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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청신[柳淸臣]

칼날 위의 외줄타기 같았던 정치 인생

미상 ~ 1329년(충숙왕 16)

유청신 대표 이미지

천안 광덕사 호두나무(천연기념물 제398호)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유청신(柳淸臣)은 고려후기의 통역관 출신 정치가이다. 출생 연도는 미상이며 1329년(충숙왕 16)에 사망하였다. 충렬왕(忠烈王) 시대부터 충숙왕(忠肅王) 시대에 걸쳐 활동하였다. 원(元)에서 처음 호두나무와 열매를 고려에 가져와 심었다는 일화가 있다. 천안 광덕사(廣德寺)에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2 부곡 출신의 통역관, 외교의 최전선에 서다

유청신의 원래 이름은 유비(柳庇)였다. 그의 고향은 장흥부(長興府) 고이부곡(高伊部曲)이었다고 한다. 유비의 선대는 이 지역의 향리였다. 고려시대에는 지역에 따라 거주민의 지위가 다른 경우가 있었다. 부곡에 사는 주민은 일반 군현에 사는 주민보다 사회적인 지위가 다소 낮았다. 유비의 집안은 부곡 내에서는 향리로서 비교적 지위가 높았겠지만, 고려 전체를 놓고 보면 부곡 주민이 받는 차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부곡에 사는 주민은 평소에도 일반 군현의 주민보다 국가에 부담해야 하는 역이 컸던 것으로 보이며, 관직에 올라도 승진에 제한을 두는 등 차별을 받았다.

젊은 유비가 택한 길은 몽골어 통역관이 되는 것이었다. 그의 열전에서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담력이 있었으며 몽골어를 배워서 여러 번 사신을 따라 원에 가서 응대를 잘 하였으므로, 이로 인하여 충렬왕의 신임을 얻어 낭장(郎將)에 임명되었다.”라고 하였다. 이때는 이른바 원간섭기 초기였다. 고려와 원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성립하며 많은 문물과 인적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통역관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앞 시대와 달라진 위상이었다. 스스로의 선택이었는지 우연한 기회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유비는 이러한 시대적인 변화의 선두에서 성공한 통역관으로 대두하였다. 답답한 부곡에서 벗어나 넓은 고려와 원 사이의 세상을 누비며 얼마나 큰 자유를 느꼈을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유비의 활동이 처음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1280년(충렬왕 6)이다. 당시 왜구가 합포에 침입하자 고려에서 이를 원에 보고했었는데, 원 황제가 고려에 군을 동원하여 왜구를 막으라고 내린 지시를 유비가 가져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시점은 몽골-고려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하려 준비하고 있던 민감한 시기였다. 긴밀한 공조가 필요한 상황에서 유비가 중요한 역할을 이미 맡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듬해에 원정이 태풍 때문에 실패했다는 보고를 할 때에도 유비가 원에 파견되었다. 1282년(충렬왕 8)과 1283년(충렬왕 9)에 일본 원정과 관련된 업무가 생겼을 때에도 역시 유비가 담당하였다. 황제가 충렬왕에게 부마국왕(駙馬國王)의 금인(金印))을 하사했을 때 이를 받아온 것도 유비였다. 당시 그는 정6품 무반 관직인 낭장(郎將)의 지위에 있었다.

중요한 업무들을 잘 수행한 유비는 중랑장(中郞將)을 거쳐 정4품인 장군(將軍)까지 승진하였다. 이는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부곡 출신은 5품까지만 승진할 수 있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유비가 세운 공은 이를 넘을 정도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1287년(충렬왕 13)에는 3품인 대장군(大將軍)까지 승진하였다. 충렬왕은 조인규(趙仁規)를 특히 총애하여, “유청신은 조인규를 수행하여 혼신의 노력으로 공을 세웠다. 비록 그 가문이 5품에 한정되어 있지만, 〈유청신〉 본인에 한해서는 3품까지 승진을 허락한다. 또 고이부곡을 고흥현(高興縣)으로 승격시키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리기까지 하였다는 사실이 열전에 특기되어 있다.

