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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숭겸[申崇謙]

장렬한 죽음, 전설이 되다

미상 ~ 927년(태조 10)

신숭겸 대표 이미지

장절공 신숭겸 묘역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신숭겸(申崇謙)은 고려 초기의 장수였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으며, 927년(태조 10)에 전사하였다.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옹립하여 고려를 세운 공신이며, 공산(公山) 전투에서 그의 목숨을 바쳐 왕건을 살렸다.

2 네 명의 장수, 새 왕을 옹립하다

신숭겸에 대해 알려주는 자료는 많지 않다. 『고려사(高麗史)』 열전에서는 그의 초명(初名)이 능산(能山)이고 광해주(光海州) 사람이라고 하였다. 무예와 용맹이 있었다는 점이 특기되어 있다. 광해주는 지금의 춘천(春川) 지역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춘천 지역 ‘우거(寓居)’ 조에도 위의 내용이 적혀 있다. 현재 신숭겸의 묘소가 춘천에 있는데, 이 점 역시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전라도 곡성현(谷城縣) 지역 ‘인물’ 조에 신숭겸을 기록하면서 “세간에 전하기를, ‘신숭겸은 죽어서 현의 성황신(城隍神)이 되었다.’ 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원’ 조에는 그가 본래 곡성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황해도 평산도호부(平山都護府) 지역 편에서도 그가 원래는 곡성 사람인데 태조가 평산을 본관으로 내렸다고 하였다.

젊은 시절에 구체적으로 신숭겸이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 물론 이 시기에 대한 『삼국사기(三國史記)』나 『고려사』 자체의 분량이 매우 적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다만 위의 평산 편에 담긴 태조 왕건과 신숭겸의 일화에서 그가 활쏘기에 능했던 장수가 아니었을까 추정해볼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이러하다. 어느 날 태조가 평산에 사냥을 나와 식사를 하던 중, 기러기 세 마리가 하늘을 나는 것을 보고 누가 활로 쏘겠냐고 물었다. 이에 신숭겸이 자원했고, “몇 번째 기러기를 쏠까요?”라고 여쭈었다. 태조가 웃으며 “세 번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쏘아라.”라고 하니, 정말 그대로 맞추었다는 것이다. 이에 태조는 감탄하고 평주를 본관으로 내리면서 그 일대의 밭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물론 이 내용을 그대로 사실이라고 믿기는 어려울 수 있으나, 민간에서 신숭겸이 활에 능한 장수였다고 전해졌다는 점을 알 수 있다.

10세기로 접어들면서 한반도에서는 신라와 궁예의 태봉(泰封), 그리고 견훤(甄萱)의 후백제(後百濟)가 대립하고 있었다. 이른바 ‘후삼국 시대’였다. 신라 하대 이후로 정치가 혼란해지며 각지에서는 독자적인 지방 세력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호족(豪族) 혹은 성주(城主)·장군(將軍)이라 불린다. 그 중 가장 큰 세력으로 성장한 것이 바로 궁예와 견훤이었다. 궁예는 한반도 중북부를, 견훤은 서남부를 장악하고 세력을 겨루고 있었고, 쇠약해진 신라는 힘을 쓰지 못하는 상태였다.

송악(松嶽) 지역의 유력 세력이었던 왕건 집안은 궁예의 휘하에 들어와 있었다. 신숭겸 역시 어느 시점엔가 궁예의 장수가 되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는 그가 ‘항상 태조를 따라 정벌에 나가 공을 세웠다’라고 기록하였다. 왕건이 직접 전장에 나간 경우는 주로 고려 건국 이전이었으므로, 신숭겸은 아마 이른 시기부터 왕건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918년(태조 즉위) 6월, 궁예 휘하의 기장(騎將), 즉 장수였던 홍유(洪儒)·배현경(裴玄慶)·신숭겸·복지겸(卜智謙) 등이 왕건을 옹립하여 새 왕으로 모시는 사건이 터졌다. 쫓겨난 궁예는 비참하게 죽었고, 왕건은 새 나라 고려(高麗)를 세웠다. 당시 궁예의 폭정에 견디다 못한 신료들이 인망이 높은 왕건을 옹립한 것으로 『고려사』에는 서술되어 있으나, 이것이 승자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당시의 정황을 쿠데타에 가깝게 보는 시각도 있다.

