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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종[穆宗]

비극적 결말에 가려진 12년의 치세

980년(경종 5) ~ 1009년(목종 12)

1 머리말

고려의 제7대 국왕인 목종(穆宗)은 늘 어머니인 천추태후(千秋太后) 황보씨(皇甫氏)의 그림자에 가려진 채 회상된다. ‘어린 국왕, 그리고 모후(母后)의 섭정’이라는 상황만으로도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 쉬운데, 더구나 천추태후가 김치양(金致陽)이라는 인물과 정을 통하고 있었고, 나아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차기 국왕으로 세우려고 하였다는 대목에 이르면, 급변하는 정국 속에서 쿠데타를 겪고 폐위되었다는 그의 말로가 어색하지 않게 느껴질 정도이다.

이렇게 굵직한 사건들의 압도적인 상황과 전개, 그리고 극적인 마무리는 목종과 그가 살았던 시대를 묘사하는 방식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 더구나 사료가 매우 적게 남아 있는 이 시기의 특성상, 다른 측면을 살펴보려 해도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일생, 혹은 한 국왕의 치세 기간을 한 가지로만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료의 부족으로 어느 정도의 한계는 있겠지만, 남은 기록들을 토대로 이 시대의 모습을 살펴보자.

2 세계와 즉위 과정

목종은 고려 제5대 국왕인 경종(景宗)의 맏아들이다. 이름은 왕송(王誦), 자는 효신(孝伸)이었다. 경종에게는 다섯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그 중 훗날 대종(戴宗)으로 추존되는 왕욱(王旭)의 딸인 헌애왕태후(獻哀王太后) 황보씨(皇甫氏)와의 사이에서 목종이 태어났다. 목종이 즉위한 후 어머니를 ‘응천계성정덕왕태후(應天啓聖靜德王太后)’로 올렸는데, 거처가 천추전(千秋殿)이었기에 세상에서는 그녀를 ‘천추태후(千秋太后)’로 불렀다고 한다.

목종은 980년(경종 5) 5월에 태어났다. 갓 태어난 경종의 첫째 아이는 왕실과 나라의 경사로 많은 기쁨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무렵은 왕승(王承)의 반역 시도가 적발되는 등 정국이 어수선한 시기였다. 그런데 목종이 막 돌이 지났던 981년(경종 6) 6월, 아버지 경종은 국왕의 직임을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병이 들고 말았다. 목종은 경종의 유일한 자식이었으나, 갓난아이가 바로 왕위 계승권자가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경종은 처남이자 사촌 동생인 개령군(開寧君) 왕치(王治)에게 선위하니, 그가 바로 제6대 국왕 성종(成宗)이다. 성종은 16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병이 들었고, 아들이 없었던 그는 다시 자신에게 선위하였던 경종의 아들 목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렇게 하여 목종이 997년(성종 16, 목종 즉위) 10월, 그의 나이 18세 때에 제7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당시 기준으로 아주 어린 나이는 아니었지만, 어머니 천추태후가 섭정을 하였다고 한다. 목종은 12년 동안 재위하였다. 그 기간에 일어났던 주요한 일들을 두 가지로 나누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3 관료 조직 정비

우선 관료로 충원될 인재를 양성하고 선발하는 제도인 교육과 과거제에 대해 깊은 관심과 개편을 보였다. 1003년(목종 6) 1월에는 개경(開京)·서경(西京)·동경(東京) 및 10도(道)의 관리들에게 교서를 내려, 부진한 향학열을 부흥시키고 교육 효과가 높았던 박사(博士)와 사장(師長)을 적어 보고하도록 하였다. 또한 이들 지방관에게 관내에서 재주와 학식이 있는 사람들을 천거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어 1004년(목종 7) 3월에는 과거법을 개정하였다. 이전에는 제술업(製述業)의 경우 봄에 시험을 보고 가을에 합격자를 발표하였으나, 이 때 개편하여 3월에 나흘 간 시험장을 폐쇄한 채로 시험을 보고 열흘 뒤에 합격자를 발표하는 것으로 하였다. 또한 명경업(明經業)과 잡업(雜業)은 전년도 11월에 선발을 마쳤다가 제술업 합격자와 함께 발표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목종대에 과거 급제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황주량(黃周亮)과 최충(崔沖)을 들 수 있다.

이미 선발된 관료들에 대한 보수 지급 방식인 전시과(田柴科)도 이 시기에 개편되었다. 998년(목종 1) 12월에는 문무양반은 물론 군인에 대한 지급 체계를 모두 손질하였는데, 이에 앞서 3월에는 이미 퇴직한 안일호장(安逸戶長)에게 직전(職田)의 절반을 지급한다는 규정을 세운 바 있었다. 즉 중앙 관리와 향리, 군인들에 대한 보수 체계에 전반적인 정비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때 개정된 전시과는 보통 경종대의 ‘시정전시과(始定田柴科)’ 및 문종대의 ‘경정전시과(更定田柴科)’와 구별하기 위해 ‘개정전시과(改定田柴科)’라고 불린다. 이 개정에 대해서는 ‘전시과’ 항목에서 상술되겠으나, 대략 관료제도가 이전보다 정비되면서 이에 따라 포함 범위가 넓어지고 체계화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한편 1005년(목종 8) 3월에는 지방관 제도를 개편하여, 12절도(節度)·4도호(都護)와 동계(東界)·서북계(西北界)의 방어진사(防禦鎭使)·현령(縣令)·진장(鎭將)만을 두고, 그 나머지 관찰사(觀察使)·도단련사(都團練使)·단련사(團練使)·자사(刺史)는 모두 폐지하였다. 성종대에 제정되었던 지방제도의 개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 북방 영역 정비