이후로도 유비는 양국 간에 중요한 현안을 논의할 때마다 큰 역할을 하였다. 충렬왕의 신임을 받은 유비는 승지(承旨)에 임명되기까지 하였다. 국왕을 보좌하는 최측근의 자리였다. 1295년(충렬왕 21)과 1296년(충렬왕 22)에는 세자, 즉 훗날의 충선왕(忠宣王)과 원 황실의 혼인을 요청하는 사신으로 거듭 파견되었다. 이제 그의 지위는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까지 올라갔다. 부지밀직사사는 종2품의 관직으로, 재추(宰樞) 즉 재상급의 지위였다.

3 힘들게 오른 재상의 지위, 격랑에 휘말리다

지금까지는 유비가 탄탄대로를 달리며 출신을 극복하고 성공하는 이야기였다. 현재의 국왕에게 총애를 받고 차기 국왕의 혼인을 주선하는 역할을 맡게 된 유비. 하지만 일생동안 순탄한 길만을 걷게 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더구나 유비가 몸담고 있는 정치계는 가장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들이 살았던 원간섭기는 고려와 원의 정치가 연동되어 얽히며 아주 복잡한 판세가 형성되었던 때였다, 충렬왕-충선왕-충숙왕으로 이어지는 이 시기도 그러했고, 유비는 그 복판에서 크게 부침을 겪게 된다.

충렬왕과 충선왕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지만, 정치적으로는 갈등을 빚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충렬왕의 최측근이었던 유비가 전위표(轉位表), 즉 왕위를 아들 충선왕에게 넘긴다는 표문을 들고 원에 갔다는 사실이다. 사실 유비는 충선왕이 아직 어린 세자였을 때부터 곁에서 모셨다. 1291년(충렬왕 17)에 세자는 정가신(鄭可臣), 유비와 함께 외조부이자 원의 칸인 쿠빌라이를 뵙고 정치에 대해 가르침을 들었다. 1292년(충렬왕 18)에 세자가 쿠빌라이를 뵈러 갔을 때에도 유비는 정가신과 함께 세자를 수행하였다. 이런 인연을 토대로 유비는 점차 세자, 즉 충선왕과 가까워졌던 듯하다.

1298년(충렬왕 24) 1월, 충렬왕은 세자에게 왕위를 넘겼다. 새 국왕으로 즉위한 충선왕은 충렬왕의 측근들을 견제하는 한편, 다방면에 걸쳐 내정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 해 5월, 유비는 광정부사 겸 권참지기무(光政副使 兼 權參知機務)에 임명되었다. 관제 개편과 함께 이루어진 인사 조치였다. 왕명의 출납과 궁중의 숙위를 맡은 광정원(光政院)의 2인자 자리였다. 충선왕의 최측근으로 새 시대의 정치를 주도할 역할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때, 고려의 정계는 거센 풍랑을 만나게 된다. 이른바 ‘조비(趙妃) 무고 사건’이 터지면서, 충선왕의 장인이자 정계의 거물이었던 조인규趙仁規)가 큰 타격을 받게 된 것이다. 유비와 함께 충선왕의 세자 시절 측근이었던 정가신도 갑자기 세상을 떴다. 세간에서는 충렬왕의 원치 않은 양위와 관련한 자살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원은 결국 충선왕을 폐위시키고 충렬왕을 다시 즉위시켰다. 충선왕에 반대하는 세력의 공작이 성공했던 것이다. 유비가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임명된 직후 시점이었다.

