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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필[徐弼]

강직한 충신의 표상

901년(효공왕 5) ~ 965년(광종 16)

서필 대표 이미지

서필 신도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서필(徐弼)은 고려 광종(光宗) 시대에 재상(宰相)을 지낸 관리였다. 901년(효공왕 5)에 태어나 965년(광종 16)에 사망하였다. 훗날 광종의 묘정에 배향공신으로 모셔진다.

2 이천 출신의 청년, 난세에 관직에 나아가다

『고려사(高麗史)』에 수록된 서필 열전에서는 “이천(利川) 사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손자인 서눌(徐訥) 열전에는 서필의 아버지가 신일(神逸)이라 적혀 있다. 서신일은 현재 이천 서씨의 시조로 모셔진다. 서눌 열전에 따르면 서신일이 어느 날 사냥꾼으로부터 사슴을 구해주었는데, 그 사슴의 아버지인 신인(神人)이 보답으로 그의 자손을 대대로 고관대작에 오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서필 본인과 아들 서희(徐熙), 손자 서눌이 모두 재상의 지위까지 오른 일이 설화에 담긴 것으로 보인다.

서필의 열전에 따르면 그는 도필(刀筆)로 관직에 나아갔다고 하였다. 학문이나 무예에 뛰어나 출사한 것이 아니라 일반 관리로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의 나이로 보아 대략 태조(太祖) 시기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서필의 집안이 이천에서 어느 정도의 세력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는 없다. 그러나 그의 5대손인 서공(徐恭)의 묘지명에서는 서필이 태조공신(太祖功臣)이었다고 기록하였다. 이를 통해, 관직에 처음 진출할 때 집안의 세력이 어떠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가 태조대의 조정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공을 세웠다는 점은 알 수 있다. 이 점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서필이 태조와 혜종(惠宗), 정종(定宗) 시대에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는 사료에 남아있지 않다. 고려 초기의 기록이 거란과의 전쟁 등을 거치며 많이 사라졌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광종대에 그는 이미 재상의 지위에 올라 있었다. 광종이 즉위했을 무렵, 서필은 50세 전후의 나이였다. 후삼국 통일 전쟁, 통일 후 국가 운영, 왕위를 둘러싼 권력 투쟁 등 수많은 난제가 쌓여 있던 시기를 헤치며 조정의 중신이 된 것이다.

3 검소한 재상, 조정의 질서를 논하다

광종대 서필의 모습에 대해서도 극히 일부만이 지금 전해지고 있다. 고려사 열전 과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졸기 에 몇 개의 에피소드가 거의 똑같이 담겨 있다. 두 책의 편찬 당시에는 조금 더 많은 자료가 있었을 지도 모르나, 편찬자들이 보기에는 이 에피소드들이 열전과 졸기의 목적에 부합한다고 느껴서 이를 골랐던 것 같다. 후세에 귀감이 될 만한 이야기로 말이다.

우선 가장 먼저 나오는 이야기는 광종이 그에게 황금으로 된 술잔세트[金酒器]를 내렸던 일화이다. 하루는 광종이 재상 왕함민(王咸敏)·황보광겸(皇甫光謙)·서필 세 사람에게 이 선물을 하사하였다. 그런데 서필만 이를 받지 않고 사양하니 광종이 이를 크게 칭찬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우선은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사치하지 않고 검소한 태도를 가졌다는 점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보인다. 서필은 “의복을 입는 데는 등급의 차례[等衰]를 밝혀야 하고, 사치와 검약은 다스리는 일과 어지럽게 하는 것에 관한 일입니다. 신이 금그릇을 사용하면, 임금께서는 장차 무엇을 쓰시겠나이까?”라고 말하였다. 광종대의 대표적인 제도 정비 중 하나로 공복(公服)의 제정을 꼽는다. 즉 관료들이 조정에서 국왕이 부여한 위계에 따라 옷을 차등적으로 입게 한 것이다. 서필의 말에는 당시의 이러한 분위기와 서로 통하는 면이 담겨 있다.

