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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총[吳延寵]

난세를 만난 태평성대의 문장가

1055년(문종 9) ~ 1116년(예종 11)

오연총 대표 이미지

덕산사 전경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오연총(吳延寵)은 11세기 중반~12세기 초반에 살았던 고려 시대의 문신이다. 문종(文宗) 시대부터 예종(睿宗) 시대에 걸쳐 내정과 외교, 군사 작전 등 다방면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예종대의 여진(女眞) 정벌에 윤관(尹瓘)과 함께 책임자로 출정하였던 일이 중요한 이력으로 남아있다.

2 태평성대의 문장가, 순탄한 정치 인생을 걷다

오연총은 해주(海州)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의 집안이나 선대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그의 열전에서 ‘집안이 한미하여 어려서부터 가난하고 천하게 지냈다.’라고 하였으니, 그리 좋은 형편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학문에 힘써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르게 된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생몰 연대로 보아 문종대에 급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젊은 시절의 오연총이 어떠한 관직 생활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처음으로 그가 사료에 등장하는 것은 1096년(숙종 1) 10월에 거란에 외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는 내용이다. 거란 황제의 생일인 천안절(天安節)을 축하하는 사신단이었으니, 엄선된 사절단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오연총이 최고 책임자로 발탁되었다는 것은 그의 능력이 상당히 높게 평가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오연총은 1098년(숙종3) 12월의 정기 인사에서 기거랑(起居郎)으로 임명되었다. 국왕의 측근에서 간언을 올리는 종5품의 직책이었다.

1100년(숙종 5) 7월에는 다시 송에 파견되었다. 새 황제 휘종(徽宗)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사신단의 부사(副使) 지위였다. 거란에 이어 송에 보내는 가장 중요한 사절단의 책임자급으로 발탁이 되었던 것이다. 전 황제인 철종(哲宗)에 대한 조위사(弔慰使)와 새 황제 휘종에 대한 축하 사신단이었다. 송은 이들을 크게 우대하고, 사신단의 귀환길에 의학서적인 『신의보구방(神醫普救方)』과 백과사전인 『태평어람(大平御覽)』을 숙종에게 선물로 전하도록 하였다. 숙종은 크게 기뻐하며 이런 말을 내렸다.“『태평어람』은 돌아가신 문종께서 일찍이 구하려 하셨으나 얻지 못하셨던 것이며, 『신의보구방』은 세상을 구제하는 중요한 기술이다. 이제 짐이 두 가지를 얻었으니, 이는 사신의 능력 덕분이다. 등극을 하례하고 봉위(奉慰)하던 사(使)와 부사(副使), 막료와 보좌관들에게 모두 작상(爵賞)을 더해주도록 하라.”

숙종은 좋은 성과를 거두고 돌아온 오연총을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삼았다. 이어 지방관으로 전주(全州)에 나가 관대하고 공정한 정치로 최고의 고과 성적을 올리고,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추밀원좌승선 형부시랑 지어사대사(樞密院左承宣 刑部侍郞 知御史臺事)에 임명된 뒤 상서좌승 한림시강학사(尙書左丞 翰林侍講士)로 옮겨졌다. 숙종이 승하하고 아들 ㅍ이 즉위한 뒤에는 지추밀원사 어사대부 한림학사승지(知樞密院事 御史大夫 翰林學士承旨)에 임명되었다. 한림학사의 직책을 받은 것으로 보아, 오연총은 문장가로서의 실력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평화로운 시대가 계속 이어졌다면, 오연총은 아마 당대의 문장가이자 외교와 내치에 모두 능했던 좋은 정치가로 평안하게 여생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은 그를 거친 전쟁터로 내보냈다.

3 난세를 만나 전장에 서다

오연총이 정계에서 활약하던 숙종대 초반, 즉 12세기 초는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에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던 때였다. 10세기 이래로 북방 초원의 거란, 대륙의 송, 그리고 한반도의 고려는 치열한 경쟁과 견제, 그리고 전쟁과 연계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였다. 고려는 10세기 말~11세기 초에 거란의 공격을 여러 차례 받았으나, 귀주대첩(龜州大捷)으로 3차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은 후 거란과 송 사이에서 다원적 천하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여진(女眞)이 있었다. 여진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연해주에 걸쳐 부족별로 거주하면서 다양한 향배를 보였다. 거란에 복속된 부족도, 고려에 조공을 바치던 부족도, 자유롭게 살아가던 부족도 있었다. 상황에 따라 특정 부족의 정치적 향배가 달라지기도 하였다. 거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한 고려 쪽으로 붙는 부족들도 점차 많아졌다. 오연총이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갔던 문종대에는 먼 지역의 여진 부족들이 고려에 복속을 자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구도는 11세기 말~12세기 초에 여진 부족 중 완안부(完顔部)가 세력을 키우며 크게 흔들렸다. 완안부가 성장하며 한반도 동북부에 거주하던 여진 부족들도 영향을 받았다. 이들에게 붙는 부족도, 이들과 갈등을 빚는 부족도 있었다. 고려는 변방 지역의 정세가 불안정해지는 것을 크게 경계하였다.

결국 1104년(숙종 9) 1월부터 고려와 완안부 및 동북면의 여진 부족들 간에 무력 충돌이 시작되었다.

