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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文益漸]

목화가 가져 온 의생활의 혁명

1329년(충숙왕 16) ~ 1398년(태조 7)

문익점 대표 이미지

문익점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개요

문익점(文益漸)은 1329년(충숙왕 16)에 태어나 1398년(태조 7)에 사망한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관료이다. 그는 중국에서 목화씨를 들여와 국내에서 최초로 재배에 성공한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서는 그의 생애와 행적, 특히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목화씨를 들여와 재배하는 데에 성공하게 된 사정을 추적해보고, 그에 대한 후세의 평가를 살펴보겠다.

2 과거에 급제하기까지

문익점의 과거급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에는 그가 신미년에 출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1331년(충혜왕 원년)이 된다. 그의 증손인 문치창(文致昌)이 지은 『사실본기(事實本記)』 등을 모아 남평 문씨(南平 文氏) 문중에서 1819년(순조 19)에 편찬한 『삼우당실기(三憂堂實記)』에 실린 「가전(家傳)」에서도 이를 따랐다. 그러나 『태조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에는 1398년(태조 7) 당시 그의 나이가 70세였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는 1329년(충숙왕 16)에 태어난 것이 된다.

문익점은 진주목(晋州牧) 강성현(江城縣),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山淸) 단성면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그의 아버지는 숙선(淑宣)인데, 과거에는 합격하였으나 벼슬하지 않았다고 전하며, 할아버지는 윤각(允恪)으로 봉익대부 삼사우사 문한학사(奉翊大夫 三司右使 文翰學士)를, 증조부는 극검(克儉)으로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외조부는 함안(咸安) 조진주(趙珍柱)로 영동정(令同正)을 지냈다고 한다. 남평 문씨는 고려 예종[고려](睿宗)대에서 인종[고려](仁宗)대에 걸쳐 활약한 문공인(文公仁), 무신정권 때의 명신 문극겸(文克謙) 등을 거치면서 세족(世族)의 반열에 올랐다. 『삼우당실기』에는 문익점이 문극겸의 8대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문익점은 가업을 이어 독서를 하였다고 한다. 『삼우당실기』에 수록된 「가전」에 따르면 문익점은 11세인 충숙왕 복위 8년(1339)에 가정(稼亭) 이곡(李穀)에게서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 『가정집(稼亭集)』에 실린 「가정선생연보(稼亭先生年譜)」를 보면 이곡은 대체로 원나라 조정에서 관직생활을 하다가 1339년(충숙왕 후8) 봄에 정순대부·판전교시사·예문관제학·지제교(正順大夫·判典校寺事·藝文館提學·知製敎)에 임명되어 고려 조정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고려에 머물렀던 것은 이후 2년 남짓한 기간에 머물렀으므로, 문익점이 이곡에게서 학문을 배웠다는 기록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문익점은 32세가 되던 해인 1360년(공민왕 9) 문과에서 병과(丙科) 제4인, 즉 33인 중 7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였다. 당시의 과거에서 장원은 정몽주(鄭夢周), 2등은 임박(林樸)이 차지하였다.

3 어지러운 정세와 관직생활

문익점의 관직생활에 대해서 『태조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에는 “공민왕 경자년에 과거에 올라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에 임명되었으며, 계묘년에 순유박사(諄諭博士)에서 좌정언(左正言)에 승진되었다”고 전한다.

문익점이 최초로 수여받은 관직인 사록은 지방관청의 7품직이다. 순유박사는 성균관(成均館)의 교수직으로 관품은 종7품이며, 좌정언은 고려시대 중앙의 최고 관부였던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서 국왕의 명령을 심의하고 왕의 잘잘못을 논하는 낭사(郎舍)의 종6품 간관(諫官)이다. 고려 시대의 과거 급제자는 대개 지방의 관원으로 발령받았다가 중앙 관원으로 임명받곤 하였다.

그런데 그가 관직생활을 시작했던 시기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대였다. 당시 고려는 13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몽골제국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1세기 가깝게 받아오고 있었다. 고려의 국왕은 몽골 황실의 여인과 혼인하여 몽골 황실의 부마(駙馬)가 되었고, 동시에 고려에 설치된 원의 지방행정기구인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의 승상(丞相)을 겸하고 있었다. 이로써 고려는 국가로서 독립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몽골제국의 일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고려의 국왕위가 원 조정의 힘에 의해 좌우되는 등 원의 정치적 영향력이 매우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또한 한 세기 동안 이어진 양국 간의 밀접한 관계에 의해 기황후(奇皇后)나 그의 오빠인 기철(奇轍)과 같이 고려 국내에도 원과 깊은 관련을 가지는 정치세력들이 등장하여 국왕권을 위협하고 있었다.

