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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제신[廉悌臣]

태평재상, 고려말의 혼란기를 헤쳐나가다

1304년(충렬왕 30) ~ 1382년(우왕 8)

염제신 대표 이미지

염제신 초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염제신(廉悌臣)은 고려말의 정치가이다. 1304년(충렬왕 30)에 태어나 1382년(우왕 8)에 사망하였다. 충목왕대부터 우왕대까지 고려 정계에서 명망 있는 정치가로 활약하였다. 충경(忠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2 명문가의 아들, 원으로 가다

염제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당대의 명문 집안 출신이었다. 아버지 염세충(廉世忠)은 충렬왕대의 재상인 염승익(廉承益)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역시 충렬왕~충선왕대에 활약했던 재상 조인규(趙仁規)의 딸이었다. 양가 모두 재상의 집안이니, 어린 시절의 염제신은 부족할 것 없는 풍요 속에서 자랐을 것이다. 소자(小字)는 불노(佛奴)였다고 한다.

하지만 염제신은 6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는 슬픔을 겪었다. 이후 친가와 외가 양쪽에서 각별한 공을 들여 염제신을 양육하였으나, 11세가 되던 해에 염제신은 갑자기 원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고모부인 원의 중서평장(中書平章) 말길(末吉)의 집에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에서 충숙왕(忠肅王)이 즉위했을 즈음이다. 어떤 사정이나 이유였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고려사(高麗史)』 염승익 열전에서는 염제신의 어머니가 당시 불미스러운 소문에 휩싸였다는 말이 있어, 혹 이와 관련되었을 수도 있겠다. 한편으로는 겸사겸사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원의 수도에서 견문을 넓혀주려는 집안 어른들의 뜻도 있지 않았을까. 말길은 그에게 10년 동안 선생님을 붙여 가르쳤다고 한다. 염제신의 신도비문(神道碑文)에 따르면 이제 스무 살 남짓한 청년이 된 염제신은 ‘덕행과 그릇이 당대의 으뜸이었다’라고 한다. 기록의 특성상 다소 미화가 되었을 가능성은 열어두자. 어쨌든 염제신은 원의 수도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말길은 원에서 새로 태정제(泰定帝)가 즉위하자 이듬해인 1328년(충숙왕 11)에 염제신을 데리고 카라코룸으로 가 함께 알현하였다. 태정제는 말길을 상당히 신뢰하였다고 한다. 이에 말길의 조카인 염제신도 아껴 숙위(宿衛)로 삼았다. 염제신은 단정한 행실로 태정제의 믿음을 샀다.

3 원과 고려, 청렴하고 유능한 염제신을 주목하다

몇 해 뒤, 염제신은 태정제에게 고향 고려에 가 모친을 뵙고 싶다고 청하였다. 태정제는 그를 금강산(金剛山)에 가는 강향사(降香使)로 삼아 보내주었다. 원에서 강향사로 온 인물들이 갖은 횡포를 부리는 일이 잦았던 반면, 염제신은 청렴하고 예의를 갖추어 사람들을 대했다고 한다. 그는 1331년(충혜왕 1)에도 다시 강향사로 왔고, 1333년(충숙왕 복위 2)에는 아예 모친이 홀로 계시니 모시고 싶다고 청하여 고려로 돌아왔다. 11살에 떠난 고려로 30살의 장성한 그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낭중(郎中)으로 임명받아 다시 정착을 하러 돌아왔던 것이다.

고려로 돌아온 염제신은 충숙왕에게 크게 신임을 받았다. 당시 다른 정동행성의 관리들이 권력을 남용했던 반면, 염제신은 그들을 제지하며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였다고 한다. 이에 크게 감탄한 충숙왕은 정동행성에서 공문서를 올리면 염제신이 서명을 했는지 확인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서명 여부를 결정하였다고 한다.

