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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장수[偰長壽]

대명외교에서 활약한 위구르계 귀화인

1340(충혜왕 1) ~ 1399(조선 정종1)

설장수 대표 이미지

고려사 권112 열전 설장수 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설장수(偰長壽, 1341~1399)는 위구르계 색목인으로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하여 아버지 설손(偰遜)을 따라 고려로 귀화했다. 1362년(공민왕 11)에 과거에 합격하였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여 재추(宰樞)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대명외교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세웠다. 조선 건국 후에는 정몽주(鄭夢周)의 당으로 몰려 유배되었으나 다시 등용되어 대명(對明) 외교에서 활약하였고 사역원(司譯院)을 관장하여 외교실무자 양성에 힘썼다. 설장수가 『소학(小學)』을 한어(漢語) 번역한 책인 『직해소학(直解小學)』은 조선시대 사역원의 한어 교재로 사용되었다.

2 고창 설씨 가문의 이주와 정착

설장수의 선조는 고창(高昌) 위구르의 거족(巨族)이었다. 성길사한(成吉思汗, 칭기스칸)이 몽골리아 고원을 통일하고 정복 사업을 시작할 무렵 고창 위구르의 군주는 재빨리 칭기스칸에게 복속을 표명하여 고창국을 지켜냈다. 설장수의 5대조인 악린첩목이(岳璘帖穆爾, 에렌 테무르)는 이때 몽골제국에 투항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악린첩목이는 성길사한을 따라 정벌에 참여하여 여러 전공을 세웠으며 성길사한의 막내동생이 스승을 구하자 성길사한이 악린첩목이를 보내 그를 가르치도록 하기도 하였다. 이후 악린첩목이의 후손들은 색목인 관료로서 대대로 몽골제국에서 상당한 정치적 지위를 누렸다.

악린첩목이의 자손들은 색목인이었지만 유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중국 한인(漢人) 사회에서도 높은 대우를 받았다. 악린첩목이의 아들인 합자보화(合刺普華, 카라 부카)는 무인이었지만 유학에도 밝았다고 하며, 합자보화의 아들인 설문질(偰文質) 대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으로 유학을 공부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인 사회에 자연스럽게 정착하게 되었다. 설문질은 강남의 율양(栗陽)으로 이주하는 한편 한족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설’이라는 한족식 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설이라는 성은 위구르족의 발상지인 설연하(偰輦河, 세렝가 강)에서부터 따온 것이다.

한편, 설문질은 자식 교육에 힘써 다섯 아들이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는 영예를 얻었다. 설문질의 다섯 아들은 제과 합격 후 지방관직뿐 아니라 중앙의 문한(文翰) 관직까지도 진출했다. 특히 셋째 아들 설철독(偰哲篤)은 『요사(遼史)』 편수 작업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관직은 이부상서(吏部尙書)까지 올랐다. 이에 고창 설씨 가문은 문명(文名)을 더해 강남에서 손꼽히는 명가(名家)로 자리를 잡았다. 고창 설씨 가문의 명망은 훗날 명나라를 건국할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에게도 전해졌다.

설철독은 설손(偰孫)과 설사(偰斯) 두 아들을 두었다. 설손의 초명은 설백료손(偰百遼遜)으로 1345년(충목왕 1)에 제과에 합격한 후 한림응봉문자(翰林應奉文字), 선정원단사관(宣政院斷事官)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설손의 관직생활 중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단본당정자(端本堂正字)로 황태자에게 경전(經典)을 가르친 것이다. 단본당은 황태자를 교육하기 위해 설치된 관청으로 설손은 단본당에 재직하던 중 고려의 왕자로서 황태자를 숙위(宿衛)하던 공민왕(恭愍王)과 안면을 익혔다. 설손은 공민왕 외에도 대도(大都)에서 관직 생활을 하던 고려인들과 직간접적으로 폭넓게 교유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설철독의 둘째 아들인 설사 역시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관직에 임했다.

고창 설씨 가문은 1350년대에 대도를 중심으로 치열하게 벌어지던 권신(權臣)들 간의 정쟁과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군웅(群雄)들의 격동에 휘말리게 되었다. 1354년(공민왕 3)에 오랜 기간 정국을 주도하던 권신 탈탈(脫脫, 톡토)이 실각하고 합마(哈麻, 카마)가 권력을 잡았다. 설손은 곧 승상(丞相) 합마의 시기를 받아 단주(單州)의 수령으로 좌천되었다. 설씨 가문은 탈탈과 정치적 견해를 같이 하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탈탈이 실각하자 함께 타격을 받은 것이었다. 합마는 1년도 되지 않아 실각하였으나 설손은 다시 중앙 정계로 복귀하지 못했다. 홍건적의 난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설손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큰아들 설장수를 비롯한 가솔을 이끌고 고려로 이주했다. 『고려사(高麗史)』는 설손이 고려로 이주한 해가 1358년(공민왕 7)라고 하고 『정종실록(定宗實錄)』은 1359년(공민왕 8)이라고 하여 연도에 약간 차이가 있다. 당시 설손은 중앙 정계에서 좌천된 이후 부친상을 당하여 대녕(大寧)에 우거하고 있었다. 홍건적이 대녕을 침공하자 설손은 피난을 결심했다. 그런데 고창 설씨 가문의 근거지인 율양 일대는 홍건적 세력의 핵심 지역이었기에 강남으로 돌아가는 것은 위험한 선택이었다. 결국 설손은 고려로의 피난을 결심했다. 여기에는 단본당에서 친분을 맺었던 공민왕이 고려의 국왕으로 즉위했다는 점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공민왕은 설손을 크게 환대하여 부원(富原)의 토지를 하사하고 부원후(富原侯)라는 작위까지 주었다. 1360년(공민왕 9), 설손은 오래지 않아 사망했지만 설손의 다섯 아들이 모두 고려에서 높은 관직에 오름으로서 고창 설씨 가문은 고려에 성공적으로 안착하였다.