4 정치 개혁, 원칙을 내세우다

위의 이야기에 이어 열전에는 두 개의 관련되는 에피소드가 이어진다. 국왕 광종의 정치를 강하게 비판하는 내용으로, 앞의 부드러운 이야기와 대비되는 긴장감 있는 이야기이다. 하루는 서필이 광종에게 “바라건대 왕께서는 공이 없는 자들에게 상을 주지 마시고, 공이 있는 자들을 잊지 마십시오.”라는 간언을 올렸다. 묵묵부답이던 광종은 다음날 측근을 보내 그것이 어떤 사람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서필은 “공이 있는 자는 바로 원보(元甫) 식회(式會)이고, 공이 없는 자는 바로 너희들이니, 바라건대 이대로 가서 아뢰어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적혀 있지 않다. 바로 이어 나오는 것은 광종의 투화 중국인 우대 정책에 대한 비판이다. 서필은 광종에게 자신의 집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무슨 일이냐 물으니, 광종의 지시로 투화인들이 관직을 마음대로 고르고 원하는 집과 배우자를 선택하는 상황이니 자기가 먼저 집을 헌납하는 것이 자손을 위한 길인 것 같다고 답하였다. 광종은 이에 분노하였다가 이후 깨달음을 얻고 행동을 고쳤다고 한다.

광종이 다방면에 걸쳐 개혁을 추진했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그 과정에서 공신 세력을 억제하고 신진 관리들과 중국에서 온 투화인들을 우대하였는데, 서필이 바로 이 점을 정면으로 지적했던 것이다. 광종대에 정치적 숙청이 빈번하게 있었음을 감안하면 대단히 용기 있는 행동이다. 광종의 정책에 대한 정면 비판이지만, 그것이 정파적 논리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원칙, 즉 공에 따라 우대해야 하며 비정상적 특혜는 옳지 않다는 논리에 기반하였기에 용납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광종으로부터 상당한 신뢰가 쌓여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5 인자한 정치를 권하다

서필의 열전은 이제 마지막 하나의 일화를 끝으로 마무리가 된다. 하루는 궁궐에서 키우는 말이 죽는 사고가 생겼다. 광종은 그 책임자에게 벌을 내리려 하였다. 뒤에 이어지는 내용으로 보아, 그 벌은 사형이었던 것 같다.

이에 대하여 서필은 광종에게 간언을 올렸다. 간언의 전문은 전해지지 않으나, 열전에는 그 핵심이 공자(孔子)가 말한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不問馬]’는 고사였다고 하였다. 이는 『논어(論語)』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공자의 집 마구간에 불이 났는데, 퇴근한 공자가 사람이 다쳤는가만 묻고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광종에게 인자한 조치를 권한 간언이었다. 이에 마구간 담당자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일화는 단순히 마구간 담당자의 목숨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광종대에는 잦은 정치적 숙청으로 수많은 관리들이 목숨을 잃었다. 태조대 이래의 공신들도 많은 해를 입었다. 서필은 광종이 좀 더 인자한 정치를 펴기 바랐던 마음에서 위와 같은 간언을 올렸던 것이 아닐까.

6 강직한 가풍, 후세에 전해지다

서필은 서렴(徐廉)·서희(徐熙)·서영(徐英) 세 아들을 두었다. 그 중 서희는 이후 성종대에 거란의 침공을 외교적 협상으로 잘 마무리하고 강동 6주를 축성하는 공을 세운다. 서희에 관한 기록에서도 서필처럼 국왕에 대해 강직한 간언을 올리는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다. 손자인 서눌도 법과 원칙에 기반하여 정치 활동을 했던 모습들이 사료에 남아 있다. 서필이 지녔던 강직한 충신의 면모가 가풍(家風)으로 전해지며 고려 조정의 정치 문화에 한 가닥 맑은 흐름으로 내려왔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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