자신을 신임해 주는 국왕 밑에서 일했던 이 시기는 염제신에게도 보람 있는 때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충숙왕이 승하하자 상황이 변했다. 신도비에 따르면 ‘여기 오래 머물 수 없다’라고 하며 원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충숙왕이 사망한 것은 1339년(충숙왕복위 8)이므로 이 기록에서 ‘정동행성에 머문 지 9년이 되는 해’라고 한 것은 다소 연대가 맞지 않지만, 어쨌든 꽤 여러 해 동안 고려에서 정동행성 관리로 근무를 했던 그가 급히 원으로 돌아간 것은 모종의 정치적 정세 변화와 관련이 있던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염제신은 원에서 익정사승(翊正司丞)을 제수받아 돌아갔다. 원에서도 청렴한 관리로서의 모습이 여전히 발휘되었다. 강절성(江浙省)에 가 중정원(中政院)의 재정 상태를 조사할 때 관리들이 뇌물을 바쳤으나 모두 거절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당시 이 지역에 와 있던 승상 별가불화(別哥不花)가 이러한 염제신을 눈여겨보고 황제에게 구체적으로 보고하여 등용하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무렵, 어머니가 편찮아지시자 염제신은 다시 귀국을 청하여 고려로 돌아왔다.

1346년(충목왕2), 충목왕(忠穆王)은 염제신에게 광정대부 삼사우사 상호군(匡靖大夫 三司右使 上護軍)을 특별히 제수하며 염제신을 중용하였다. 고려에서 관직을 받은 적이 없으나, 원의 관리였고 충숙왕을 보좌한 경력이 있으므로 특별히 높은 관직을 내린다는 것이었다. 이듬해에는 수성익대공신(輸誠翊戴功臣)에 책봉하고 여러 차례 승진시켜 찬성사(贊成事)까지 올렸다. 예전에는 원에서 파견된 정동행성의 관리로 일했지만, 이제는 고려의 관리로 정치계에 등장한 것이다. 염제신은 이러한 경력과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고려 정계에서 활약을 시작했다. 정동행성의 관리가 고려의 대간을 문책하려 하자 이를 저지하였고, 재상 왕후(王煦)가 원에 조회하러 가면서 염제신에게 국정을 위임하자 공평 타당하게 잘 처리하였다고 한다. 충정왕(忠定王)이 즉위한 뒤에는 원에 성절(聖節)을 축하하는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는 비교적 무난하게 정치 활동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351년에 개혁을 추구하던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면서 염제신의 삶도 크게 출렁이게 된다.

4 개혁을 추구한 공민왕, 염제신을 중용하다

갑자기 고려의 고위 관직을 제수받아 정계의 주요 인물로 등장한 염제신은 그만큼 주변의 견제도 받았다. 새로 즉위한 공민왕이 또 염제신을 중용하려 하자, 당장 공민왕의 측근들이 이를 견제하고 나섰다. 신도비문에 따르면 가장 먼저 염제신의 중용에 반대한 것은 그의 외가쪽 친척이자 공민왕의 최측근이었던 조일신(趙日新)이었다고 한다. 그의 반대가 집요했던지, 공민왕은 이듬해 조일신이 난을 일으켰다가 제거된 뒤에야 염제신을 찬성사(贊成事)에 임명하였다.

공민왕은 1354년(공민왕 3)에는 그를 단성수의동덕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도첨의좌정승 판군부사사 상호군 영경령전사(端誠守義同德輔理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都僉議左政丞 判軍簿司事 上護軍 領景靈殿事)로 삼고, 다시 우정승 판전리 영효사관(右政丞 判典理 領孝思觀)으로 승진시켜 총애를 보였다. 염제신도 그에 부응하여 정치 개혁에 적극 참여하려 하였다. 무신집권기 이래로 오랫동안 정상적으로 정치가 이루어지지 못한 폐단이 심하게 누적되어 있었던 때였다.

