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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안석[王安石]

부국강병의 개혁을 설계한 북송의 정치가

1021년 ~ 1086년

왕안석 대표 이미지

왕안석

『歷代聖賢名人像冊』中國 故宮 南薰殿 소장본

1 출생과 출사의 길

왕안석(1021~1086)은 유교왕조 송조(宋朝)의 적폐를 개혁하고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실현하고 했던 정치가이다. 그는 중국 역사에서 정치적·사상적으로 격렬한 논쟁의 중심에 선 인물인 동시에 당·송 시대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8명의 문필가, 이른바 ‘당송 팔대가’(한유·유종원·구양수·소순·소식·소철·왕안석·증공)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왕안석의 자(字)는 개보(介甫), 호는 반산(半山)으로 강서성 무주(撫州) 임천현(臨川縣)에서 태어났다. 지방관을 역임한 아버지 왕익(王益)의 영향으로 각지를 돌며 민생의 현실을 직접 목격하며 성장했다. 유년 시절부터 매우 총명해서 한 번 눈으로 본 글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지독할 정도로 독서를 좋아했고, 한 번 붓을 들어 글을 써 내려가면 주옥같은 문장이 될 정도로 뛰어난 문장력과 통찰력이 출중했다.

북송 인종대인 1037년(景祐 4) 왕안석은 부친을 따라 상경해 당대 최고의 문인인 증공(曾鞏), 구양수(歐陽修)와 조우하며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았다. 1042년(慶曆 2) 도성 개봉에서 열린 회시(會試)에 참가해 진사에 급제했다. 회남절도판관(淮南節度判官)·양주첨판(揚州僉判)·인현지현(仁縣知縣)·서주통판(舒州通判) 등의 지방관을 역임하며 현지의 기반 시설을 정리·확충하고 학교 교육을 확대하는 등 혁혁한 업적을 쌓았다. 당시 재상 문언박(文彦博)은 그의 탁월한 수완과 명리를 좇지 않는 인품에 탄복해 직접 황제에게 중앙 관직을 추천했고, 구양수역시도 그의 날카로운 식견과 비판적 통찰력을 높이 평가해 간관(諫官)의 자리에 추천했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의 병환과 가족의 부양을 이유로 관직을 사양했다. 왕안석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중앙의 요직에 나아갈 기회를 마다하고 지방관을 자처하며 민생의 현실에 더 밀접히 다가갔다. 이는 훗날 그의 개혁 구상과 정책 입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058년(景祐 3), 마침내 왕안석은 지역 각지의 재정을 총괄하는 탁지판관(度支判官)에 임명되었다. 이 중앙 관직에 부임하는 동시에 그는 인종 황제에게 만자에 달하는 장문의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것이 바로 명문으로 알려진 「상인종황제언사서(上仁宗皇帝言事書)」(속칭 ‘만언서’)이다.

이 글에서 그는 송조가 직면한 현실을 위기 상황으로 진단하며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개국이래로 차츰 누적된 국가재정과 민생의 빈곤함 그리고 거란과 서하 등 주변국의 위협에 맞설 수 있는 군사력의 약세 등 이른바 ‘적빈적약(積貧積弱)’의 심각성을 설파했다. 그는 이러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인재 양성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교육·처우·선발·임용 등 네 가지 영역으로 집약된 인재 양성은 부국강병으로 가는 첫 번째 단계였기 때문이다.

간결한 필치로 기백과 힘이 넘치는 어조를 담아낸 이 글은 진(秦)·한(漢) 시대 이후 최고의 명문으로 평가받았다. 그를 싫어하고 반대했던 사람들조차도 “문장을 이끌어가는 힘이 마치 수십만 대군을 흐트러짐 없이 지휘하는 장수와 같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상소문은 비록 당시 황제와 조정에 의해 정책 입안으로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그가 줄곧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개혁의 취지와 목적을 공식적으로 알린 계기가 되었다.

1063년(嘉祐 8), 왕안석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사직서를 제출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상례를 치뤘다. 다음 황제인 영종(英宗)의 재위 기간 여러 차례 조정으로의 복귀를 요청받았지만, 그는 복상(服喪)과 지병을 이유로 복귀를 사양했다.