목종대의 특징 중 하나는 서경에 대한 중시이다. 998년(목종 1) 7월에 서경의 명칭을 ‘호경(鎬京)’이라 고쳤으며, 이듬해 10월에 호경에 행차하여 각종 은전을 베풀었다. 고대 중국의 이상적인 국가로 여겨졌던 서주(西周)의 도읍 이름인 호경을 서경의 명칭으로 채택한 것은 서경을 아화(雅化)하여 존숭하기 위한 것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목종은 1004년(목종 7) 11월에도 호경으로 가 제사를 지내고 각종 시혜를 베풀었다. 또 1007년(목종 10) 10월과 1008년(목종 11) 10월에도 같은 조치가 있었다. 물론 이러한 조치는 태조대 이래의 서경 중시책과 맥락이 닿는 것이다. 한편 이를 천추태후 등 황주(黃州)를 본관으로 하는 황보씨 세력의 세력 확장 의도와 연결시켜 설명하기도 한다.

목종대에는 서경뿐만 아니라 다른 북방 지역의 요충지에 대해서도 정비가 진행되었다. 1000년(목종 3)에는 덕주(德州)에, 1001년(목종 4)에는 평로진(平虜鎭)에 성을 쌓았고, 1003년(목종 6)에는 덕주(德州)·가주(嘉州)·위화(威化)·광화(光化) 네 곳의 성을 수리하였으며, 1006년(목종 9)에는 등주(登州)·귀성(龜城)·용진진(龍津鎭)에, 1008년(목종 11)에는 통주(通州)에 성을 쌓았다.

이러한 조치들은 태조 이래로 고려가 지속해 온 북방 영역 통치 강화책을 계승하는 것이다. 또한 앞선 성종대에 거란과 전쟁을 치르면서 느낀 방어선 강화의 필요성과, 여진 부족들에 대한 통제와 대비를 염두에 둔 포석들이었다고도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지속적인 대비가 누적되었기에 훗날 몇 번의 거란 침입들을 모두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5 천추태후와 김치양, 그리고 강조의 정변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 목종 재위 12년간의 주요한 정치활동에 대하여 더욱 자세한 내용을 알기는 어렵다. 대체로 개국 이래의 국가 체제 정비를 계승·발전시키려는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전하는 기록은 이러한 측면보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불륜, 그리고 강조(康兆)의 정변과 현종(顯宗)의 즉위라는 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강조의 정변’ 항목에서 다루어질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간략하게 정리하겠다.

경종이 사망한 뒤, 천추태후는 자신의 외족(外族)인 김치양이라는 사람과 친밀해졌다고 한다. 자신의 누이에 대해 세간에 좋지 않은 소문이 돌자 성종은 김치양을 멀리 유배 보냈다. 하지만 목종이 즉위한 뒤에 천추태후는 김치양을 소환하여 관직을 주었고, 김치양의 권세는 극도로 높아졌다. 더구나 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기에 이르니,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이 아이를 목종의 후계자로 삼으려 계획하였다고 한다.

목종이 갑자기 병이 들면서 사태는 급박하게 진행되었다. 목종은 태조의 손자인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에게 왕위를 전하려 하였다. 천추태후가 대량원군을 크게 견제하고 있었기에, 목종은 그에게 밀지를 전하는 한편 서북면순검사(西北面巡檢使) 강조를 소환하여 우군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강조는 이미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목종을 제거했다는 잘못된 정보를 믿고 쿠데타를 감행하였다. 그는 개경 근처까지 육박한 뒤에 이것이 잘못된 정보였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이미 일을 돌이킬 수 없어 개경을 장악하고 목종과 천추태후를 폐위시킨 뒤 대량원군을 새 국왕으로 옹립하였다. 그가 바로 제8대 국왕인 현종이다. 이 과정에서 김치양과 그의 세력이 숙청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상의 내용은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거의 동일하게 실려 있다. 다만 현종의 후계자 지명과 즉위 과정에 대한 내용이 다소 혼란스러운데, 이는 당시의 정세가 워낙 급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현종의 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후대의 윤색이 가미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목종은 이 사건의 결과 폐위되어 태후와 함께 유배되었고 유배 도중에 강조에 의해 시해되었다.

목종의 마지막 모습에 대하여, 위의 기록에서는 끝까지 태후를 극진하게 모셨다고 남기고 있다. 그리고 강조가 보낸 독약을 마시지 않으려고 버텼으나 결국 시해된 뒤 화장되었다고 한다. 서른 살 한창 나이 때의 비극적인 죽음이었다.

목종대에 관해서는 남아있는 자료도, 인상적인 장면도 대개 그의 죽음에 얽힌 부분에 집중되어 있다. 한 해가 몇 건의 기사만으로 정리되어 있다는 당시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의 자료적 한계 때문에 그의 시대에 대한 폭넓은 검토는 불가능하고, 목종의 개인적 면모는 더욱 살피기 어렵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른 죽음, 사촌인 개령군(성종)에게 전해진 왕위, 그 사촌의 재위 기간에 느꼈을 불안함 혹은 배려, 아마도 뜻밖이었을 자신의 국왕 즉위, 어머니의 새 남자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의 등장 등 그의 30년에 걸친 삶에서 벌어졌던 일을 가만히 떠올려 보면, 그가 느꼈을 삶의 어려움이 천 년의 세월을 넘어 전해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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