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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흥방[廉興邦]

권력으로 흥한 자, 권력으로 망하다

미상 ~ 1388년(우왕 14)

1 개요

염흥방(廉興邦)은 고려말의 정치가이다. 공민왕대부터 우왕대까지 활동하였다. 명문가의 아들로 자라나 문무의 재능을 겸하여 촉망받았으나, 간신배와 결탁하여 횡포를 자행하다가 결국 숙청되고 말았다. 그의 호를 딴 『동정집(東亭集)』이라는 시문집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2 명재상(名宰相)의 아들, 문무 겸비의 재능을 펼치다

염흥방은 충숙왕대부터 우왕대까지 청렴한 정치가로 존경받았던 염제신(廉悌臣)의 아들이다. 염제신에게는 세 명의 아들과 다섯 명의 딸이 있었다. 염흥방은 그 중 둘째 아들이었다. 염제신의 세 아들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정계에 입문하였다. 그 중에서도 염흥방은 특별했다. 그는 1357년(공민왕 6) 4월, 이인복(李仁復)과 김희조(金希祖)가 주관한 과거 시험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태어난 해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 당시 그의 연령은 알 수 없다. 강직하고 바른 정치에 힘썼던 훌륭한 재상 염제신의 아들로 과거에서 장원급제를 한 염흥방. 아마도 당시의 국왕인 공민왕(恭愍王)은 물론, 정계의 인물 모두 그를 크게 주목했을 것이다.

급제 후 신참 관리인 염흥방이 어떤 일을 했는지는 기록에 특별히 보이지 않는다. 장원급제라고는 해도 이제 막 정계에 입문한 염흥방이 두드러진 활동을 했다고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몇 년 후의 기록에서 뜻밖의 모습이 나타난다. 1363년(공민왕 12) 윤3월, 개경(開京)을 수복한 공신을 서훈하는 기록에 ‘위위윤(衛尉尹) 염흥방’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다. 위위윤은 종3품 관직이니, 급제한 지 6년 만에 높은 지위까지 올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염제신의 아들이라는 점이 작용했을 수도 있겠다. 그는 이 때 1361년(공민왕 10)에 터졌던 홍건적의 2차 침입 때 이들에게 함락되었던 개경을 되찾는 데 공을 세웠다 하여 이등공신에 서훈되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고려군이 총력전을 펼쳐 개경을 수복할 때 염흥방이 모종의 군공을 세웠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훗날 1374년(공민왕 23)에 최영(崔瑩) 등과 함께 2만 5천여 병력을 이끌고 제주도에 목호(牧胡)의 난을 평정하려 출병하였다. 당시 염흥방은 진군을 늦추려는 최영에게 빠른 진격을 건의하여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하였다. 이로 보아 염흥방은 아버지 염제신처럼 군사 분야에도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직접 다른 관리와 박희(拍戱)를 겨룬 적도 있다고 하니, 어느 정도의 무예도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대의 기록에서 염흥방의 모습들을 단편적이나마 더 찾아볼 수 있다. 훗날 그가 정치적으로 숙청을 당했기 때문인지, 기록의 순서가 다소 뒤엉켜 있는 점이 있음을 감안하자. 1367년(공민왕 16)에 공민왕은 성균관(成均館)을 새로 짓고 수학 인원을 확충하도록 지시했다. 이 때 염흥방이 이를 주관하였는데, 당시 노국공주(魯國公主)의 영전(影殿)을 짓는 공사로 국고가 부족하여 공사 비용이 모자랐다고 한다. 이에 염흥방은 문신들에게 품계에 따라 베를 내어 충당하게 하였다. 아마 이에 대한 호응이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윤상발(尹商拔)이라는 가난한 정7품 관원이 옷을 팔아 베를 내자, 염흥방은 이를 거론하며 다른 문신들을 질타하였다고 한다. 이에 열흘 만에 1만 단의 베가 들어왔고, 무사히 성균관 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 염흥방은 공민왕대에 왕명의 출납과 궁중 숙위 등을 맡는 밀직사(密直司)에서 정3품 관직인 지신사(知申事)와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역임하였다. 또 공민왕대 후반부터 우왕대 초반에는 과거 시험을 주관하는 지공거(知貢擧)와 동지공거(同知貢擧)를 세 차례나 맡아 새 관리를 선발하였다.

