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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朴犀]

몽골군마저 감탄시킨 치열한 방어전의 지휘관

미상

박서 대표 이미지

용강서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박서(朴犀)는 고려 후기에 몽골이 고려를 침입했을 때 맞서 싸워 큰 공을 세웠던 관리였다. 생몰연대는 확인할 수 없다. 1231년(고종 18)에 살례탑(撒禮塔)이 이끄는 몽골군이 고려를 침공하여 시작된 전쟁을 보통 ‘몽골의 1차 침입’이라 부른다. 박서는 이때 귀주(龜州)를 결사적으로 방어하여 끝까지 함락되지 않고 버텨내었다. 이 방어전은 한국사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전투이다. 그러나 여기서 승리를 거둔 박서는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이 전투를 중심으로 박서와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서 살펴보자.

2 무신정권기에 겪은 가문의 고난, 그리고 몽골의 대두

『고려사(高麗史)』에 실린 박서 열전에는 선대에 대한 다른 정보 없이 그가 죽주(竹州) 사람이라고만 적혀 있을 뿐이다. 그런데 금석문 자료 중에 그의 아버지로 판단되는 박인석(朴仁碩)의 묘지명이 전해진다. 이를 보면 그의 선대에 대하여 정보를 좀 더 알 수 있다. 이 집안은 멀리 삼한공신(三韓功臣)이었던 박기오(朴奇悟)의 후손이라 하였다. 박인석의 증조부, 조부, 아버지도 모두 조정의 고위 관리였으며, 그 덕에 박인석도 어릴 때 춘방학우(春坊學友)가 되어 태자와 함께 공부하는 영예를 받을 수 있었다. 좀 더 자라서는 음서로 관직에 나아가 지방관으로 치적을 쌓는가 하면, 금에서 온 외교 사절단을 맞이하면서 일을 잘 처리하는 등 착실하게 관리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이때는 바로 무신정변(武臣政變)이 터지고 무신집권기가 막 시작되던 시기였다. 상대적으로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던 무신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권력의 정점에 올라섰다. 고려의 정치계에서는 피바람이 불었다. 수많은 문신들이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고, 무신정권에 무력을 동원하며 반발했던 ‘조위총(趙位寵)의 난’과 ‘김보당(金甫當)의 난’ 등이 연이어 터졌다. 그리고 그 난들이 실패하면서, 또다시 많은 문신들이 숙청되었다. 묘지명에 따르면 박인석도 이때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했다가 모종의 죄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게 되었다고 한다.

박인석은 무려 24년이 지나서야 재상의 천거를 받아 다시 관직에 돌아올 수 있었다. 1196년(명종 26)의 일이었다. 그 뒤로 동래현령(東萊縣令)과 감찰어사(監察御史),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 등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지방에서 터진 난을 진압하는 데에도 공을 세웠고 금에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오랜 고생 끝에 다시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관직 생활을 꽃피웠던 것이다.

박서는 박인석의 7남 3녀 중 막내였다. 그가 태어나 자란 시점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202년(신종 5)에 박인석이 난 진압에 공을 세우자 이를 포상하기 위해 아들 박서를 내시(內侍)로 들이게 했다는 기록을 보면, 박서가 아직 어렸을 때 박인석이 관리로 복귀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고려 시대의 내시란 환관이 아니라 국왕을 측근에서 보좌했던 엘리트들이었다. 1212년(강종 1)에 박인석이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사망할 때 박서는 봉선고판관(奉先庫判官)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몽골의 칭기즈칸이 본격적으로 서하(西夏)와 금 등 주변을 공략해 들어가던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 여파는 곧 고려로 밀어 닥쳤다. 이미 1211년(희종 7)에 금에 파견되었던 고려 사신단이 몽골군의 습격을 받고 몰살당한 사건이 벌어졌었다. 비극적인 사건이지만, 이것은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고려가 몽골의 군대를 본격적으로 처음 만난 것은 1218년(고종 5)의 ‘강동성(江東城) 전투’ 때였다. 이때 양국은 힘을 합쳐 거란족을 섬멸하고 형제 관계를 맺는 우호적인 만남을 가졌다. 그러나 서로 간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갈등은 점점 높아졌고, 결국 1231년(고종 18) 8월에 몽골은 고려를 침공했다. 30년 가까이 이어질 긴 전쟁, ‘몽골의 고려 침입’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 첫 번째 침공, 이른바 몽골의 1차 침입에서 박서가 불후의 공을 세우게 된다.