하지만 당시는 고려의 안팎으로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대륙에서는 여러 반란 세력들이 일어나 원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고려 내부에서는 공민왕의 반원 개혁이 준비되고 있었다. 염제신의 정치 활동도 이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1354년(공민왕 3) 6월, 채하중(蔡河中)이라는 인물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높이기 위해 일을 꾸몄다. 원의 태사 탈탈((脫脫)과 손잡고 반란군 진압을 위해 고려에서 군사를 징발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 공으로 염제신을 밀어내고 자신이 원의 힘을 배경으로 재상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계산이었다. 그는 염제신 등을 지목하여 지원군의 지휘관으로 추천하기까지 하였다. 공민왕은 할 수 없이 염제신 등을 주축으로 장사성(張士誠) 토벌군을 편성하여 원에 파견하였다. 당시 토벌군의 사기는 매우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 압록강 가에서 일부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개경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마저 벌어져, 염제신이 이를 거부하며 서둘러 병력을 이동시켰다고 한다. 공민왕은 특별히 원에 사신을 파견하여 염제신의 빠른 귀국을 간청하였고, 황제가 “염제신은 고려의 대신이니 예의를 갖추어 보내도록 하라”고 지시하여 10월에 돌아올 수 있었다. 공민왕이 염제신을 각별하게 의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뒤로 한동안 염제신은 군사적인 총괄 업무를 담당하였다. 1356년(공민왕 5)에 공민왕은 대표적 부원세력인 기철(奇轍) 세력을 숙청한 뒤 염제신을 북방으로 보내 군사적으로 대비하게 하였다. 원의 사자가 도착해 힐책하자 염제신은 이를 잘 무마하였다고 한다. 또한 당시 공민왕은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와 파사참(婆娑站) 등을 공략할 준비도 하고 있었다. 염제신이 다시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元帥)로 임명되어 가는 길에, 공민왕은 그에게 “공은 나의 만리장성이다”라고 격려를 하였다. 염제신은 군량미와 마초(馬草)를 비축하고 성곽을 수리하고 무기를 정비하는 등 철저한 대비 작업을 수행하였다.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염제신은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수문하시중 상장군 판병부사 영경령전사(開府儀同三司 上柱國 守門下侍中 上將軍 判兵部事 領景靈殿事)에 임명되었고, 다시 이듬해에는 판이부사 영효사관사(判吏部事 領孝思觀事)로 승진하였다. 이러한 경험 때문인지, 훗날 개경 인근까지 쳐들어 온 왜구를 막기 위해 군사를 징발할 때 학관(學官)들이 자신들은 공자를 모시고 있으니 전쟁에 나갈 수 없다고 하자, 염제신은 “그대들이 공자(孔子)를 모시지 않는다고 공자가 어디로 도망가겠는가.”라고 꾸짖기도 하였다. 또 이후 올라성(兀羅城)을 공략할 때에도 염제신이 군을 지휘하여 성과를 거두었고, 우왕대에는 도총도감(都摠都監)에서 병마 훈련의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5 존경받는 원로로 천수를 누리다

염제신의 정치 생활이 늘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개경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할 때 호종했던 염제신은 이 때 어머니를 모시고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간관들에게 호된 비난을 받고 파면되기도 하였다. 역모를 꾀한 김용(金鏞)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또 문책을 받은 적도 있었다. 신돈(辛旽)이 집권했을 때에는 그와 불화하여 참소를 당하기도 하였다. 화려했던 정치 이력이었지만, 몇 차례의 파면과 복직을 겪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공민왕은 물론이고 다음 우왕(禑王)까지도 염제신을 극진하게 존경하였다. 염제신을 참소하는 측근 신하에게 공민왕은 “시중은 원에서 배웠고 성품이 고결하니, 조정의 다른 신하들과 비할 바가 아니다. 대신의 마음씀에 대해 그대가 아는 바는 아니다.”라고 꾸짖었다. 신돈이 제거된 뒤에는 염제신의 딸을 신비(愼妃)로 맞이하였고, 염제신의 부인을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에 봉하여 예우하였으며, 직접 초상화를 그려 내려주기까지 하였다. 이 초상화로 전해지는 유물이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다. 우왕도 그를 충성수의동덕논도보리공신 영삼사사(忠誠守義同德論道輔理功臣 領三司事)로 삼았고, 1376년(우왕 2)에는 원에서 사신을 보내 자덕대부 장작원사(資德大夫 將作院使)의 지위를 내렸다. 이미 노인이 된 염제신이었지만,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재상이 그를 반드시 모셔 함께 회의를 했다고 한다.

염제신은 1382년(우왕 8)에 공민왕의 묘인 현릉(玄陵)을 참배하고 와 자신의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라는 말을 하였다. 그리고 3월에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니, 79세였다. 누구보다 높은 지위에 올랐지만, 말년까지도 소탈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의 별명이 ‘태평재상(太平宰相)’이었다고 하니, 그의 삶을 이보다 잘 묘사할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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