)이 사망한 후, 이의민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랬던 그에게 두경승은 껄끄러운 존재였다. 『고려사』에는 두경승이 공신으로 책봉된 뒤의 잔치에서 이의민이 시비를 걸었다든가, 중서성에서 서로 기둥과 벽을 주먹으로 치며 힘을 겨루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두경승이 이의민보다 높은 자리에 임명되자 이의민이 마구 욕을 퍼부었으나, 두경승은 그저 웃기만 했다는 이야기도 실려 있다.

두경승을 위협하던 이의민은 1196년(명종 26) 4월에 또 다른 무신 최충헌(崔忠獻) 형제에게 기습을 당하여 살해당했다. 이후 두경승은 중서령(中書令)까지 승진하며 평탄한 삶을 보내는 듯 보였으나, 새로운 권력자로 부상한 최충헌 형제의 견제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해 8월, 왕과 태자의 행차가 거리를 지날 때 인원 통제에 문제가 생겨 구경꾼들이 태자 일행과 부딪치는 사고가 있었다. 누군가 왕의 수레에 변고가 생겼다고 외치자 호종하던 관리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때 두경승만은 태연히 왕의 곁을 지켰는데, 사실 당시의 혼란을 야기한 것은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였다고 한다.

왕을 폐위시키고 싶었던 최충헌은 이 사건 이후 본격적으로 두경승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이의민을 제거한 뒤 조정의 권력을 장악해 나가던 최충헌에게 두경승은 방해가 되는 존재였을 것이다. 당시 최충헌은 두경승이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익명서를 받았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었을지, 아니면 최충헌이 두경승을 제거하기 위해 지어낸 말인지는 알 수 없다. 1197년(명종 27) 9월, 최충헌 형제는 명종을 폐위시켰다. 동시에 개경에 병력을 배치하고, 상의할 일이 있다고 두경승을 불렀다. 결국 두경승은 자연도(紫燕島)로 유배되었다. 자연도는 지금의 영종도(永宗島)이다.

자연도에 보내진 두경승은 11월에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울분으로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도 하고, 그가 지닌 금을 노린 노비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우직하게 평생을 살았던 장수에게 어울리는 죽음은 아니었다. 무신정권기였기에 그런 장수가 재상의 지위까지 오를 수 있었겠으나, 결국 그것이 그의 목숨을 앗아가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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