공민왕은 염흥방을 총애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염제신도 공민왕에게 큰 존경과 예우를 받았다. 염흥방의 누이도 공민왕의 신비(愼妃)로 들어와 있었다. 대를 이어 조정의 중신으로 활약하는 염흥방에게 공민왕은 큰 기대를 걸었던 것 같다. 공민왕은 모니노(牟尼奴)를 궁중으로 들여 자신의 아들로 선언하면서 염흥방, 백문보(白文寶) 등과 논의하여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으로 책봉하였다. 바로 훗날의 우왕(禑王)이었다. 이 무렵까지 염흥방은 나무랄 데 없는, 아니 문무를 겸비한 당대의 정치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최영과 함께 제주도로 목호의 난을 진압하러 간 사이, 공민왕은 비극적인 암살을 당했다. 그리고 많은 것이 달라져 버렸다.

3 쓰라린 유배의 끝, 탐욕과 타락의 길을 택하다

공민왕이 암살을 당하고 우왕이 즉위한 고려의 정치계는 혼란스러웠다. 우왕을 새 왕으로 즉위시키는 데에 힘을 쓴 이인임 (李仁任)이 권력을 쥐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국제 정치와 국내 정치가 맞물리며 파열음이 터져나왔다. 당시는 대륙에서 한족(漢族)이 세운 명이 몽골의 원을 북쪽 초원으로 밀어내던 시기였다. 공민왕은 친명(親明)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우왕이 즉위한 뒤 이인임 은 친원(親元), 즉 북쪽으로 밀려난 북원(北元)과 다시 손을 잡으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려 정계는 친명과 친원을 둘러싸고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 염흥방은 정도전(鄭道傳), 정몽주(鄭夢周) 등 이른바 신흥유신들과 함께 친명 입장에 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도전이 친원을 추진하는 이인임 에 맞서다가 귀양을 떠나게 되자, 사람을 보내 위로하며 자신이 이를 무마해 보겠다는 뜻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인임 이 사람을 시켜 명의 사신을 죽인 일을 둘러싸고 고려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간관(諫官) 이첨(李詹)과 전백영(全伯英)이 상소를 올려 이인임 을 탄핵하였다. 그러나 이는 역풍을 불러 일으켜 수많은 신흥유신들이 유배형에 처해졌다. 염흥방도 이 때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재상의 아들로 태어나 탄탄대로를 걸어온 염흥방에게 이 유배는 큰 충격이었던 것 같다. 여주(驪州)에 머물 때에 침류정(枕流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지냈다고 하는데, 이 때 지은 시가 한 수 전한다.

금사거사의 침류정에는 / 金沙居士枕流亭
버드나무 우거져 더운 기운 맑히네 / 楊柳陰陰暑氣淸
귀를 씻고 티끌 세상 일 듣지 않나니 / 洗耳不聞塵世事
다만 잔잔히 흐르는 작은 시내 소리 있다 / 潺湲只有小溪聲

