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고려
  • 민지

민지[閔漬]

재상지종 출신의 빼어난 문신, 고려의 역사를 다시 쓰다

1248년(고종 35) ~ 1326년(충숙왕 13)

민지 대표 이미지

고려사 열전 제신 민지전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민지(閔漬)는 1248년(고종 35) ~ 1326년(충숙왕 13)에 살다간 고려후기 문인이자 관료로,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원종(元宗), 충렬왕(忠烈王), 충선왕(忠宣王), 충숙왕(忠肅王)대에 모두 관직을 역임하였다. 몽골과의 관계에 있어 외교문서를 전담하는 역할을 하고 빼어난 학문과 글솜씨로 고려의 역사를 정리한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 7권과 『본국편년강목(本國編年綱目)』 42권을 찬술하였다.

2 재상지종(宰相之宗)에서의 출생과 과거 급제

민지의 일대기는 『고려사』 열전(列傳) 과 묘지명(墓誌銘) 및 『고려사』 세가와 『고려사절요』의 여러 기사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몽골 침략의 끝자락인 1248년 최씨 무인정권 말에 출생하여 14세기 전반 원간섭기까지 79세의 짧지 않은 세월을 살다간 인물이다.

그 집안은 여흥(驪興), 즉 현재의 여주(驪州)를 본관으로 하여 고려에서 일찍부터 관인을 배출하였는데, 선대부터 과거 급제를 통해 출사하고 문신(文臣) 관료를 역임한 경우가 많아 문신 문벌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민지의 고조부인 민영모(閔令謨)는 1138년(인종 16) 예부시(禮部試)에 급제하고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 태자태사(門下侍郞平章事 判吏部事 太子太師)를 역임하였다. 『고려사』 열전의 민지전(傳)이나 민지 묘지명에서 조상 가운데 민영모부터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아 그 이래로부터 본격적인 관계로의 진출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민영모의 큰아들인 민식(閔湜)은 국자감시(國子監試) 장원 출신으로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올랐고 둘째 아들인 민공규(閔公珪)도 과거를 통해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이규보가 민식에게 보냈다고 알려진 시에서 민식에 대해 ‘대대로 벌열(閥閱)의 집안으로 내려오네’ 라고 하여 민씨가 고려에서 현달한 집안임을 드러내고 있다. 민공규의 다섯 아들도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고 민식의 장손인 민부(閔敷)도 과거에 장원을 하는 등 이후에도 다수의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여 지속적으로 문신 고위 관료를 역임하였다.

뿐만 아니라 여흥 민씨는 유력가와의 혼인을 통해 가세를 확장시켜 나갔다. 민식의 경우 사위로 경주 김씨인 김태서(金台瑞)를 맞았는데 그 아들 김약선(金若先), 김기손(金起孫), 김경손(金慶孫)이 모두 재상의 지위에 오르고 이 중 김약선은 무신집정자 최이(崔怡)의 사위가 되었으며 김약선의 딸은 원종(元宗)의 왕비가 되어 충렬왕을 낳았다. 민공규도 철원 최씨인 최종재(崔宗梓)와 정안 임씨인 임경숙(任景肅)을 사위로 맞았는데 모두 재추(宰樞)의 지위에 올랐다. 이들 여흥 민씨를 비롯하여 경주 김씨, 철원 최씨, 정안 임씨 등의 가문은 모두 충선왕의 복위(復位) 교서에서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재상지종(宰相之宗)’으로 꼽히는 명문이었다.

민지가 출생하여 활동하던 시기는 위와 같이 고려에서 여흥 민씨의 가격(家格)이 가장 성했을 때였다. 그러나 동시에, 무인정권 말기이자 고려가 대몽항쟁(對蒙抗爭)의 전란 속에서 여러 자원이 넉넉지 못하던 시기부터 고려에 대한 몽골의 정치적 간섭과 압제가 본격화한 시기에 걸쳐져 있기도 하다. 민지는 피란지이자 임시수도 강화도의 강도(江都)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어려서부터 워낙 총명하여 여덟 살에 이미 글을 지을 줄 알아 주변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나, 옷을 걸치기 어려울 정도로 몸이 허약하고 병치레가 많아 과연 장성하여 수명을 다할 수 있을지 주변인의 걱정을 샀다고 한다. 그가 열한 살 되던 해에는 최씨정권이 붕괴되고 몽골과의 전쟁이 중단되는 등 시대적 변화를 불러올 큰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였는데, 이런 와중에 열일곱 살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열아홉 살에 장원급제하였다. 그가 과거의 을과 1등으로 뽑혀 출사한 당시는 1266년(원종 7)으로 무신집정자 김준(金俊)이 최고 실권자로 군림하던 때이다.