3 몽골의 1차 침입, 그리고 처절했던 귀주성 방어전

살례탑이 이끄는 몽골군은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했다. 살례탑이 고려의 최전방 요새인 함신진(咸新鎭)을 포위하고 위협하자, 이곳을 지키던 장수들은 그대로 항복해 버렸다. 그중 한 명은 당시 고려의 재상이었던 조충(趙冲)의 아들 조숙창(趙叔昌)이었다. 조숙창은 몽골군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강동성 전투 때에 몽골의 원수와 형제를 맺었음을 알리고, 적극적으로 몽골군을 인도하여 고려 요새들에 항복을 권유하였다. 전방의 고려군이 모두 이랬던 것은 아니다. 가령 철주(鐵州)는 회유를 거부하고 결사적으로 저항하였다. 그러나 식량이 다하고 결국 몽골군에게 함락당하고 말았다. 고려 조정은 아직 조직적인 대응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몽골군의 한 갈래는 고려 서북방의 최대 요충지 중 한 곳인 귀주(龜州)를 향해 달렸다. 귀주. 11세기 초 고려가 거란군과 결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던 귀주대첩(龜州大捷)이 벌어졌던, 바로 그 지역이었다.

당시 박서는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귀주에 있었다. 몽골의 침입을 막아내야 할 서북면의 총 책임자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었던 것이다. 몽골군의 기세에 밀린 인근 지역의 고려군도 귀주로 집결했다. 삭주분도장군(朔州分道將軍) 김중온(金仲溫)은 성을 포기하고 도망쳐왔고, 정주(靜州)를 지키던 김경손(金慶孫)도 맞서 싸우다 패하고 죽을듯한 고생을 하며 귀주에 도착했다. 박서는 집결한 고려군을 지휘하여 귀주성 방어에 나섰다. 9월 초, 귀주성을 두고 양군은 드디어 대치 상황을 맞이했다.

몽골군의 모습에 고려군 병사들은 공포에 질렸던 듯하다. 몽골군이 남문으로 돌격해 오자, 이곳을 지키던 김경손은 자신이 정주에서부터 데리고 온 12인의 결사대와 각지에서 모은 별초(別抄)를 지휘하여 성을 나섰다. 그러나 별초들은 땅에 엎드린 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돌진해 오는 적과 전의를 상실한 병사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이 순간을 타개한 것은 김경손의 용맹함이었다. 그는 별초들을 성으로 돌려보내고 전투에 돌입했다. 화살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전투를 독려하는 그의 모습에 병사들이 분발하여 싸웠고, 몽골군이 잠시 물러나자 무사히 성으로 철수하였다. 박서는 김경손을 눈물로 맞이했다. 그의 분투가 아니었으면 그대로 성이 함락될 수도 있었으리라. 이후 박서와 김경손은 서로 협력하며 몽골군의 총공세를 막아내기 시작했다. 김경손이 용맹함으로 전장을 압도했다면, 박서는 전체적인 방어 전략을 짜내며 사투를 벌였다.

김경손의 활약에 잠시 물러났던 몽골군은 귀주성을 여러 겹으로 둘러싸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격을 퍼부었다. 포로를 보내 투항을 권하기도 하고, 기병을 보내 성문을 습격하기도 하고, 가죽과 수레로 일종의 장갑차를 만들어 성벽 아래로 병사들을 보내 땅굴을 파기도 했다. 대포로 성벽을 공격하고, 기름 먹인 나무에 불을 붙여 화공을 펼치기도 하였다. 무려 한 달 동안 계속된 몽골군의 다양한 공세에 박서는 효과적인 방어 전략을 구사하며 성을 지켜냈다. 때로는 성문을 열고 기습을 하고, 녹인 쇳물을 성벽 아래로 퍼부어 적의 공성 부대를 섬멸하고, 기름을 이용한 적의 화공에 대해서는 진흙을 섞은 물로 끄는 등 다양한 임기응변으로 대처했다. 결국 몽골군은 귀주성 공략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피땀으로 일궈낸 값진 승리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10월부터 12월에 걸쳐 몽골군은 다시 수십 대의 대포를 동원하여 귀주성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귀주성은 크게 파괴되었고, 심지어 일시적으로 성벽이 뚫려 몽골군이 넘어오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박서의 지휘하에 귀주의 병력은 결사적으로 성을 보수하고 항전하여 이들을 격퇴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 안북부(安北府)에서 고려의 주력군은 몽골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몽골군은 개경 인근까지 내려와 압박하는 한편, 한 갈래로는 남쪽으로 충주까지 진격하였다. 각지의 성이 함락되고 백성들이 죽임을 당했다. 무신집권자였던 최우(崔瑀)의 영향 하에 있었던 고려 조정은 몽골과 화친을 맺기 위해 접촉하였다, 살례탑이 보낸 사자에게 잔치를 열어주고 선물을 보내며 조건을 맞추고 있었고, 몽골은 외교적인 압박과 함께 막대한 물자를 요구했다.