오연총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 변화 속에서 이번에는 군사적인 책임을 맡게 되었다. 1105년(예종 즉위년) 11월에 동북면병마사 겸 지행영병마사(東北面兵馬使 兼 知行營兵馬事)로, 다시 그 해 12월에는 동계행영병마사(東界行營兵馬使)로 임명되었다. 1106년(예종 1) 11월에는 윤관과 함께 별무반(別武班)의 신기군(神騎軍)과 신보군(神步軍)을 사열하였다. 그리고 1107년(예종 2) 윤 10월, 국왕 예종은 윤관을 여진 정벌군의 원수로, 오연총을 부원수로 삼았다. 약 17만의 대군을 동원한 큰 전쟁이었다. 당시 오연총은 이 정벌에 대하여 회의적인 입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관에게 은밀하게 의심되고 주저되는 바를 말하자, 윤관이 이미 정해진 일에 왜 주저하느냐고 화를 내어 오연총이 입을 다물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윤관과 오연총이 이끄는 고려군은 동북면의 여진 부족들을 파죽지세로 격파하며 큰 전과를 거두고 해당 지역에 9성을 쌓았다. 이 공으로 오연총은 협모동덕치원공신(協謀同德致遠功臣)에 봉해지고 상서좌복야 참지정사(尙書左僕射 叅知政事)로 승진하였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영예로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정벌은 고려에게도, 또 지휘부인 윤관과 오연총에게도 시련을 야기하였다. 동북면의 여진 부족들은 완안부에 구원군을 요청하여 이들과 함께 고려의 9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지리 정보에 밝은 이들의 집요한 공략으로 고려군은 각각의 성 안에 고립되고 말았다. 이에 예종은 다시 윤관과 오연총에게 지원군을 이끌고 가 구원하도록 하였다. 1108년(예종 3) 5월, 오연총은 1만의 병력을 이끌고 포위된 웅주(雄州)를 구원하는 데 성공하였다. 예종은 오연총을 양구진국공신 수사도 연영전대학사(攘寇鎭國功臣 守司徒 延英殿大學士)로 삼고, 귀환한 그에게 잔치를 열어주며 위로하였다.

그러나 전황은 점차 악화되었다. 여진의 공격은 계속되었고, 고려군은 악전고투를 거듭해야 했다. 1109년(예종 4) 4월, 오연총은 다시 동북면으로 출진했다. 이번에는 위기에 빠진 길주성(吉州城)을 구원하는 임무였다. 하지만 도중에 여진군이 길을 차단하고 습격하여 고려군은 크게 패하고 말았다. 윤관과 오연총이 다시 군을 정돈하여 길주로 향하려 할 때, 여진에서 화친 협상을 제안해 왔다. 고려 조정은 치열한 논쟁 끝에 이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9성 지역을 여진에게 돌려주고, 대신 이들이 고려에 침범하지 않는다고 하늘에 맹세하는 조건이었다. 귀환한 윤관과 오연총은 예종을 직접 알현하고 보고를 올리지도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국가의 전력을 기울여 단행했으나 결과적으로 얻은 것이 거의 없는 전쟁이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다. 윤관과 오연총 등 지휘부를 처벌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예종은 이들을 비호하였으나, 결국 오연총 등은 삭탈관직을 당하고 공신호도 박탈당하였다. 오연총의 인생에서 가장 큰 실패였다. 하지만 이로부터 불과 10여년 사이에 벌어지는 일을 감안하면, 이것이 오연총의 능력 부족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완안부는 이후 금(金)을 세우고 거란을 멸망시켰으며, 연이어 송의 수도를 점령하는 무서운 힘을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4 신중했던 정치가, 고요히 잠들다

예종은 ㅍ과 오연총을 곧 복권시켰다. 1110년(예종 5) 12월, 오연총은 중서시랑평장사 판삼사사(中書侍郞平章事 判三司事)에 임명되었다. 윤관 등이 이를 사양하였으나 예종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예종은 오연총에게 “비록 〈경에 대한〉 논의가 아직도 시끄러우나 힘써 노력한 것은 기록 할만하다. 이에 총애함을 내려 옛날의 지위를 복구하도록 하는 것이니, 당연히 보살피는 뜻을 이해하여 번거롭게 사양하지 말라.”라고 위로하였다. 이후로도 예종은 그에게 수사도 수태위 감수국사 상주국(守司徒 守太尉 監修國史 上柱國)을 내리고, 판이부사(判吏部事)·판예부사(判禮部事)·판병부사(判兵部事) 등을 제수하였다. 예종에게 오연총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원로 대신이었던 것이다. 1114년(예종9) 12월에는 그에게 추충공신(推忠功臣)의 호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복권된 뒤로 계속 관직은 받았지만, 그가 두드러진 활동을 했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1116년(예종 11) 5월, 오연총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 62세. 그 시대 기준으로는 적지 않은 나이였다. 예종은 그에게 문양(文襄)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측근들을 보내 주관하고 백관들이 모여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오연총은 열전에서 ‘스스로 삼가고 부지런히 일하며 행동을 믿음직스럽고 거짓이 없이 하였다.’라고 묘사되었다. 기록에 남은 그의 모습은 가급적 일에 신중을 기하며 안정적이고 정확하게 처리하려는 성격으로 느껴진다. 앞서 여진정벌 출병 당시에 윤관에게 염려를 전했던 일이 대표적이다. 또 부모를 봉양해야 하는 사람은 신기군에 징집되지 않도록 대상을 축소하도록 건의한 일이나, 서경 궁궐 창건을 주장하는 최홍사(崔弘嗣) 등의 의견에 반대하며 불필요한 공사를 일으키지 말자고 했던 일도 그러한 면모를 보여준다. 중요한 사신 업무를 철저하게 수행하여 공을 세웠던 것도 이런 성격 덕분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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