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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적[萬積]

천한 노비라고 하늘에 오르지 못할 것인가

미상 ~ 1198년(신종 1)

1 개요

만적(萬積)은 12세기 후반의 고려 무신 집권기에 살았던 한 노비였다. 그는 개경(開京)의 노비들과 함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쥐려 시도하였던 사람이었다. 태어난 해나 가족 관계 등은 알 수 없다.

2 만적, 개경 한복판에서 난을 꿈꾸다

‘만적의 난’에 대해서는 『고려사(高麗史)』의 최충헌(崔忠獻) 열전 과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에 내용이 실려 있다. 최충헌 열전에 이 난에 대해 기록이 되어 있어 보통 만적이 최충헌의 노비가 아니었을까 추측하곤 한다. 두 기록은 대체로 같은 내용을 담고 있으나, 몇몇 자세한 부분에서는 서로 보완되는 점을 싣고 있기도 하다. 이들을 토대로 ‘만적의 난’에 대하여 살펴보자.

1198년(신종 원년) 5월 사노비였던 만적은 다섯 명의 다른 노비들과 함께 북산(北山)에서 나무를 하다가 반란을 모의하였다. 주동자의 숫자만을 전한 『고려사』와 달리 『고려사절요』에서는 당시 만적과 함께 뜻을 모은 다섯 명의 성명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미조이(味助伊)·연복(延福)·성복(成福)·소삼(小三)·효삼(孝三)이었다. 이들이 모두 한 집안의 노비였는지, 아니면 그저 같은 동네에 사는 노비들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북산에서 뜻을 모은 만적 등 6명은 여러 공노비와 사노비들을 불러 모아 노비 처지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고 신분해방 운동에 함께 할 인원을 결집시켰다. 짧게나마 『고려사절요』에는 당시 이들의 말이 이렇게 실려 있다.

“나라에 경인년(1170)·계사년(1173) 이래로 고위 관료들[朱紫] 중에 천인[賤隷]에서 일어난 이가 많다. 장수와 재상에 어찌 씨[種]가 있겠는가. 때가 오면 또한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만 어찌 채찍[箠楚] 아래에서 몸[筋骨]을 고생시킬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말한 ‘경인년과 계사년 이래’는 무신정변 이후 시기를 뜻한다. 정중부(鄭仲夫) 등이 무신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은 뒤, 이제 세상은 무신들의 것이 되었다. 국왕은 허수아비로 전락했고, 문신들은 목숨을 보전하기에 급급했다. 고려 개국 이래로 200년 이상 체계가 잡혀온 사회가 크게 흔들렸다. 특히 이의민(李義旼)처럼 어머니가 노비였던 무신이 권력을 향해 질주한 끝에 그 정점인 재상의 자리까지 차지했던 시대였다. 신분이 존재했던 시대였지만, 동시에 그 제한이 깨져 나가기도 했던 것을 볼 수 있던 시대였던 것이다.

이 자리에 모였던 여러 노비들은 이 말에 호응했다. 자기들 눈으로이의민 같은 케이스를 보던 사람들이니 말이다. 물론 그 이의민은 2년 전에 최충헌에게 암살을 당했으나, 그런 사람이 이의민 하나만 있으라는 법은 없었다. 1176년(명종 6)에는 공주 일대에서 소(所)의 주민이었던 망이(亡伊)와 망소이(亡所伊)가 난을 일으켜 한반도 남부 일대를 휩쓴 적이 있었다. 1193년(명종 23)에는 경상도 일대에서 김사미(金沙彌)와 효심(孝心)이 주도한 농민 봉기도 크게 일어났었다. 당시는 다양한 신분층에서 기존 질서가 요동치던 난세였다.

만적은 분위기를 타고 거사를 도모하였다. 누런 종이 수천 장을 잘라 ‘정(丁)’자를 표시로 적어 넣고, 거사에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의 표식으로 삼았다. 당시 북산에 수천 명의 노비가 모여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마 주변의 다른 노비들에게 비밀리에 전하고 동지를 모아 오도록 했을 가능성이 높겠다. 만적의 구상은 개경에서 수천 명의 노비를 봉기시켜 크게 판을 뒤집어엎는 것이었다. 이들의 구상은 이러했다. 이 부분은 『고려사』가 좀 더 자세하다.