1351년(충정왕 3)에 조카 충정왕(忠定王)의 뒤를 이어 고려국왕에 등극한 공민왕은 재위 기간 동안 원의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일련의 개혁운동을 펼쳤다. 특히 1356년(공민왕 5)에는 기철 일파 숙청 등으로 대표되는 반원개혁정치(反元改革政治)를 단행하여 원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 강남지역에서 홍건적(紅巾賊)이 발흥하여 화북(華北)과 요동(遼東) 일대를 휩쓸고 1359년(공민왕 8))과 1361년(공민왕 10) 두 차례에 걸쳐 고려에 침입하는 사태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이에 공민왕은 수도 개경을 버리고 안동(安東)으로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홍건적의 침입은 겨우 물리칠 수 있었지만, 이후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조정 내부의 권력 다툼이 벌어져 정세운(鄭世雲)과 안우(安祐), 김득배(金得培), 이방실(李芳實) 등 주요 신료들이 살해당하였고, 공민왕이 개경으로 돌아오던 도중에는 왕의 측근이자 중신이었던 김용(金鏞)이 일으킨 흥왕사(興王寺)의 난(興王寺의 亂)으로 공민왕이 살해당할 뻔 하기도 하였다. 문익점이 과거에 급제한 해는 바로 홍건적의 두 차례 침입 사이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홍건적의 2차 침입을 겨우 몰아낸 직후 공민왕이 안동에서 개경으로 귀환하던 도중, 원나라로부터 뜻밖의 소식이 고려에 전해졌다. 공민왕을 폐위하고 새로운 국왕으로 충선왕(忠宣王)의 서자(庶子)인 덕흥군(德興君)을 옹립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덕흥군(德興君) 옹립사건, 혹은 공민왕 폐위사건이 그것으로, 이는 문익점이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된 상황과 밀접히 연관되므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4 공민왕 폐위사건과 중국 사행

공민왕 폐위사건에 대해서 『고려사』 덕흥군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기철(奇轍)이 처형을 당하자 기황후는 공민왕에게 앙심을 품었다. 마침 고려 사람 최유(崔濡)가 원나라에 있다가 불량한 무리들과 함께 황후를 꼬드겨 공민왕을 모함하여 폐위시키고 타스테무르[塔思帖木兒]를 왕으로, 기삼보노(奇三寶奴)를 원자(元子)로 옹립하려고 모의하고, 원나라에 있는 모든 고려 사람들에게 거짓 관직을 주었다. 또 요양성(遼陽省) 군사 1만을 징발할 것을 청하여 압록강을 건너 수주(隨州)의 달천(㺚川)에 이르렀다가 아군에게 패하였다.”

또한 이 사건을 주동한 인물로 지목된 최유(崔濡)의 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최유는) 황후가 왕에게 원한을 품은 것을 알고, 또한 김용(金鏞)이 안우(安祐) 등 여러 장수들을 살해하고서는 내응할 것으로 믿었다. 마침내 불량한 무리들과 함께 기황후를 설득해 왕을 폐위시키고 덕흥군(德興君)을 세우려고 음모를 꾸미고는 거짓으로 상주하기를, 홍건적의 난 때 고려가 국인(國印)을 잃어버리고는 새 인장을 멋대로 만들어 쓰고 있다고 하였다. 원나라에서는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고 기삼보노(奇三寶奴)를 그 원자로 삼았으며, 김용은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삼았고, 최유는 스스로 좌정승(左政丞)이 되었다. 원나라 수도에 있는 고려 사람들은 모두 가짜 관직을 받았다. 또한 요양성(遼陽省)의 군대를 고려로 출동시키도록 요청했다.”

덕흥군과 최유의 군대가 고려를 압록강을 건너 침입한 것은 1364년(공민왕 13) 정월 초하루의 일이었다.