개경에서 몽골의 사신을 접대하는 잔치가 열리는 동안, 귀주성은 다시 몽골군과 혈전을 벌였다. 몽골이 대포를 쏘자 박서도 포차로 돌을 날려 몽골군을 공격하고, 몽골이 성을 타넘기 위한 공성 도구인 운제(雲梯)를 동원하자 박서는 큰 칼날이 달린 대우포(大于浦)라는 무기로 이를 부숴버렸다. 평생을 전장에서 살았을 몽골의 노장이 이를 보고 감탄하며 “내가 성인이 되어서부터 종군하여 천하의 성곽과 해자를 공격하는 전투를 죽 보았는데, 이처럼 공격을 받고도 끝내 항복하려 하지 않는 것은 본 적이 없다. 성안에 있는 여러 장수들은 훗날 반드시 모두 장상(將相)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귀주성은 이렇게 끝까지 몽골군의 공격을 모두 격퇴하며 함락되지 않았다. 박서의 뛰어난 지휘력과 귀주성의 장수‧군사‧백성들의 처절한 싸움이 어우러져 빚어낸, 믿기 어려운 승리였다.

4 고려의 항복, 그리고 박서의 퇴진

귀주성 전투는 이렇게 끝이 났다. 장렬하고 아름다운 결말이다. 하지만 고려의 운명은, 그리고 박서의 운명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12월의 마지막 전투 도중, 살례탑은 고려인들을 사자로 파견하여 박서에게 항복을 권했다. 왕족인 회안공 왕정(淮安公 王侹)의 명의로 발신한 문서까지 동원하였다. 하지만 박서는 이를 거부하고 항복하지 않았다. 이듬해 1월, 이번에는 고려 국왕인 고종(高宗)이 귀주로 사자를 보냈다. 이미 조정이 강화를 맺고 항복하였으니, 귀주도 항복하라는 지시였다. 박서는 여러 차례 거부하였으나, 왕명을 계속 어길 수는 없었다. 결국 박서는 몽골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이때 박서의 심정은 어땠을까. 또 귀주성을 결사적으로 지키며 살아남았던 고려인들의 마음은 또 어땠을까.

고려가 항복한 후 박서는 어떻게 되었을까?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두 가지 내용이 전해진다. 하나는 몽골의 사신이 박서를 죽이라고 압박을 했고, 무신집권자 최우가 박서를 불러 “경이 나라에 행한 충절은 아무에게도 비할 데가 없으나 몽골의 말도 두려워할 만한 것이다. 경은 이를 잘 헤아려야 한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에 박서는 죽주로 낙향하였다. 전공에 대한 아무런 포상도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이후 벌어질 30년 가까운 전쟁에서 박서는 아무 역할도 맡지 못하였다. 조용히 은거를 했던 것 같다. 다른 하나의 기록은 그가 훗날 재상인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를 제수 받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언제의 일인지, 심지어 살아서 받은 것인지 사후에 추증된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어쩌면 그나마 다행일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끝까지 자주(慈州)를 지켰던 최춘명(崔椿命)도 항복 권유를 거절했다. 이때 사자로 파견된 것은 최우의 측근 대집성(大集成)이었다. 몽골이 최춘명을 처형하라고 요구하자 고종과 재상들은 가벼운 벌로 무마하려 하였다. 그러나 앙심을 품은 대집성은 최우를 꼬드겨 최춘명을 죽이도록 하였다. 처형 직전에 오히려 몽골 관리가 만류하여 살았지만, 외적의 침입에 끝까지 맞섰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할 뻔 했다가 그 외적 덕분에 목숨을 구한 최춘명의 가슴 속에는 어떤 울분이 쌓였을까. 이런 굴욕에 비하면 박서의 후일담은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느껴진다.

5 박서에 대한 후대의 기억

몽골군으로부터 귀주성을 지켜낸 박서에 대한 기억은 조선 시대에도 이어졌다. 조정에서 북방의 요새에 대해 회의하거나 전법을 논할 때, 또 귀주 지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박서의 이름이 곧잘 거론되었다. 세조대에는 양성지(梁誠之)가 상소를 올려 여러 일을 논하면서 무성묘(武成廟)를 세워 역대의 여러 장수와 군사 지휘관들을 모실 것을 건의하였는데, 여기에 박서도 포함되었다. 또 숙종대에는 귀주에 성을 다시 쌓을 때 백성들의 뜻을 듣고 박서를 기리는 사당을 짓게 하였다. 현대에도 교과서에서 귀주성 전투는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박서는 현재의 한국인들에게 김유신이나 이순신처럼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한다. 단순히 ‘불굴의 투지로 외세에 맞서 싸운 자랑스러운 영웅’의 모습으로만 기억하기에는 그의 삶이 남긴 여운이 크다. 그가 지키려 했던 것은 무엇이고, 국가는 그를 어떻게 대했는가? 박서에 대해 기억된 것은 무엇이고 왜 그것이 기억되었는가?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그의 삶에서 무엇을 배울 것이며, 어떤 현실을 만들어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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