왕건을 옹립한 신숭겸 등 네 장수는 1등 공신으로 책봉되고 금·은·비단을 하사받았다. 앞에서 언급한 사냥터의 일화는 아마도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즉 신숭겸은 태조 왕건의 가장 가까운 측근 중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3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 그리고 공산의 뼈아픈 패배

왕건의 고려와 견훤의 후백제는 한반도의 패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그 격렬한 대치 속에서 신라가 하나의 변수로 떠올랐다. 궁예와 견훤은 모두 신라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왕건은 이와 달리 신라에 우호적인 자세로 접근하였다. 자연히 신라도 고려 쪽으로 기울었다. 세 나라가 얽힌 복잡한 정세 속에서 927년(태조 10) 9월에 큰 사건이 터졌다. 견훤이 직접 군을 이끌고 신라 영역으로 파고 들어가더니, 급기야 수도인 서라벌을 향해 진격한 것이다. 신라의 급보를 받은 태조는 급히 1만의 병력으로 구원하게 하였으나, 이들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견훤은 서라벌을 들이쳐 함락시켰다. 견훤은 경애왕(景哀王)을 자살하게 하고 왕비와 빈첩을 욕보였으며, 병사들을 풀어 노략질을 하고 새로 경순왕(敬順王)을 세웠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는 개경(開京)에서 출발하여 5천의 기병을 직접 이끌고 내려가 공산(公山)의 동수(桐藪)에서 후백제군을 공격하였다. 지금의 대구 지역이다. 이는 이동 거리와 사기 등을 감안할 때 아무래도 무리한 병력 운용이었다.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던 고려군은 결국 대패했고, 태조는 후백제군에 둘러싸여 큰 위기에 처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이때의 전투에 대해 자세한 기록이 실려 있지 않다. 다만 “대장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이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하였으며, 뭇 군사들도 패배하여 달아나고 왕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라는 표현으로 급박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때의 패배로 한동안 고려는 후백제에게 열세에 몰리게 되었다.

왕건은 이들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였으며, “두 명장이 죽어 국가의 걱정이 깊었다.”라고 술회하였다. 그는 김락의 동생 김철(金鐵)과 신숭겸의 동생 신능길(申能吉), 아들 신보(申甫)를 아울러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지금까지도 이 일대에서는 공산 전투에 얽힌 설화와 지명 유래가 전해진다.

4 장렬한 죽음으로 영원히 살다

신숭겸의 죽음에 대해 위의 두 책에는 비교적 간단하게 적혀 있다. 그런데 후대에 후손들에 의해 편찬된 행장(行狀) 등의 문서에는 좀 더 생생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들 기록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신숭겸은 태조를 피신시킨 뒤에 자신이 태조인 것처럼 하고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하였다. 후백제군은 그를 태조로 착각하고 머리를 잘라 돌아갔다. 전투가 끝난 뒤 시신을 수습하려 했지만 머리가 없어서 찾기가 어려웠는데, 왼 발 아래에 북두칠성 같은 사마귀가 있다는 것을 듣고 그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 이에 나무를 깎아 머리를 만들고 제사를 올린 후 춘천에 묘를 만들었다. 위기에 빠진 주군을 대신한 장렬한 죽음의 장면을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내용이 실제로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어느 정도는 과장된 묘사가 들어간 것인지를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고려 왕실과 조정에서 신숭겸의 죽음에 대하여 대단히 예우를 갖추어 대했다는 것이다. 앞서 태조가 유족에게 벼슬을 내리고 지묘사를 창건하며 명복을 빌었다는 점을 말하였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신숭겸은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2세기 예종(睿宗) 때에는 국왕이 팔관회(八關會)의 잡희(雜戱)에 김락과 신숭겸의 모습을 딴 우상(偶像)이 나온 것을 보고 감탄하며 시를 지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이는 ‘도이장가(悼二將歌)’, 즉 ‘두 장수를 애도하는 노래’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전해지는데, 행장에 향찰(鄕札)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태조가 팔관회에 두 장수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허수아비를 만들어 자리에 앉히니, 이 허수아비들이 술을 받아 마시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에 이후로도 팔관회에서 두 장수를 기렸다. 그리고 이를 들은 예종이 시를 지어 두 장수에 대한 애도의 마음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를 거쳐 지금까지도 신숭겸에 대한 추념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의 출신지와 관련된 곡성(谷城)에는 양덕사(陽德祠), 춘천에는 신숭겸의 묘역과 도포서원(道浦書院)이 그를 기리는 공간으로 조성되었으며, 그가 사망한 대구광역시에는 표충사(表忠祠)가, 본관지인 평산(平山)에는 태사사(太師祠)가 세워졌다. 물론 이들은 오랜 시간이 흐르며 자취가 흐려지거나 새로 조성되는 등의 변화를 겪기도 하였으나, 신숭겸에 대한 기억은 고려 초부터 지금까지 천 년의 시간을 넘어 전설로 남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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