그러나 공민왕 폐위의 소식이 고려에 전해진 것은 그보다 훨씬 앞선 1362년(공민왕 11) 12월의 일이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공민왕 폐위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적극적인 외교를 펼쳤다. 1363년(공민왕 12) 3월에는 기황후의 외종사촌이었던 이공수(李公遂)와 허강(許綱)을 파견하여 진정표(陳情表)를 올리게 하였다.

또한 4월에는 홍순(洪淳)과 이수림(李壽林)을 파견하여 고려의 백관기로(百官耆老)가 원의 중서성과 추밀원, 어사대에 보내는 서한을 전달하게 하였다.

『태조실록』에 실린 문익점의 졸기에 따르면 이 무렵 문익점은 좌정언(左正言)으로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계품사 이공수를 수행하여 원에 파견되었다고 한다. 서장관이란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직책으로, 외교사절단 내에서는 정사(正使), 부사(副使)에 이은 세 번째 직위였다. 그런데 『고려사』에 실린 임박의 열전에 따르면, 임박 역시 이공수의 서장관으로 수행하였다고 하여 『태조실록』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문익점이 중국에 파견되었던 시점으로 보아 그의 임무가 공민왕 폐위사건과 관련이 된 것임은 분명하다.

당시 원 조정에서는 고려에서 여러 차례 파견한 사신들을 억류하고서는 덕흥군 편에 설 것을 회유하였다. 이 가운데 이공수는 고려를 떠나면서 “우리 임금이 복위되지 않으면 저는 죽어도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라고 했던 다짐처럼 기황후와 황태자의 집요한 설득을 뿌리치고 공민왕을 지원하였다. 반면에 유인우(柳仁雨)와 강지연(姜之衍), 안복종(安福從) 등은 덕흥군 편에 서서 고려를 침입하는 데 가담하기도 하였다. 이때 원 조정에서는 고려의 사신들에게 높은 관직을 내려주며 회유하였는데, 문익점도 이때 덕흥군 측으로부터 관직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고려 침공군과 행동을 같이 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덕흥군 측에 적극 동조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 폐립사건은 고려에서 덕흥군의 침공군을 무력으로 물리침으로써 막을 내리게 되었고, 원은 공민왕의 복위조서를 보내며 이를 공식화하였다. 이로써 이공수를 비롯한 고려 사신들도 귀환하게 되었고, 문익점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5 목면의 전래와 보급

그런데 『삼우당실기』에는 문익점이 원에 머물던 시절에 대해 다른 기록을 전한다. 문익점이 덕흥군 편에 가담하기를 거부하다가 교지(交趾), 즉 지금의 운남(雲南) 일대로 귀양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중국 강남(江南) 지역에서 목화씨를 얻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후대에 미화된 것으로 보인다.

첫째, 문익점이 덕흥군 정권이 내려준 관직을 받아들였다고 한 데에서 보이듯이, 최소한 덕흥군 편에 가담하기를 거부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점은 그가 귀국 후에도 문제가 되어 공민왕대에는 더 이상 관직생활을 이어가지 못했던 데에서도 알 수 있다. 둘째, 당시 중국의 강남 일대는 장사성(張士誠), 진우량(陳友諒) 등 한족 군웅들이 점거하고 있었으므로 운남까지 여행하기란 쉽지 않았으리라는 점이다. 셋째, 그 무렵 목면이 중국의 강남지역에서 주로 재배되었던 것은 사실이나 화북 지역에서도 목면의 종자를 구할 가능성은 충분했다는 점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문익점이 목화씨를 붓뚜껍 속에 넣어 숨겨가지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근거는 뚜렷하지 않다. 『태조실록』의 기록에는 그가 목화씨를 “주머니에 넣어서” 가지고 왔다고 한다. 목화씨 도입에 얽힌 이 일화 역시 후대에 첨가된 내용인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했듯이 문익점은 귀국 후 원나라에서 덕흥군 편에 선 전력이 문제가 되어 중앙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364년(공민왕 13) 그는 고향인 진주로 내려가 목면 재배를 시도해보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태조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갑진년에 진주(晉州)에 도착하여 그 씨 반을 그 고을 사람으로서 전객령(典客令)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정천익(鄭天益)에게 이를 심어 기르게 하였더니 다만 한 개만이 살게 되었다. 정천익이 가을이 되어 씨를 따니 백여 개나 되었다. 해마다 더 심어서 정미년(1368년) 봄에 이르러서는 그 종자를 나누어 마을에 주면서 권장하여 심어 기르게 하였는데, 문익점 자신이 심은 것은 모두 꽃이 피지 않았다. 중국[胡]의 중 홍원(弘願)이 정천익의 집에 이르러 목면을 보고는 너무 기뻐 울면서 말하기를, ‘오늘날 다시 본토(本土)의 물건을 볼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정천익은 그를 머물게 하여 며칠 동안을 대접한 후에 이내 실 뽑고 베 짜는 기술을 물으니, 홍원이 그 상세한 것을 자세히 말하여 주고 또 기구까지 만들어 주었다. 정천익이 그 집 여종에게 가르쳐서 베를 짜서 1필을 만드니, 이웃 마을에서 전하여 서로 배워 알아서 한 고을에 보급되고, 10년이 되지 않아서 또 한 나라에 보급되었다.”