반면, 설사는 설손과는 다른 선택을 하였다. 설사는 홍건적의 난 때 고려로 이주하지 않고 원나라에 남아서 관직 생활을 계속하다 1367년(공민왕 16)에 주원장에게 귀부하였다. 명나라가 건국된 이후 설사는 승승장구하여 관직이 이부상서(吏部尙書)와 예부상서(禮部尙書)에까지 이르렀다. 설사는 명나라 건국을 알리는 첫 사신으로 고려에 파견되기도 했다. 이는 고려로 이주한 설씨 가문을 의식한 인선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고창 설씨 가문은 설손과 설사 형제에 의해 둘로 나뉘어 각각 고려와 명나라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3 설장수의 생애와 업적

1358년, 설장수는 18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 고려로 이주했다. 설장수는 1362년에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이후 진양(晉陽)의 수령,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지밀직사(知密直事)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으며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다. 공양왕(恭讓王) 옹립에 공을 세워 중흥공신(中興功臣)에 녹권되고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으나 조선 건국 세력과의 뜻이 맞지 않아 정몽주의 당으로 몰려 유배 갔다. 조선 건국 후 태조(太祖)의 지우(知遇)라는 이유로 다시 등용되어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연산부원군(燕山府院君)으로 봉해졌다. 1397년(태조 6)에는 권근(權近)과 함께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추록되었으며 1399년(정종 1)에 사망하자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설장수는 고려로 이주한 후 한평생 고려와 조선에서 관직 생활을 하며 여러 업적을 남겼다. 그중 설장수가 가장 크게 활약한 분야는 바로 대명외교 분야였다. 고창 설씨 가문이 여러 대에 걸쳐 중국 강남 지역에 구축해 놓았던 혈연적, 사회적 네트워크는 설장수가 대명외교에서 좋은 성과를 도출해 내는 데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설장수의 숙부인 설사가 명나라에서 관직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설씨 가문이 교유한 문인들이 명나라 조정 안팎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특히 황진(黃溍)이라는 사람이 가장 주목되는데, 황진은 명나라 개국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던 문인 집단인 금화학파(金華學派)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로 설장수의 할아버지인 설철독과 동년(同年)으로 과거에 급제한 이후 설씨 가문과 오랫동안 깊은 친분을 나누었다. 무엇보다도 홍무제(洪武帝)는 강남의 오랜 명문가인 고창 설씨 가문 출신의 설장수를 매우 신뢰하여 설장수가 남경을 방문할 때마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곤 했다.

또한, 설장수가 강남 태생으로 강남 지역의 중국어에 능통하다는 점도 대명외교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중국은 10세기 이래 오랜 기간 동안 남중국과 북중국으로 나뉘어 있던 탓에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북중국에서 통용되던 한어(漢語)는 중원 지역에서 통용되던 기존의 중국어에 여러 북방민족의 언어가 섞인 형태였다. 이를 한아언어(漢兒言語) 또는 호언한어(胡言漢語)라고도 부른다. 한아언어는 원나라에서 공용어로 사용되었으나 강남 지역에서 발흥한 명나라가 패권을 잡은 이후 강남어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는 고려에게 외교적 시련을 안겨주었다. 고려인이 배운 중국어는 대부분 북중국에서 사용되었던 한아언어였기 때문이다. 1388년(창왕 즉위) 이색(李穡)이 사신으로 파견되어 홍무제 앞에서 중국어로 말을 하였는데 홍무제가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하며 그가 몽골 장수인 “나하추처럼 말을 한다”라고 한 사건은 언어의 차이와 이에 따른 외교적 갈등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남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은 큰 이점이었다.

설장수의 졸기에 따르면 설장수는 여덟 차례 명나라에 사행을 다녀왔다. 고려는 명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희망했으나 실제로는 영토, 인구 등의 문제를 중심으로 적지 않은 갈등을 빚고 있었다. 홍무제는 고려가 북원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지 않았다고 의심하며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는 당면한 외교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설장수를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설장수는 대개 좋은 결과를 가지고 돌아왔다.