3 몽골 압제 속 문한관으로의 활약

민지가 관로에 오른 후 고려와 몽골의 외교관계가 본격화되면서 그의 이력은 문한관(文翰官)으로서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 것으로 큰 두각을 나타내었다. 과거 급제 후 남경서기(南京書記)를 역임하다 통문원녹사(通文院錄事)에 임명되어 스물 둘의 젊은 관료였던 그는 1269년(원종 10) 원종의 몽골행에 함께 하게 된다. 민지가 원종의 입조(入朝)에 수행한 것은 학식이 있는 문한관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하고, 통문원(通文院)을 통역 담당 관청인 통문관(通文館)의 전신으로 보아 통역의 임무를 띠고 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의 첫 몽골행이었던 이 외교행은 고려에 실로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데, 원종의 귀국 후 강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고 무신정권은 붕괴하며 삼별초(三別抄)의 항쟁이 시작되는 등 정세가 급박하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몇 년 후 원종의 큰아들이었던 세자 왕심(王諶, 훗날의 충렬왕)이 몽골 세조 쿠빌라이의 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혼인하고 고려왕으로 즉위하게 되면서, 고려는 이른바 몽골의 부마국(駙馬國)이 되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고려사의 일대 전환기였던 이때, 문신 민지의 나이 스물 일곱이었다.

이후의 관력은 대체로 순탄한 편으로 『고려사』 세가와 열전에 그가 역임한 적지 않은 관직명이 수록되어 있다. 1280년(충렬왕 6)에는 전중시사(殿中寺史)로 전보(轉補)되었고 1288년(충렬왕 14)에는 전리정랑(典理正郎)이 되었다. 마흔 셋이 되던 1290년(충렬왕 16)에는 예빈윤(禮賓尹)으로 당시 세자(훗날의 충선왕)의 사부가 되어 다시 몽골에 가게 되었다. 이때 쿠빌라이가 신하들에게 교지(交趾, 현재 베트남 북부 통킨, 하노이 지역)의 정벌을 의논토록 하자, 그는 교지는 먼 곳에 있으므로 먼저 군사를 보낼 것이 아니라 우선 사신을 파견하여 불러오게 하되 만약 복종하지 않으면 죄를 성토하여 정벌(征伐)하는 것이 안전한 계책이라는 의견을 내었다. 이 대답이 쿠빌라이의 의중을 만족시켜 몽골로부터 한림직학사 조열대부(翰林直學士 朝列大夫)를 제수받았다.

또한 그는 몽골의 일본 침략을 저지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몽골은 일본을 침략하기 위해 고려로 하여금 그 전쟁 준비를 전담토록 하였는데, 이러한 시도는 고려에게 실로 막대한 부담을 주는 것이었다. 이미 두 차례 실패한 전쟁을 몽골이 다시 추진하고자 거듭 전함을 건조하게 하자 이 문제로 일본 정벌의 불편함을 주장하기 위해 1293년(충렬왕 19) 충렬왕은 몽골로 향하게 되며 이때도 민지가 좌부승지(左副承旨)로서 호종하게 된다. 그는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을 인용하여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려 하자 위징(魏徵)이 이를 말렸다는 사실을 빗대어 일본 침략도 마찬가지 결과임을 주장하여 고려의 전함 건조를 중지시키도록 역할을 하였다.

또한 그는 충선왕이 토번(吐番), 즉 티베트로 유배 갔을 때 그 귀환을 요구하는 도당의 요청서를 들고 일흔 여섯의 노구를 이끌고 두 차례나 몽골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충선왕은 몽골 무종(武宗)의 옹립에 큰 공을 세워 심왕위를 받고 재상의 물망에 오를 정도로 몽골 조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몽골 영종(英宗)의 즉위 이후 참소를 당해 토번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고려의 내정은 몽골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요동을 치는 경우가 잦았는데, 충선왕의 토번 유배 역시 그러한 사례이며 이 사건은 고려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이후 충숙왕까지 몽골에 억류되고 입성책동(立省策動)이 발생하는 등, 국왕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고려 조정은 일대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이 때문에 충선왕의 귀환은 고려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 사안이었고, 결과적으로 실패하기는 하였으나 민지를 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고려와 몽골 사이의 외교에 있어 위와 같은 민지의 활약들은 이제현(李齊賢)이 찬술한 그의 묘지명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되고 있다.

일이 있으면 몽골 조정에 알리는 것을 담당하였는데, 말로 다하기 어려운 것은 모두 공이 글로 적어서 평탄하면서도 쉽게 밝혔다. 풍속이나 양인과 노비에 대한 제도를 급하게 고치는 일 같은 것도 우리 나라의 오래된 습속대로 유지할 것을 청하니, 몽골 조정에서 모두 그 의견을 따른 것도 한두 번으로 헤아리기 어렵다.