여기서 목화 재배에 큰 공을 세운 것으로 등장하는 정천익은 문익점의 두 번째 부인의 아버지, 즉 문익점의 장인이었다.

그때까지 우리나라 의류 원료는 삼베, 모시, 명주가 대부분이었고, 값비싼 비단은 소수 상류층들만이 입을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문익점에 의해 처음 재배에 성공한 목화는 매우 빠른 속도로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기존 원료에 비해 생산이 쉽고 보온성이 뛰어난 솜과 무명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자 일반민들의 의생활이 크게 개선되었던 것이다. 문익점이 죽은 얼마 후 권근은 목면이 널리 보급된 상황을 가리켜 “온 나라에 널리 퍼지게 되어, 모든 백성들이 상하(上下)가 모두 이를 입게 되었다” 라고 할 정도였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문익점은 1375년(우왕 원년)에 전의주부(典儀主簿)로 임명되어 중앙정계에 복귀하였다. 이후 관직이 계속 올라 창왕 때에는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준(趙浚) 등이 추진했던 사전개혁(私田改革)에 반대한 까닭에 탄핵을 받아 파면당하였고, 조선 개국 이후로도 등용되지 못하였다. 문익점은 1398년(태조 7) 6월에 70세를 일기로 고향인 강성현에서 눈을 감았다.

6 목화씨는 문익점 - 후세의 평가

문익점은 왕조교체기의 격동 속에서 정치적으로는 중앙에서 물러나게 되었지만, 사후에는 대단한 영예를 얻게 되었다. 또한 그에 대한 평가는 시대가 흘러갈수록 더욱 높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우선 국가에 의한 포상을 살펴보면, 그가 돌아간 직후 조정에서는 그에게 참지의정부사·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參知議政府事·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를 증직하고 강성군(江城君)에 봉하였다. 또한 4년 후인 1401년(태종 원년)에는 그의 아들 문중용(文中庸)을 사헌감찰(司憲監察)로 임명하였다. 또한 1456년(세조 2년)에 이르러서는 양성지(梁誠之)의 건의에 따라 문익점의 사우(祠宇)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세월이 흘러 정조 때에는 문익점을 배향한 도천서원(道川書院)에 사액(賜額)하고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문익점과 관련된 서원으로는 도천서원 외에도 전라남도 장흥의 강성서원(江城書院)이 있다. 이곳은 원래 문익점의 9세손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의병 활동을 하여 명망이 높았던 문위세(文緯世, 1534~1600)를 제향하기 위해 1644년(인조 22)에 세운 사우였다. 그런데 1732년(영조 9)에 이르러 문익점이 추가로 제향되었고, 1785년(정조 9)에 사액서원으로 지정되었다. 나아가 고종 때에는 문익점을 문묘에 배향하자는 논의가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유생(儒生) 홍재성(洪在誠) 등이 상소를 올려 이색(李穡)과 더불어 문익점을 문묘에 합사할 것을 청했던 것이다.

비록 국왕의 보류로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문익점이 고려 말 유학의 대가였던 이색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크게 현창되었음을 보여준다.

문익점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매우 높았다. 대표적으로 퇴계 이황(李滉)이 남긴 평가를 인용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것(목면)이 나라 안에 널리, 가득히 퍼져 유행하게 된 것은 진실로 그 공이 오곡육재(五穀六財)와 같다. 비단 삼한의 억만 창생이 파리해지고 어는 것을 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국의 의관문물을 밝게 일신시킬 수 있었다. 그러한 즉 우리 조정에서 추가로 특전을 내린 것은 과한 은전이 아니라 마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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