염흥방은 오래 지나지 않아 사면되어 정계로 복귀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지금까지 그의 삶과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보인다. 당시 이인임 의 측근인 임견미(林堅味)가 명문가인 염흥방에게 혼인을 맺을 것을 청하였다고 한다. 염흥방은 전일에 유배되었던 일을 되새기며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이들과 결탁하였다. 이로부터 이들의 세력이 정계를 장악하여, ‘안팎의 요직은 이들과 사적인 관계가 아닌 자가 없었다.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면서 관작(官爵)을 팔고 남의 토지를 탈점하여 산과 들을 이을 정도였으며 남의 노비들을 빼앗아 수천 수백의 무리를 이루었다. 왕릉·궁고(宮庫)·주현(州縣)·진(津)·역(驛)에 소속된 토지까지도 모조리 점거하여 탈점하지 않음이 없었다.’라고 묘사되었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여러 인물들의 『고려사(高麗史)』 열전에는 염흥방이 권력을 남용하여 인사에 개입하거나 다른 사람의 재산을 빼앗았다는 내용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이인임 과 임견미, 염흥방 등은 다른 사람의 땅 중에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그 주인을 몽둥이로 때리고 이를 빼앗는 짓을 일삼았다고 한다. 주인이 이러니 그 집안의 노비들도 따라서 횡포를 자행하였다. 지역의 관리와 향리들을 염흥방 집안의 노비들이 구타하는 사건이 벌어지기까지 하였다. 우왕도 이러한 염흥방의 모습에 점차 염증을 느끼며 염흥방을 미워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권력에 도취한 염흥방은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데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4 무소불위의 권력남용, 자신의 죽음을 부르다

1387년(우왕 13) 12월, 염흥방의 집안 노비 이광(李光)이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조반(趙胖)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전직 고위 관리가 노비를 죽인 사건. 언뜻 보면 조반의 갑질 행위로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이광이 조반의 밭을 빼앗았던 것이다. 조반은 염흥방에게 간청하여 이를 돌려받았다. 하지만 이광은 다시 이를 빼앗고 조반을 모욕하였다. 애걸하는 조반에게 이광은 더욱 횡포를 부렸다. 현대 사회처럼 만인이 평등한 사회에서도 분노를 야기할 행태였다. 하물며 당시는 신분의 차이가 있었던 시대. 조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조반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말을 탄 수하 수십 명을 데려가 이광의 목을 베고 집에 불을 질러버렸다. 이어 염흥방에게 가 이 사실을 알리려 하였다.

염흥방은 이 소식을 듣고 조반에게 크게 화를 냈다. 수백의 기병을 보내 조반을 체포하게 하고, 그의 가족들을 잡았다. 심지어 반란을 도모하였다는 죄목까지 붙였다. 체포된 조반은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굴하지 않고 “예닐곱 명의 탐욕스러운 재상들이 노비를 사방으로 풀어 남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고 백성을 해치거나 학대하니, 이들은 큰 도적이다. 지금 이광이라는 자를 참한 것은 오직 국가를 도와 백성의 도적을 제거하고자 한 것일 뿐이다. 어찌 모반이라고 하는가.”라고 외치며 염흥방 등을 비난하였다.

우왕이 드디어 움직였다. 자신의 이권을 위해 부당하게 전직 고위 관리를 역모로 엮어 고문하는 염흥방은 이제 더 이상 용납될 수 없었다. 우왕은 조반과 그의 가족을 풀어주고 위로했고, 최영 등과 논의하여 염흥방을 체포하였다. 그리고 기세를 몰아 임견미와 염흥방을 비롯, 그들의 세력을 일거에 모두 숙청하였다. 염흥방의 일가족도 몰살을 당했고, 재산도 모두 압류당했다. 날벼락처럼 갑작스럽고 철저한 숙청이었다.

사람의 일생에서 누구나 위기를 겪는 때가 있다. 승승장구하다가 큰 좌절을 겪기도 한다.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어도 누군가에게 부당하게 피해를 입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럴 때 어떤 길을 택하는지가 그 사람의 일생의 방향을 좌우하게 된다. 재상가의 아들로 태어나 탄탄대로를 달리던 염흥방. 권력자에 의해 유배를 당했던 경험이 인생관을 바꿀 만큼 컸던 것일까. 아니면 내면에 있었던 탐욕이 기회를 만나 밖으로 뻗쳐 나오게 되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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