4 학자적 관료이자 역사가로서의 족적

민지는 전통시대에 일반적으로 보이는 학자적 정치인으로, 뛰어난 글솜씨와 학문으로 시문(詩文)의 창작과 역사서의 편찬, 외교문서 작성에까지 두루 역할을 하였던 문신 관료였다. 이에 대해 이제현은 다음과 같이 찬하고 있다.

나라가 천자의 신하가 되는 데에는 예(禮)로써 하고, 빈객을 사귀는 데에는 문(文)으로써 하니, 반드시 나이든 학자를 택하여 사명(詞命)을 가다듬게 한다. 고종(高宗) 때에는 이문순공[李文順公, 이규보(李奎報)]과 같은 사람이 있었고, 원종 때에는 김문정공[金文貞公, 김구(金坵)]과 같은 사람이 있었으며, 충렬왕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곧 돌아가신 재상 여흥부원군 민공(驪興府院君 閔公, 민지)이 실로 그 임무를 담당하였다.

이제현은 민지를 고려후기 대표적 문인 관료로서 이규보와 김구에 비견되는 외교문서 작성의 책임자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는 또한 이규보나 김구에 비견되는 뛰어난 문장가임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민지는 말년에 원로 관료로서 국가의 정통성을 유지하고 사서 편찬에 힘쓰는 모습을 보였다. 무인정권기에 위축되었던 역사서의 편찬은 충렬왕부터 충선왕대에 이르러 다시 활발해 진다. 『고종실록(高宗實錄)』, 『충경왕(忠敬王, 원종)실록』, 『삼국유사(三國遺事)』, 『제왕운기(帝王韻紀)』 , 『고금록(古今錄)』,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 등이 이 시기에 찬술되었으며, 여기에 민지의 『세대편년절요』와 『본조편년강목』을 더할 수 있다. 민지가 편찬한 두 종의 역사서는 아쉽게 현전하지 않는다.

『세대편년절요』는 충렬왕의 명을 받아, 정가신(鄭可臣)이 찬술한 『천추금경록』을 개찬한 책이다. 이 책은 호경대왕(虎景大王, 왕건의 6대조)으로부터 원종까지 7권으로 편찬하고 세계도(世係圖)를 덧붙인 것이었다. 『천추금경록』이나 『세대편년절요』 모두 책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과 성격의 사서인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정가신이 찬술한 『천추금경록』은 유교적 덕치(德治)를 이상으로 삼고 국왕의 수덕(修德)을 강조하여 왕권 전제화를 견제하는 입장으로 그 서술 방향이 충렬왕에게 흡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지에게 왕권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국왕 중심의 사서로 개찬하라고 명했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제출되어 있다. 몽골의 정치 동향에 따라 고려의 내정이 휩쓸리고 왕위의 중조(重祚)라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기 시작한 충렬왕대에 국왕의 권위를 강조한 사서의 필요성이 있었음은 대체로 동의되고 있다.

『본조편년강목』은 충숙왕 원년 정월에, 당시 상왕이었던 충선왕이 민지와 권부(權溥)에게 태조 이래의 실록을 요약 편찬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에 따라 1316년(충숙왕 4)에 찬진(撰進)된 사서가 『본조편년강목』 42권으로 국조(國祖) 원덕대왕(元德大王)부터 고종에 이르기까지를 다루었다고 한다. 여기서 원덕대왕은 고려 태조 왕건의 증조부 보육(寶育)을 추존한 것이다. 충선왕이 이 같은 사서의 편찬을 명한 까닭은 왕건 이래 유구한 역사를 지닌 고려 왕조의 전장문물(典章文物)과 가언선행(嘉言善行)을 보여 풍부하고 체계적인 자국사를 찬술하는 동시에 왕실의 존귀함과 신성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충선왕은 원에 들어갔을 때 고려 왕실의 선계(先系)와 관련한 물음에 대답을 하지 못하여 원의 한림학사(翰林學士)로부터 창피를 당할 뻔 한 적이 있는데 이때 민지가 대신 응대하여 위기를 벗어난 적이 있었다. 고려 왕실은 혈통의 존귀함을 강조하기 위해 당 숙종(肅宗)과 연결되어 있음을 내세워 왔는데, 원 학사가 그 신빙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이에 민지가 ‘숙종’은 기록의 잘못으로, 숙종이 아니라 ‘선종(宣宗)’의 후계라고 정정하여 대답하였다. 이는 『본조편년강목』에 반영되어 서술되었으며, 민지의 서술은 『고려사』 찬술에도 참고 되었다. 이 사서는 고려 역대의 왕도(王道)와 패도(覇道), 다스려짐과 어지러움, 세대의 길고 짧음, 도읍을 정하고 연호를 세움, 합침과 분열 등을 빠짐없이 기록하여 하나의 그림으로 만들어 붙였는데, 그 내용에 고려 왕실의 선대가 당 선종과 연결된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으며 충선왕이 이를 보물처럼 귀중히 여기고 큰 상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또한 민지의 이 사서는 당시로서는 최신의 역사 서술 방식이었던 강목체(綱目體)를 우리나라 역사서 최초로 채택하였다. 이 책은 실록에 기초한 방대한 분량과 왕실 선계와 관련한 새로운 논리의 보강, 최신의 역사서술 방식인 강목체의 채용 등으로 찬술 이후 고려에서뿐 아니라 조선 전기에 편찬되는 사서류에서도 인용되고 있어, 고려후기 찬술된 역사서들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민지의 문장과 사서 편찬에 대해 고려말 명유(名儒) 이색(李穡)은, 민지 문집인 『묵헌집(默軒集)』의 서문을 찬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리고 있다.