2 부국강병의 꿈과 개혁의 구상

1067년 약관 20세의 새 황제 신종(神宗)이 즉위했다. 왕안석과 그의 개혁이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절대적인 지지자 신종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왕안석의 명성을 들어왔던 황제는 국정 쇄신을 위해 그를 중용했다. 당초 신종은 그를 중앙관으로 임용하려 했으나 병을 이유로 고사하자, 지금의 난징인 강녕(江寧)의 지부(知府)로 삼았다가 6개월 후 한림학사(翰林學士)로 발탁했다. 이 관직은 황제의 조칙을 작성하고 자문에 응하는 측근에 해당한다. 향후 재상 등의 요직에 진출하는 디딤돌이 될 만큼 중대한 직책이다. 신종은 왕안석과의 첫 대면에서 이렇게 물었다. “짐은 경(卿)의 명망을 들은 지 오래되었소. 지금 정치에서 무엇이 가장 시급하오?” 왕안석은 “정책의 방향을 결정짓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옛날 성왕인 요순(堯舜)을 본받아 간요하고 번잡하지 않은 정책의 실시를 제안했다.

황제는 왕안석과 몇 차례의 대면을 통해 그의 개혁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1069년 왕안석은 부(副)재상인 참지정사(參知政事)의 자리에 올라 개혁을 위한 정책 입안에 착수했다. 그는 먼저 개혁 입법과 제도 시행의 실무를 전담하는 특별 임시기구를 설치했다. 제치삼사조례사(制置三司條例司)는 특히 재정기관인 삼사(三司)의 전반적인 체제 및 제도를 검토하고 개선하는 권한을 가졌다. 비록 이 기구는 1070년에 폐지되었지만, 송조의 재정 정책을 주도하며 여러 개혁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역사에서는 왕안석의 개혁을 ‘변법(變法)’ 혹은 ‘신법(新法)’이라고 기록했다. 북송 신종 황제의 재위 기간에 속하는 희녕(熙寧)이라는 연호를 써서 ‘희녕변법’이라고도 부른다. 부국강병의 이상을 목표로 삼은 그의 개혁은 개국 이래로 누적된 빈약한 국가재정과 군사력을 개선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이른바 ‘삼용(三冗)’ 즉 세 가지(冗官·冗兵·冗費)의 헛된 낭비로 초래된 재정의 문제는 나라를 심각한 위기에 놓이게 했다.

첫째, 지나치게 방대한 관료체제는 넘쳐나는 관원의 수에 비해 매우 낮은 행정 효율의 문제를 초래했다. 유교왕조인 송조는 문인 관료를 중용하며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하려 했다. 중앙과 지방을 긴밀하게 연결하기 위해 많은 관리를 뽑았고, 행정기관과 부서가 늘어난 만큼 더 많은 관리를 채용했다. 나라가 그들에게 지급해야 할 봉록도 중앙재정으로 감당해야 했기 때문에 재정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실무가 없는 관리에게도 봉록을 지급할 정도였다.

둘째, 병사(군인)의 수는 넘쳐날 정도로 많았지만 느슨한 훈련체계로 전투력이 매우 허약했다.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경시하는 기조하에 송조는 모병제를 실시해 군대를 유지했다. 특히 북방의 거란(契丹)과 서하(西夏)의 위협에 맞서 막대한 병력을 변경 지역에 배치해야 했다. 대규모의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식량과 물자를 충분히 운송·공급해야 하기 때문에 군사비 부담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셋째는 중앙재정 관리의 빈약함이다. 송조의 절대다수 인구는 농민이고, 국가는 그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여 재정을 충당했다. 하지만 늘어나는 재정 지출만큼 농민의 납세 부담은 증가할 수밖에 없다. 과중한 부담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국가는 다양한 방식으로 재정수입을 도모해야 하지만, 송조는 이미 방대한 관료체제와 군대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재정의 상당 부분을 지출해야 했다.

왕안석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 실행에 옮겼다. 1069년(희녕 2) 균수법·청묘법·농전수리법을 시작으로, 이듬해인 1070년 면역법·보갑법이 도입되었다. 다음으로 시역법·방전균세법·보마법·면행법·장병법 등이 시행되었다. 왕안석의 변법은 새로운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제도와 과거제 개혁까지 국정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었다.

3 변법의 주요 내용

그의 개혁은 크게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국가재정을 확충하는 것,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는 것 등이다.

첫 번째 영역에 속한 개혁에는 균수법·청묘법·면역법·시역법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균수법(均輸法)은 지방으로부터 물자 운송을 효율적으로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매년 정부에서 필요한 물자를 조사해서 각 지역에 그 수량을 적절히 할당하는 제도이다. 국가의 유통구조를 효율화시켜서 재정 낭비를 줄이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동시에 정부가 물자의 유통에 직접 개입해 산지의 저렴한 물품을 다른 지역으로 운송·판매함으로써 재원을 확보하도록 했다. 중간 상인의 폭리를 억제하고 물자의 유통을 국가가 관할할 수 있도록 한 이 제도의 시행으로 중앙의 재정 지출을 줄이고 막대한 이익을 거둘 수 있었다.