“우리가 흥국사(興國寺) 회랑에서 구정(毬庭)까지 한꺼번에 집결하여 북을 치고 고함을 치면 궁궐 안의 환관들이 모두 호응할 것이며, 관노(官奴)는 궁궐 안에서 나쁜 놈들을 죽일 것이다. 우리가 성 안에서 벌떼처럼 일어나, 먼저 최충헌을 죽인 뒤 각기 자신의 주인을 죽이고 노비 장부[賤籍]을 불태워 삼한(三韓)에 천인이 없게 한다면, 공경장상(公卿將相)을 우리가 모두 할 수 있을 것이다.”

“삼한에 천인이 없게 한다(使三韓無賤人).”는 대목 때문에 그간 만적의 난은 큰 주목을 받았다. 신분철폐운동의 선구자 격으로 평가받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거의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고려사절요』에는 이 구절이 빠져 있다. 전체적인 내용이 비슷하더라도 이 구절이 있고 없고에 따라 ‘만적의 난’에 대한 이해는 큰 영향을 받게 된다. 두 자료를 함께 꼼꼼히 봐야 하는 이유이다.

3 만적의 꿈, 일장춘몽으로 끝나버리다

마침내 약속했던 갑인일에 노비들이 모여들었다. 만적을 비롯한 봉기의 주도자들도, 북산에 모여 이야기를 들었던 노비들도, 친구에게 이야기를 듣고 따라 나온 노비들도 모두 극도의 긴장과 흥분, 그리고 불안이 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서로를 확인했을 것이다. 이번 거사만 성공하면 그동안 노비로 겪은 설움을 깨끗이 씻어내고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이고, 실패하면 모두 죽은 목숨이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모인 사람이 겨우 수백 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숫자이지만, 수천 명을 예상했던 것을 감안하면 대실패였다. 겨우 수백 명의 노비들이 도성과 궁궐을 지키는 정예 군사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들은 4일 뒤인 무오일에 보제사(普濟寺)에서 다시 모이기로 하였다. 이 일이 혹시라도 누설되지 않도록 입단속도 하였다.

하지만 갑자기 모인 수백 명의 마음이 단단히 뭉쳐 있기란 어려운 법이다. 더구나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다음번에는 겨우 수십 명이 나올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아마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안감이 싹텄을 것이다. 결국 밀고자가 나왔다. 율학박사(律學博士) 한충유(韓忠愈)의 집안 노비인 순정(順貞)이 자기 주인에게 자초지종을 말해버린 것이다. 한충유는 아마도 까무러치게 놀랐을 것이다. 그는 최충헌에게 이 일을 알렸다. 최충헌 역시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았을까. 만적이 그의 집 노비였다면 더욱 더 섬뜩했을 것이다.

결국 만적 등 백여 명이 체포되었다. 최충헌은 이들을 강에 던져 죽여 버리되,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죽일 수 없으니 불문에 부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 이로 보아, 이들 백여 명이 처음 북산에 모여 일을 주도했던 노비들이었을 수도 있다. 밀고자 순정은 백은(白銀) 혹은 백금(白金) 80냥을 상으로 받고 면천되어 양인이 되었다. 순정의 주인 한충유는 각문지후(閣門祗候)를 제수받았다.

만적의 꿈이 정말로 ‘신분철폐’에 있었는지, 아니면 ‘윗놈들’을 모두 죽이고 이의민처럼 고려 최고의 권력자로 한 번 서보는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말에서 보이듯이 아마도 둘 다 섞여 있었을 것인데, 그 중 어느 쪽에 더 비중이 있었을까. 차가운 강물을 따라 그의 꿈도 덧없이 씻겨가 버렸다. 『고려사』에서는 천하에 무도한 말이라 생각하여 만적의 외침을 기록했겠으나, 지금의 우리에게는 시대에 분노하고 저항했던 한 사람의 목소리가 귓가에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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