순수하기로 말하면 마치 가공되지 않은 광석에서 뽑아낸 금이나 옥과 같고, 뛰어남으로 말하면 구름과 물 속에서 노니는 새와 물고기와 같다. 특히 몽골 조정에 진언하여 표문과 장주로 지어놓은 것이라든가, 국사(國史)를 윤색하여 강령과 조목을 나눈 것은 실로 일세(一世)의 독보적인 일임을 확신할 수 있다. 나는 나중에 태어났지만 선생의 자손들에게 그 문장과 도덕의 남은 실마리나마 얻어들은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5 79세의 죽음과 엇갈린 평가

민지는 재장지종으로 꼽히는 세족(勢族) 여흥 민씨가에서 태어나 과거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충선왕과 충숙왕 대에 기복이 있기는 하나 대체로 순탄한 관직 생활을 역임하였고, 늙어서도 외교통의 원로 관료로서 위기 상황마다 역량을 발휘하여 그 역할을 다 하였다. 또한 당대의 이름난 학자이자 문장가로서 충렬왕의 요청으로 『세대편년절요』를 개찬하였으며, 노년에는 충선왕의 명에 따라 『본조편년강목』을 찬술하여 국가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1326년(충숙왕 13) 12월 2일에 일흔 아홉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는데, 이해 8월에 찬술한 「불조전심서천종파지요서(佛祖傳心西天宗派指要序)」가 남아있어 죽기 직전까지도 저작 활동을 지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민지에 대해 『고려사』의 평은 의외로 혹독하다. 『고려사』 열전 제신(諸臣)에 수록된 민지전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 소목(昭穆)에 대한 논의는 『편년절요(編年節要)』와 같지 않았다. 민지는 글재주는 조금 있었으나 세속의 풍습을 따른 것이 많았고, 심술(心術)이 바르지 못하여 내인(內人)들에게 아첨하기를 일삼았다. 또 성리학을 알지 못하여 그가 논하는 것은 성인(聖人)에 위배되는 것이 있었으며, 주자(朱子)의 소목에 대한 논의가 그르다고까지 하였으니 소견이 편협한 것이 이와 같았다.

사실 위와 같은 평은 민지의 성품에 대해서도 심한 서술을 하고 있으나 실상은 그가 불교에 심취하여 있는 데다 성리학을 잘 모르고 주자의 학설을 그르다고 한 점이 핵심적 비판 대상이었다. 특히 소목론(昭穆論)에 대한 평가는 고려말 이제현이 자신의 문집 『역옹패설(櫟翁稗說)』에서 민지가 소목에 대해 모순적으로 이해한 부분을 지적하고 있는 데에서 시작하고 있다. 소목이란 조상의 사당에 신주를 모시는 순서를 말하는데, 주자가 소목의 위치는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한 데 반해 민지는 『본조편년강목』에서 형편에 따라 바꿀 수 있다고 서술한 것이다.

이러한 견해의 차이는 이제현과 민지의 세대 차이에서 기인한다. 이제현은 민지의 노년에 출사한 신진세력으로 성리학을 추종하였는데, 민지는 성리학이 수용되던 초기에 말년을 보내어 그 영향을 깊이 받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이제현과 같은 비판은 조선 건국 후에 더욱 증폭되어 조선 초 정치세력이 『고려사』를 새로 쓰면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얕은 민지에 대해 비난에 가까운 혹평을 남긴 것으로 보고 있다.

위와 같은 『고려사』의 악평 때문에 그에 대한 학계의 주목도가 낮은 편이었으나, 그는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사상의 유입 이전 고려의 전통적 지식인의 전형으로 재평가할 여지가 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