이 시점부터 1307년(충렬왕 33) 무렵까지 충렬왕과 충선왕 세력은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 결국 충선왕이 정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유비는 그의 측근으로 정계에 다시 굳건히 뿌리를 박았다. 이 무렵부터 유비는 유청신이라는 이름으로 사료에 나타난다. 충선왕이 복위한 이후 유청신은 도첨의찬성사 판군부사사(都僉議贊成事 判軍簿司事)와 첨의정승(僉議政丞)에 오르고, 고흥부원군(高興府院君)에 봉해져 옥대(玉帶)를 하사받았다. 그의 인생에서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4 비정한 권력 투쟁, 진실은 어디에?

이렇게 화려한 이력을 지닌 유청신은 『고려사』 ‘간신(姦臣)’ 열전에 실려 있다. 이른바 ‘입성책동(立省策動)’, 즉 고려를 없애고 원의 한 행성(行省)으로 편입시키자는 주장을 펼쳤다는 이유에서다. 당시의 국왕인 충숙왕을 밀어내고 심왕(瀋王)을 고려국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혐의도 함께 붙어 있다. 이는 충숙왕대의 정치 상황과 관련이 있다. 이 시기의 기록은 다소 모호하여, 실제로 유청신이 어떠한 입장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가 간신 열전에 실리게 된 것은 부곡 출신이라는 점과 관련된 왜곡이라는 시각도 있다. 심왕을 고려국왕으로 옹립하는 것과 고려를 없애고 행성으로 편입시키는 것이 충돌한다는 점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대체 당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아버지 충렬왕과 왕위를 둘러싸고 극심한 정쟁을 벌였던 충선왕은 아들 충숙왕과도 갈등을 빚었다. 충선왕은 원에서 성종(成宗)이 사망한 후 발생한 제위(帝位) 계승 분쟁에서 무종(武宗)을 옹립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워 입지를 다졌다. 고려 왕위에서 폐위되어 원에 머물던 시기의 일이었다. 이후 그는 심왕(瀋王)과 고려국왕의 지위를 겸직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심왕 자리는 자신의 조카 왕고(王暠)에게, 고려국왕의 자리는 아들에게 넘겨주었다. 이렇게 고려국왕으로 즉위한 충숙왕은 자신의 입지를 찾는 과정에서 충선왕및 그 측근들과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

이 과정에서 충선왕의 측근이었던 유청신은 충숙왕과 충돌하였다. 충돌 과정에서 유청신은 심왕과 결탁하여 그를 고려의 국왕으로 옹립하거나, 혹은 아예 고려를 없애고 원의 행성으로 편입시키려는 시도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이제현(李齊賢) 등의 노력으로 실패하였다. 결국 충숙왕이 정쟁에서 승리하여 고려국왕으로서 입지를 확보하게 되자, 유청신은 고려로 돌아오지 못하고 원에 머물다가 세상을 떠났다. 『고려사』 열전에서는 말미에 그에 대해 참언(讖言)까지 인용하며 가혹한 평을 내렸다. “〈유청신은〉 배우지 못하여 아는 것은 없었으나, 임기응변에 능해 권세를 믿고 국권을 농락하여 나라에 해독이 되었다. 당시 묘부곡(猫部曲) 사람이 조정에 벼슬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참언이 있었는데, 우리말로 묘(猫)는 괭이[高伊]이다.”

그의 일생을 돌이켜보면 언제나 칼날 위에서 외줄타기를 탔던 것처럼 느껴진다. 충렬왕대의 각종 외교 현안 처리부터 말년의 정쟁까지, 유청신은 가장 민감한 정치적 이슈들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다. 원간섭기라는 복잡한 시기에 통역관으로서의 삶을 선택한 그 순간부터 예정된 일이었을까. 가장 은밀하고 복잡한 현안들에 개입되었기에, 표면적인 기록에 드문드문 남아있는 수백 년 전의 기록만으로 그에 대하여 명확한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의 삶이 당시의 시대적 환경과 얼마나 격렬하게 얽혀 있었는지는 이 자료들만으로도 충분히 볼 수 있다. 시대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삶이라는 것에 대하여 돌아보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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