청묘법은 ‘청묘(靑苗)’의 시기, 즉 곡식이 아직 여물지 않아 파릇파릇한 춘궁기에 낮은 이자로 농민에게 대출해 주는 제도이다. 당시 곡식이 부족한 시기에 농민들은 고리대금업자로부터 돈이나 곡식을 빌렸다. 그리고 가을에 수확이 끝난 후 상환하는데, 그 이자가 5할 내지 6할에 달했다. 청묘법은 그보다 훨씬 낮은 2할의 이자만을 부과했는데, 연리로 계산하면 4할의 이자인 셈이다. 이런 취지와는 달리 각 지역의 관리들은 시행 실적을 위해 무리하게 청묘법을 실시해 많은 폐단을 낳았다. 필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대부를 강요한다거나, 가을에 원리금을 갚지 못해 도망간 사람 대신 이웃에게 상환하도록 하는 등이 그것이다. 이 제도의 시행이 소농민의 생활 안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 적지 않았다.

두 번째 영역은 군사력 강화를 위한 개혁으로, 여기에는 보갑법·보마법·장병법이 있다. 보갑법은 1070년 수도 개봉에서 처음 도입되어 전국으로 확대된 제도였다. 이 제도는 농민들을 일정한 조직 즉 ‘보갑(保甲)’으로 편성해서 자율 경찰의 업무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10가구(戶)를 1보(保)로, 5보를 1대보(大保), 10대보를 1도보(都保)로 편제해 각 조직마다 책임자를 두어 순찰 및 방범활동 등 치안유지를 하도록 했다. 왕안석의 구상은 농민의 보갑을 장차 민병부대와 같은 군대조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보갑법과 더불어 도입된 군사력 강화를 위한 조치가 보마법(保馬法)이다. 거란과 서하의 군대와 전쟁을 치루기 위해서는 기병의 기동력이 필수였기 때문에 말의 확보는 매우 중요했다. 송조는 그동안 관영 목마장을 설치해 군사용 말을 사육했지만, 그 실적이 아주 미미해 막대한 재정만 축내고 있던 상황이었다. 보마법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군사용 말을 기르게 하고, 그 농가에게 세금을 감면해 주는 등의 혜택을 주었다. 정부의 재정 지출이 크게 줄었고 군사용 말의 확보도 용이해졌다. 하지만 보마법 역시 실제 시행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이 발생했다. 규정상 원치 않는 농민에게는 말의 사육을 강요할 수 없지만, 이 규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강제적으로 말의 사육을 떠안는 농민이 적지 않았고, 말 사육에 익숙지 않아 말이 병들거나 죽는 경우 큰 배상금을 무는 사례도 많았다.

세 번째 영역은 새로운 인재 양성을 위한 학교 교육과 과거제의 개혁이다. 그동안 국내 학계에서는 왕안석의 개혁을 주로 재정 및 경제정책의 시각에서 조망한 관계로 과거제 개혁의 내용이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이 영역은 왕안석의 개혁에 담긴 사상은 물론 그의 신법을 반대했던 인물들과 첨예한 대립각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1071년 2월 왕안석은 새로운 과거제 시행에 관한 법령을 반포했다. 북송 초부터 실시되어 오던 진사과(進士科) 과목 중 시부(詩賦)·첩경(帖經)·묵의(墨義) 과목이 전면 폐지되었고, 『논어』와 『맹자』를 필수로 지정했다. 그는 화려한 글솜씨를 보여주는 시부나 암기 위주의 경전 해석으로는 장차 실무에 밝은 인재를 양성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오경(五經, 시경·서경·역경·예기·춘추)을 선택 과목으로 지정하고, 그 가운데 『춘추(春秋)』를 빼고 『주례(周禮)』를 넣었다. 이는 공자의 『춘추』를 연구해 온 수많은 학자의 반발을 가져왔다. 특히 그의 신법을 반대했던 사마광·한기·구양수·여공저·정호·정이 등의 저명인사들은 왕안석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더욱 큰 논란을 가져온 것은 그가 직접 편찬한 『삼경신의(三經新義)』(1073)가 공식적인 경전 해석의 표준서로 채택된 일이었다. 경의국(經義局)을 설치하고, 왕방·여혜경과 함께 『시』·『서』·『주례』등 세 경전에 대한 주해 작업을 통해 완성된 이 책이 과거시험에 응시하는 이들에게 필독서가 되었던 것이다. 북송 중후기에 일어났던 새로운 경전 해석과 다양한 학파의 출현은 송대 신(新)유학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는데, 바로 이 무렵 왕안석의 『삼경신의』가 나왔다. 그를 반대하는 조정 대신들은 물론 재야의 학자들까지 가세해 독단적인 처사라고 맹비난했다.