1387년(우왕 13), 설장수는 두 가지 사명을 가지고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하나는 요동(遼東) 민호(民戶) 추쇄를 멈추어 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관복 하사를 요청하기 위함이었다. 1386년(우왕 12) 명나라가 사람을 파견하여 1359년에 고려로 피난 온 심양의 군민 4만여 호를 추쇄했다. 명나라가 찾아가려는 사람들은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고려에 온 요동 사람들로 명나라가 건국되기도 전에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명나라는 원나라의 계승자를 자임하며 원나라 영토와 인구를 모두 차지하고자 했으며 그 일환으로 고려에 인구 추쇄를 요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도 인구 문제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응할 수는 없었다. 이에 설장수를 파견하여 당시 고려로 이주했던 중국인은 이미 모두 쇄환했으며 나머지는 요동에 거주하고 있던 고려인이 돌아온 것이기 때문에 보낼 수 없다는 내용의 표문을 전달했다.

설장수는 또 다른 사명인 관복 하사 요청도 성공적으로 해결하고 돌아왔다. 1370년(공민왕 19) 홍무제가 공민왕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하며 국왕, 왕비, 신료의 관복(冠服)을 하사했다. 공민왕은 즉시 이를 고려의 관복으로 채택하였다. 그런데 이때 모든 종류의 관복을 받은 것이 아니기에 여러 차례에 걸쳐 편복(便服) 등 받지 못한 관복을 추가로 하사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고려의 풍속을 따라 운영하라는 답변과 함께 거절당했다. 우왕(禑王)은 설장수라면 이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고 이미 길을 떠난 설장수를 뒤쫒아 가서 추가로 사명을 전달했던 것이다. 설장수는 홍무제와 대화 도중 기회를 보아 관복을 요청했고 마침내 황제가 하사한 사모를 쓰고 단령을 입고 고려로 돌아왔다.

그 외에도 설장수는 1388년(우왕 14)에는 우왕의 퇴위를 알리는 표문을 가지고 가서 창왕(昌王)의 즉위를 인정받고 왔으며 1391년(공양왕 3)에는 공양왕의 세자 석(奭)이 친조하는 데 수행하였다. 이 시기 설장수가 대명사행을 통해 보여준 역할은 격변하는 정국 속 설장수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낸다. 설장수는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일으킨 이성계(李成桂)에게 협조하여 명나라에 가서 홍무제에게 우왕의 퇴위와 최영(崔瑩)의 죄상을 알렸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이성계, 정몽주, 정도전(鄭道傳) 등과 더불어 소위 9공신으로 하나로 중 한 명으로 책봉되었다. 그런데 세자 석의 친조는 이성계와 정도전 등 조선 개국 세력과 공양왕과 정몽주 등 고려 왕조를 유지하려는 세력의 노선이 갈린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공양왕은 세자 친조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다지고자 하였으며 설장수는 이에 동참한 것이었다. 결국 조선 건국 직후 설장수는 정몽주의 당이라는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

설장수는 이듬해 사면되었고, 1394년(태조 3)에는 조정에 확실히 복귀한 것으로 보인다. 왕조가 바뀌었음에도 설장수는 여전히 대명외교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에 더해 사역원제조(司譯院提調)가 되어 사역원의 운영 및 외국어 교육을 총괄했다. 사역원은 1393년(태조 2)에 설립된 관부로 중국의 언어와 문자의 발음과 뜻, 문자의 체식(體式)을 가르쳐 외교실무자를 양성하는 곳이다. 사역원에서 교육한 언어는 한어와 몽고어였으나 훗날 여진어와 일본어가 추가되었으며, 문자의 체식은 이문(吏文)이라고 불리는 중국 공문서의 작성 양식을 말하는데 외교문서가 이문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익혀야 했다. 설장수는 고전 한문으로 되어 있는 『소학(小學)』을 당시 통용되던 한어로 풀어서 해석한 『직해소학(直解小學)』을 편찬하였는데 이는 사역원의 한어 교재로 사용되었다. 훗날 세종(世宗)은 설장수가 『직해소학』을 편찬한 공을 기려 그의 아들에게 관직을 내리기도 했다.

1396년(태조 5) 태조는 설장수에게 계림(鷄林)을 관향(貫鄕)으로 내려주었다. 설장수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이제 설장수는 고창 설씨가 아니라 경주 설씨가 되어 귀화인을 넘어 완전한 조선 사람으로 자리잡았다. 더욱이 다음해에는 권근과 함께 원종공신에 책록되어 조선의 개국 공신이 되기에 이르렀다.

설장수는 조선의 신하로서 두 차례 명나라에 사행을 떠났다. 첫 번째 사행은 1396년에 파견된 것으로 조선 왕실과 혼인을 맺고자 한다는 홍무제의 뜻에 사은하기 위함이었다. 혼인에 대한 논의는 몇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지만 양국 관계가 너무 경색되어 결국 중단되고 말았다. 설장수의 마지막 사행이기도 한 다음 사행은 1398년(태조 7)에는 태조가 세자에게 전위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 파견된 것이었다. 이 사행의 여정은 쉽지 않았는데 요동에서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입국을 저지하는 바람에 한동안 길목에 머무르다 다음 해가 되어서야 남경(南京)을 방문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 설장수는 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 4개월만인 1399년 10월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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