과거제는 인재 등용의 관문이자 향후 정계를 주도할 인물이 나온다는 점에서 그의 개혁안은 정치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왕안석의 개혁을 후원했던 황제도 점차 그에 대한 지지를 접기 시작했다.

4 사후 역사 평가와 조선의 인식

1074년(희녕 7) 4월 왕안석은 잠시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나 지방관으로 좌천되었다. 파직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1073년 가을부터 1074년 봄까지 이어졌던 긴 가뭄이었다. 이때까지도 그에 대한 황제의 신임은 여전했다. 1075년 신종은 다시 왕안석을 재상의 자리로 불러들였지만, 왕안석의 아들 왕방(王雱)이 불과 33살의 나이에 갑작스런 죽음을 맞았다. 왕안석은 깊은 시름에 잠겨 황제에게 사직과 낙향을 간절히 요청했다. 황제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강녕부의 관직을 내렸지만, 그는 이마저도 사임하고 제2의 고향 금릉(金陵)에 은거했다. 소박하고 유유자적한 은퇴 생활 중 그의 지병은 점점 악화되었다. 40여 년을 해로한 부인 오씨(吳氏)마저 먼저 세상을 떠나자 병세는 더욱 나빠졌다. 조정에서는 의원을 보내 그의 병세를 호전시켜보려 했지만, 결국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정적 사마광이 사망한 해(1086)에 왕안석은 향년 66세로 부모와 아들의 곁에 묻혔다.

1085년 신종이 붕어(崩御)하고 어린 철종이 즉위하면서 고태후(高太后)의 섭정이 시작된 원우(元祐) 연간(1086~1093)은 사마광에 의해 신법이 전면적으로 폐지되고 구법당이 재등장한 시기였다. 이른바 원우 당쟁이 촉발되면서 왕안석의 신법당은 정계에서 축출되는 국면을 맞았다. 그러나 고태후의 서거와 동시에 철종의 친정이 시작된 소성(紹聖) 연간(1094~1098)에 신법당이 국정을 장악하는 반전이 이루어졌다. 철종은 신종이 시행했던 신법을 계승하겠다는 ‘소술(紹述)’의 의지를 천명하고, 장돈(章惇)과 증포(曾布)를 중용해 신법의 주요 정책을 복구시켰다. 신구간의 당쟁은 더욱 극단으로 치달았고, 휘종과 흠종의 시대에는 북송의 암울한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도교와 서화의 유희에 빠진 휘종은 모든 권한을 재상 채경(蔡京, 1047~1126)에게 맡겨 버렸다. 신법의 기치를 내건 채경은 구법당에게 가혹한 탄압을 가했는데, ‘간사한 무리[奸黨]’라는 오명을 씌워 총 309명의 이름을 비석[元祐黨籍碑]에 새겨 전국 곳곳에 세웠다. 채경의 전횡으로 신법은 왕안석 시대의 개혁 색채를 모두 잃어버렸다. 명목상 신법의 제도를 채택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는 극악한 제도로 변질되어 버렸다.

북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성립하자 신법에 대한 비판과 부정이 대세로 자리 잡게 되었다. 심지어 북송 멸망의 원흉이 왕안석이라는 말이 공식화되기도 했다. 북송 말 신법당 측의 탄압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반감이 왕안석과 그의 신법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실록에도 반영되었다. 남송 황제 고종은 『신종실록』을 고쳐 쓰도록 명했고 왕안석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공식적인 역사평가로 굳혀졌다. 몽골의 원대(元代)에 편찬된 『송사(宋史)』도 왕안석의 부정적 측면을 전해주는 사실만을 나열했다. 또한 신법당의 주요 인물인 여혜경·채경·채확·형서·증포·장돈 등은 모두 「간신전(奸臣傳)」에 들어가 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왕안석과 신법에 대한 기록이 매우 많은데, 당송 팔대가로서의 문장력을 높이 평가하는 일부 기록을 제외하면 모두 부정 일변도의 평가이다. 세종대왕은 “왕안석은 재주가 많은 소인(小人)”이라고 평했고, 조선 후기의 계몽 군주 정조 역시도 『송사』 「왕안석전(王安石傳)」의 부정적 평가를 따랐다. 조선 시대 군주와 학인들 모두 원대에 편수된 『송사』를 통해 왕안석과 그의 신법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으로 성리학을 집대성한 남송의 주희가 왕안석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는 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공리(功利)보다 도덕을 높이는 것이 공맹(孔孟)의 유교 사상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왕안석의 개혁은 매우 실용적이고 진보적인 측면이 존재한다. 그가 시대를 앞서간 개혁가였다면, 불행히도 그의 개혁과 사상이 그 시대가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앞서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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